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3
그런데 현수보다는 신갑제를 욕하는 내용이 훨씬 많다. 굳이 따지자면 《 김현수 : 중립 : 신갑제 = 2 : 1 : 7 》이다.
동선일보 게시판에는 신갑제 기자의 기사가 사실이 아닌 경우 어떤 처벌을 가할 것인지를 묻는 글이 올라와 있고, 그것에도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신갑제가 그동안 썼던 자극적이고 확인할 수 없는 기사들이 퍼 날라졌다. ‘김현수 불륜’은 검색어 2위이고, ‘기레기 신갑제’는 검색어 1위를 마크하고 있다.
즐거운 마음으로 회사에 출근한 민주영은 현수에 대한 기사를 보고 즉시 법무팀을 소환했다.
명예 훼손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준비시킨 것이다.
이런 줄도 모르고 신갑제는 테리나의 뒤를 따를 계획을 세웠다.
카메라도 챙겼다. 사람들의 관심은 현수가 아닌 금발미녀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지난밤 자신이 올린 기사의 댓글만 봤어도 신갑제는 패착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금발에다 몸매 좋고 얼굴이 예쁘자 테리나를 머리가 텅 빈 여자로 오인한 것이다.
자신이 하룻밤 데리고 논 걸그룹 멤버는 영어 한마디 할 줄 모르기에 하루 종일 호텔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신갑제의 예상대로 테리나는 객실을 떠났다.
경호원들이 따라붙었으나 사진만 찍을 것이므로 망원렌즈를 더 챙겼을 뿐이다.
테리나가 향한 곳은 울란바토르의 중심지에 위치한 수흐바타르(Sukbaatar) 광장이다.
이 광장엔 몽골 혁명의 아버지 담딘 수흐바타르(Дамдин Сүхбаатар)의 동상이 있다. 전면엔 몽골 대통령의 근무지인 Parliament house가 있다.
테리나가 백화점이 아닌 이곳을 찾은 이유는 증조부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브레즈네프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자격으로 몽골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대중 연설을 한 바 있다.
테리나가 광장 곳곳을 돌아보는 동안 신갑제는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그러면서 정말 예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만 있으면 자신도 현수처럼 거액을 주고 하룻밤을 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고급 콜걸로 오인한 것이다.
테리나가 좀처럼 광장을 떠나지 않자 호텔로 되돌아온 신갑제는 가장 예쁘게 나온 사진을 골라 기사에 첨부했다.
그리곤 사진 아래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달았다.
김현수 회장과 하룻밤 밀회를 즐긴 금발미녀!
지난밤엔 만족했을까?
곧이어 수많은 댓글이 달린다.
― 야, 이 기레기야! 이런 걸 기사라고 쓴 거야? 제목이 왜 이렇게 자극적이야?
― 헐! 이분은 예카테리나 일리치 브레즈네프 변호사야. 이실리프 그룹 고문 변호사라고.
― 예쁘긴 진짜 예쁘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봤다.
― 이실리프 어패럴의 항온의류 브로셔의 모델을 했네. 내수용엔 없고 외국판에만 있어.
― 쩐다! 절세미녀란 이런 여자구나! 근데 변호사라고?
― 무려 하버드 로스쿨 차석 졸업생이란다.
― 미국 최고의 로펌 ‘피어슨 & 하드먼’에서 스카우트했는데 거절한 재원 중의 재원이다. 그런데 겨우 불륜? 미친 기레기! 이런 걸 기자라고 하니, 쯧쯧쯧!
자신의 기사에 이런 일방적인 댓글이 달리는 줄 모르는 신갑제는 어젯밤 품은 걸그룹 멤버를 또 괴롭히고 있었다.
같은 시각, 현수는 몽골의 공장을 두루 돌아보았다.
문제는 품질이다. 이미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한국으로의 수출은 난망하다. 품질이 떨어지는 때문이다.
몽골 같은 나라는 경제 개방 이전에 제조업 육성과 산업화 초기의 강력한 보호정책, 그리고 적절한 시기의 자유무역이 시도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세계은행에 의해 전격적인 개방이 선언되었다. 1991년의 일이다.
그 결과 모든 산업의 생산 물량이 90%나 감소할 정도로 초토화되었다. 세계은행이 저지른 만행 중 하나이다.
현수는 생산되는 것들을 살피며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2% 부족한 게 아니라 12%가 부족하다 여겨진 때문이다.
“북한과 아프리카에선 쓰겠네.”
