# 1039
테리나는 암고양이처럼 현수를 살핀다.
“자야지. 자자. 조금 고단하네.”
현수는 가운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테리나는 기다렸다는 듯 품을 파고든다.
“아아! 좋아요.”
현수의 가슴엔 팔을 얹고 다리는 허벅지 위에 올린다. 그리곤 얼굴을 묻고 잠을 청한다.
그런데 테리나의 심장의 박동이 점점 빨라짐이 느껴진다. 뭔가 기회를 노리는 것이 분명하다.
“자기야, 오늘 밤 우리…….”
“딥 슬립!”
“……!”
현수의 나직한 말 한마디에 테리나가 고개를 떨군다.
테리나의 염원이 아무리 강해도 딥 슬립은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흉포한 오우거도 최소 12시간은 꿈나라를 헤맬 강력한 마법이기 때문이다.
“미안해. 하지만 편히 자.”
테리나가 잠들자 현수는 다시 일어났다. 다 큰 처녀를 끼고 있을 수는 없어서이다.
“흐음! 몽골에 안 가려 했는데 할 수 없군.”
밤은 점점 깊어갔고, 현수의 상념 또한 깊어갔다.
* * *
“오랜만입니다, 대통령님.”
“하하! 반갑습니다, 김 회장.”
엘벡도르지 몽골 대통령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국가의 귀빈이 왔으니 예로써 맞이하는 것이다.
“그간 안녕하셨지요?”
“그럼요. 김 회장님도 잘 지냈나 봅니다.”
“네에, 조금 바쁘기는 했지만 잘 지냈습니다.”
“그러신 모양입니다. 조차지 때문에 온 사람들은 기자뿐이거든요.”
엘벡도르지 대통령은 현수가 조차지를 얻어놓고도 딱히 한 일이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네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곳에 움직임이 없다 하여 손 놓고 있던 건 아닙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정밀 측량을 하는 중입니다.”
“호오, 그래요? 한국에서 측량팀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아! 그 사람들은 러시아 이실리프 자치령을 통해 들어갔습니다. 앞으로는 울란바토르를 통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실리프 자치령을 개발하려면 엄청난 자본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거치게 되면 적어도 하루는 숙박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일종의 관광 수입이 발생하게 되는데 워낙 인원이 많아 액수가 클 것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탐삭블락 지역은 어찌 되는지요? 곧 봄이 올 텐데 가급적 빨리 농지조성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지역 또한 대한민국 영토보다 넓다. 따라서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며, 최소 10년은 지나야 된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시간을 당겨보려는 의도이다.
“조차지 측량을 마치는 대로 그곳 또한 조사하고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고비사막도 마찬가지구요.”
“김 회장님은 대단한 부자인가 봅니다. 이런 일은 사실 세계 최고의 부자라 하는 빌 게이츠도 엄두조차 못 낼 일인데 말입니다.”
“운 좋게 금광을 발견해서 가능한 일이지요.”
“그렇군요. 그나저나 용무가 있으신지요?”
“대통령님을 뵌 지 오래되었고 상의할 일도 있고 하여 찾아뵈었습니다. 바쁘신데 방해가 된 건 아닌지요?”
“무슨 말씀을……. 우리는 김 회장님의 방문을 언제든 환영합니다. 좋습니다. 저와 의논할 일이라는 게 뭔지 말씀해 주십시오.”
엘벡도르지는 무슨 말이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남바린 엥흐바야르 전 대통령…….”
현수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설마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 때문입니까? 그거라면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요청을 받아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남바린 엥흐바야르는 1958년 생으로 2005년부터 2009년까지 몽골의 대통령이었다.
구소련과 영국의 대학을 졸업한 후 시인 및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정계에 입문한 인물이다. 몽골 역사상 최초로 국회의장과 국무총리, 그리고 대통령직을 역임한 바 있다.
좌파 정당 출신이지만 재임 시절엔 사회주의 국가이던 몽골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하려 노력하였다.
하여 로이터통신은 남바린 엥흐바야르에게 ‘아시아의 토니 블레어5)’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재선에 실패하자마자 부패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됐는데 정적들에 의한 정치 보복이다. 그리고 대통령의 말대로 작년 8월에 사면을 받아 풀려난 상태이다.
현재는 재임 중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던 대한민국으로 망명을 준비 중인 상태이다. 정적들에 의한 재수감이 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는 현수가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남바린 엥흐바야르 전 대통령은 현재 몽골 인민혁명당(MPRP) 총재를 맡고 있다.
7장 사람 좀 쓰겠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현수는 남바린 엥흐바야르가 정적들에 의해 정치 보복을 당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낮은 탄성을 냈다.
“그런데 전 대통령은 왜……?”
“그전에 두 분 사이의 관계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우린… 나쁘지 않습니다. 전임 대통령의 국정 철학에 동의하는 부분도 많고요.”
엘벡도르지 대통령의 말의 저간에는 자신을 대통령이 되도록 힘을 기울여 준 민주당(MNDP)마저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 남바린 엥흐바야르가 수감된 건 본인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 자치령으로 모셔서 중히 썼으면 합니다. 대통령님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그건…….”
엘벡도르지 대통령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이야기인지라 즉답하지 못하고 잠시 우물거린다.
이때 곁에 있던 테리나가 끼어든다.
“남바린 엥흐바야르 전 대통령은 이실리프 자치령의 개발에만 힘을 쏟을 겁니다. 몽골 사람이 많이 들어와 살겠지만 그들이 정치 세력화되는 일은 없을 거구요.”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말이었나 보나. 잠시 더 시간을 갖고 생각하던 엘벡도르지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쁘지 않군요. 그분이 여기 계시면 계속해서 분란이 발생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면을 받아 풀려난 남바린 엥흐바야르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에 의한 재보복이 우려된다는 뜻이다.
그럴 경우 인민혁명당과 민주당은 더욱 격렬한 분쟁에 휩싸이게 된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나라는 제대로 된 발전을 이룰 수 없다.
한시바삐 처리되어야 할 법안이 의결에 상정조차 되지 못하면 민생에 해를 끼칠 수도 있고 국가 발전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확실한 예로 대한민국 국회를 들 수 있다.
늘 분쟁만 일삼고 상대 당의 의견은 무조건 반대하며 시간을 질질 끈다. 싸움박질 이외엔 아무것도 하는 일도 없으면서 세비만 타 먹는 국회의원들이 즐비한 곳이다.
회의를 하라고 했더니 삿대질하며 고성을 지르거나 멱살을 움켜쥐고 주먹다짐까지 한다. 나랏일을 논의하라고 뽑아 놓았는데 나라를 해치는 일만 하고 있다.
국해의원(國害議員)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도 싸다.
“그분을 데려다 어찌 쓰시려는 겁니까?”
“한국에서 모셔올 분과 힘을 합쳐 자치령 개발 책임을 맡겨볼까 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남바린 엥흐바야르 전 대통령이 홀로 자치령 개발의 총책임자가 된다면 자칫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몰려가게 될 경우 정부군과 반군 같은 모양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수의 말처럼 한국의 누군가와 협력하는 관계가 된다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인인 현수가 남바린 엥흐바야르보다는 한국에서 올 사람에게 더 힘을 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가 바라는 건 전임 대통령의 행정 능력과 추진력, 그리고 폭넓은 시야와 국제적 인맥일 것이다.
“저는 김 회장님의 뜻을 존중합니다.”
“감사하군요.”
2009년 대선 때 서로 상대 당 후보를 헐뜯었다. 그러지 않고는 표를 얻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여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 될 줄 알았는데 너무도 쉽게 허락받았다.
한편, 남바린 엥흐바야르 전임 대통령과는 아직 일면식도 없다. 그럼에도 거절치 않을 것이라 믿는다.
몽골에 남아 있으면 정적들에 의한 집요한 딴죽 걸기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잃었으니 그들에 대항할 수단은 많지 않다.