몽골 외교통상부장관의 안내를 받아 돌아본 공장 거의 다가 이러했다. 마치 한국의 60∼70년대를 보는 듯했다.
시찰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니 테리나가 우편엽서를 쓰고 있다. 모스크바의 부모님에게 보내는 것이다.
슬쩍 어깨너머로 보니 증조부의 발자취를 돌아보았다는 구절이 눈에 뜨인다.
객실을 둘러보니 쇼핑백은 겨우 하나이다.
9장 병신인갑제!
“테리나, 쇼핑한 게 별로 없나 보네?”
“없기는요. 자기야가 말한 그 샌들 사왔어요. 자기 발 크기 280㎜ 맞죠? 한번 신어보세요.”
쇼핑백에서 샌들을 꺼낸 짙은 갈색 슬리퍼엔 운형자 같은 문양이 박음질되어 있다. 발을 넣어보니 편하다. 양쪽을 다 신고 이리저리 걸어보았다.
“어때요?”
“좋은데? 잘 샀어. 무겁지도 않고 발이 편해.”
모양도 색깔도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다.
“다행이에요. 혹시나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어쩌나 했어요. 제 것도 샀어요. 짜짠―! 어때요?”
테리나가 산 것은 똑같은 디자인인데 색깔만 연한 붉은색이다. 누가 봐도 커플이라 할 것이다.
“예쁘네. 테리나에게 잘 어울려.”
“호호! 그래요? 그나저나 오늘 어디 다녀오셨어요?”
“으응. 오늘은 외교통상부 장관과…….”
테리나의 좋은 점은 중간에 말을 끊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는 동안 추임새도 넣지 않고 오로지 고갯짓과 끄덕임으로 의사를 표현한다. 덕분에 장황하지 않게 설명을 마쳤다.
“북한의 공산품도 거의 그럴 거예요. 둘의 공통점은 품질이 약간 떨어진다는 것과 싸다는 거예요. 아프리카에선 먹힐 거예요. 대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걸 만들어야죠. 예를 들어 우리가 신고 있는 이 샌들의 디자인을…….”
테리나는 다이어리에 쓱쓱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제법 잘 그린다. 금방 발뒤꿈치를 끼울 수 있는 디자인이 되고, 통풍을 고려하여 앞부분에 구멍을 뚫는다.
“이렇게 하면 낫지 않을까 생각해요.”
“좋은 아이디어야. 테리나에게 과제를 하나 주지.”
“설마 몽골과 북한의 공산품을 아프리카에 팔 수 있도록 기획안을 내라는 건 아니겠죠?”
“테리나는 머리가 좋아서 정말 좋아.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알지? 정말 신기해.”
“……!”
테리나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속으론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건 우리가 운명이라서 그래요. 저는 당신의 여인이 되고 싶어요. 날 밀어내지 말고 안아주면 안 돼요?’
테리나가 입을 다물자 현수는 금방 화제를 바꾼다.
“그나저나 샤워는 했어?”
“네? 그건 왜요?”
왜 씻었느냐고 묻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테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자신을 안아주겠다는 소리는 아닐 것이기 때문에 의중 파악이 쉽지 않은 것이다.
“울란바토르의 밤은 어떤지 궁금하지 않아? 여기에도 나이트클럽이 있다고 들었는데.”
가기만 하면 문제가 생기는 클럽에 가자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냥 기분 전환하자는 의도에서 한 말이다.
“어머, 정말요? 좋아요. 가요, 우리!”
테리나와 현수는 강남의 한 나이트클럽의 섹시댄스 경연대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처음 키스를 했고, 상금으로 100만 원을 받았다.
그날 현수는 변병도가 나대는 바람에 경찰서까지 갔다 와서 기분이 몹시 상했지만 테리나는 아니다. 좋아하는 사내와 키스를 해서 몹시 들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멀고 먼 타향에서 또 나이트클럽엘 가게 생겼다. 하여 저도 모르게 환히 웃으며 일어섰다.
어서 빨리 가자는 뜻이다.
“정말 그러고 갈 거야?”
“제가 뭘요? 어머나! 잠깐만요!”
외출했다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가운만 걸친 채 우편엽서를 쓰고 있었다. 가운 안에는 속옷도 입지 않았다.
그러고 나갈 뻔했기에 화들짝 놀라며 뛰어 들어간다.
현수는 양복 대신 청바지와 티셔츠를 걸쳤다. 이제부터는 놀 시간이기 때문이다.