국민에게 호소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이미 선거를 통해 심판을 받았으니 가능성이 높지 않다.
재임 기간 동안 가장 사이가 좋던 한국으로의 망명이 성공하면 여생을 편안히 살기는 하겠지만 몽골로 되돌아가는 것은 난망한 일이 될 것이다.
남의 나라에서 모국 상황이나 살피며 사는 것은 꽤 피곤한 삶이니 마뜩치 않을 것이다.
반면, 이실리프 자치령을 성공적으로 키워낼 경우 추진력과 기획력, 그리고 업무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물론 10년쯤 지나야 얻을 수 있는 평가이다. 이럴 경우엔 다시 집권하는 결과를 도출시킬 수도 있다.
남바린 엥흐바야르를 견제하는 한편 힘을 합쳐 자치령 건설에 나설 인물로 낙점된 인사는 오정섭 전임 국방장관이다.
현수는 인터넷이 연결되자마자 4월 10일에 있었던 여성가족부 해체를 묻는 국민투표 결과부터 확인했다.
전체 유권자의 76.1%가 투표소를 찾았고, 71.8% 찬성표를 얻어 여성가족부 해체 안은 가결되었다.
이 투표율은 18대 대선의 투표율보다도 높은 수치이고, 찬성표는 현임 대통령의 득표율보다도 20.2%나 높다.
거의 모든 남성과 제대로 된 인식을 가진 여성들이 가결에 찬성한 결과이다.
선관위 발표 직후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으로서 여성가족부의 모든 업무를 정지시켰다.
그 결과 소속 공무원의 급여 지급을 제외한 예산은 단 한 푼도 집행되지 못하게 되었다.
감사원은 여성가족부가 그간 벌여온 일에 대한 정밀 감사를 시작하였고, 예산 낭비 사례가 발견되면 책임자를 반드시 처벌하기로 했다.
소속 공무원들은 일정 기간 대기 발령 후 정부 각 부서로 전보될 예정이다.
국방부처럼 여성가족부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진 부서로 전보되는 자들은 불행할 것이다.
정년퇴임할 때까지 한직 중의 한직을 전전하거나 정말 빡세서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드는 그런 업무를 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는 등대지기로 보내질 것이다.
이는 보복차원이 아니다. 기존 행정부의 각 부서는 이미 충원되어 있다. 다시 말해 빈자리가 없다.
그러니 남들이 꺼리는 곳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
등대지기는 부엌과 화장실이 딸린 방 한 개가 있는 곳에서 근무하게 된다. 식료품은 한 달에 한 번 배로 들어오는데 한 번 출근하면 3일간 근무하도록 되어 있다.
전에는 인터넷 사용이 가능했는데 근무 수칙을 바꿔 인터넷 사용을 금하기로 했다. 할 일이 없으면 온 동네 게시판을 더럽게 할 것이라 생각되어 내린 조치이다. 긴급 상황 발생 시 문자 메시지로 업무보고를 하도록 하면 된다.
어쨌거나 여성가족부 해체 결정이 난 후 이 일을 제기한 국방장관 오정섭은 사표를 제출했다. 해임되는 불명예보다는 명예로운 퇴진을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오정섭 전 국방장관은 현재 백수이다.
현수는 남바린 엥흐바야르와 보조를 맞춰가며 자치령 개발에 힘써줄 사람으로 이 사람을 낙점했다.
제안하면 흔쾌히 받아줄 것이라 예상한다. 그때 현수는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제시할 생각이다.
불의에 물들지 않고 권력과 타협하지 않던 참 군인이기에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무기를 업그레이드해 주는 정도면 만족할 것이다.
오 장관이 자치령 개발의 수장을 맡게 되면 그를 흠모하는 군 출신 인사가 많이 올 것이다. 그러면 지나로부터 영토를 지키는 문제는 거뜬히 해결될 것이다.
“참, 김 회장님께선 자치령 방어를 위해 무기를 도입하겠다고 했는데 그건 어떻게 되어갑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