늘씬하고 보기 좋은 몸매이다.
어깨는 벌어졌고 허리는 잘록하다. 살짝 스키니한 느낌의 티셔츠라 가슴 근육이 도드라져 보인다.
“자기야, 나 어때요?”
이심전심이란 말이 이럴 때 통용되는 듯하다.
테리나 역시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다. 청바지는 스키니지만 티셔츠는 헐렁한 박스형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휘이익―! 어이, 아가씨, 오늘 나하고 좀 놀아볼래?”
“쳇! 그러니까 깡패 같잖아요. 하지만 좋아요. 놀아드릴게요. 근데 어디서 놀아요?”
“이 호텔 지하에 나이트클럽이 있더군.”
“호호! 좋아요. 가요.”
테리나는 현수와 놀러 간다는 게 무척이나 즐거운지 얼른 팔짱을 낀다. 문 앞까지 갔는데 키를 놓고 왔다. 하여 키를 챙기는 사이 테리나는 객실 밖에 나가 있다.
현수가 나가자 테리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있다.
“힘드니까 너무 힘쓰지 말아요.”
“뭐라고?”
“어제오늘 너무 많이 움직였잖아요. 안 피곤해요? 그니까 살살 해요. 알았죠?”
“아! 난 또 뭐라고. 알았어. 걱정 마. 살살 할게. 그리고 나 안 피곤해.”
땡―!
종소리가 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둘이 타자 곧장 지하로 내려간다. 이를 바라보는 시선 한 쌍이 있다.
기레기 신갑제이다.
“뭐야? 뭘 살살 해? 많이 움직여서 피곤하다고? 저놈 저거 짐승인 거야? 그런 거야?”
신갑제는 얼른 객실 문을 닫는다. 그리곤 곧장 노트북을 펼치곤 키보드 위에 손을 얹는다.
그런 그의 뒤쪽엔 피곤에 지친 걸그룹 멤버 하나가 널브러져 있다. 진짜 짐승은 신갑제 본인이었던 것이다.
이실리프 그룹 김현수 사장은 짐승!
이 말은 김 회장과 같은 객실에서 이틀째 밀회를 즐기고 있는 금발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피곤할 테니 살살 움직이라고 속삭이며 불륜을 저지르는 이 커플은 어떻게 끝장이 날까? 한국의 아내를 의식하기는 하기는 하는지 두고 볼 생각이다.
신갑제는 어떤 말로 이어 쓸까 고심했다. 그런데 마땅히 쓸 말이 없다.
“근데 연놈은 대체 어딜 간 거지, 이 밤중에?”
지금처럼 늦은 시각엔 될 수 있으면 안 돌아다니는 것이 신변 안전에 좋다. 소매치기도 많고 재수 없으면 강도를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여 지금처럼 밤이 되면 객실에 틀어박혀 데리고 온 걸그룹 멤버를 유린했다.
현수와 테리나가 외출함에도 뒤따라가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어쨌거나 신갑제는 기사를 이어가려 애를 썼다.
같은 시각, 신갑제의 기사엔 계속해서 댓글이 늘고 있다. 그중 베스트 댓글은 다음과 같다.
― 하여간 이 기레기는 병신인갑제!
쿵쿵쾅쾅! 쿵쾅쿵쾅!
지하로 내려가니 발바닥에서 진동이 감지될 정도로 큰 음악이 울려 퍼진다. 한국에선 몇 년쯤 지난 댄스뮤직이다.
둘을 발견한 웨이터가 고개를 숙이며 환영한다.
“어서 옵셔!”
“안내 부탁합니다.”
“네에, 저를 따라오십시오.”
안내를 받아 간 곳은 스테이지가 한눈에 보이는 제법 괜찮은 좌석이다.
“무얼 주문하시겠습니까?”
“으음, 양주 적당한 거 한 병하고 안주는… 뭐 할래?”
“전 아무 거나. 아, 그냥 과일 주세요.”
“네에, 알았습니다.”
쿵쿵쾅쾅! 쿵쾅쿵쾅!
“와아! 이런 데 오랜만이에요.”
테리나는 즐겁다는 걸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나도 오랜만이야. 술 나오기 전에 한바탕할까?”
“호호! 좋아요!”
현수와 테리나는 스테이지에 올라 몸을 흔들었다.
둘 다 화류계 쪽과는 관련이 없는지라 그냥 음악에 맞춰 되는 대로 흔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