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5
“기대가 큽네다. 헌데 사람만 보내고 아무런 도움도 못 드려 송구합네다.”
김정은의 이 말 또한 사실이다.
자치령 개발에 관한 이야기를 현수에게 들었을 때 공화국도 그런 식의 개발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데 포기했다. 국력을 하나로 모아도 하기 힘든 일인데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군부엔 아직도 상당수가 강성이다. 부친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았지만 아직 완전하게 군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큰일을 벌이다 자칫 반발을 사거나 쿠데타가 일어나면 권력을 잃을 수도 있다.
하여 원하기는 하지만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석유화학단지에 관한 준비는 어떻습니까?”
“외국에 파견되어 있는 우리 공화국 인재들을 불러들이는 듕입네다. 아마 큰 힘이 될 거입네다.”
“덕분에 일이 아주 잘 진행될 것 같습니다. 위원장님과 공화국의 전폭적인 도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네다. 당연히 도와드려야 할 일이디요.”
진심을 담은 말이라는 게 느껴진다.
“조만간 천지건설 관계자들이 방북할 것입니다. 그때 잘 부탁드립니다.”
“걱뎡 마시라요. 그들은 매우 안전할 것입네다.”
관광객이 아니라 북한을 살리러 들어오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귀빈 대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선은 부지 확인을 하고 설계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할 겁니다. 그건 아시죠?”
“그렇겠디요. 일이란 게 착수하기 먼저 준비가 착실해야 무리 없이 진행되는 거이니까요.”
“알아주시니 고맙습니다. 참, 태양광 발전설비 설계도는 왔습니까?”
“왔다고 하더군요. 긴데 기건 약간 문제가 있습네다. 공화국에서 해결 못할 부분이 있다고 하더군요.”
“인버터와 파워 컨디셔너라면 그건 남한에서 공급하는 것으로 하지요. 기술이전이 되도록 할 테니 나중엔 공화국에서 만드셔야 합니다.”
태양광 발전으로 만들어지는 전기는 직류이다.
인버터는 이것을 가장 완벽한 사인 곡선이 그려지도록 하는 장치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압곡선에서 사인파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을 왜곡(歪曲, Distortion)이라 한다.
Power Conditioner는 공급되는 전기의 품질을 향상시키는 장치로 역률7)의 보정, 노이즈(Noise) 및 임펄스8) 제거 등의 기능을 가졌다.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갔습네다. 참, 종자는 어찌 되었습네까? 곧 파종 시기인데…….”
“올해는 어렵습니다. 일단 시험용을 드릴 테니 재배해 보도록 하십시오. 내년엔 공화국에서 필요로 하는 만큼 제공토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네다. 공화국의 육종학자들을 총동원하여 면밀히 살피라 하갔습네다.”
김정은은 공화국의 골칫거리인 연료, 전기, 식량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려는 현수가 너무도 고맙다.
본인도 얻는 바가 있겠지만 받는 것이 더 크다 생각하니 체면이 안 서는 느낌이다.
“우리 공화국에서 김 회장 동지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갔습네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지나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십시오. 공화국은 곧 완벽한 독립하게 될 것입니다. 전기, 연료, 식량 등 말입니다.”
“알갔습네다. 다시 한 번 지도하도록 하디요.”
요즘 김정은은 수시로 시찰을 나간다. 공화국 인민들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함이다.
실세들의 말만으론 그들이 무엇을 먹고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삶을 사는지 알 수 없었다.
얼마 전 김정은은 혜산을 방문했다.
양강도 중부 압록강 연안에 있는 이 도시로 간 까닭은 전방부대 시찰을 위함이다. 시찰을 마치고 시가지를 둘러보던 중 장바닥 꽃제비를 보았다.
바싹 말라 있었는데 물어보니 16세라 한다. 그런데 여덟 살짜리 아이보다도 몸무게가 더 가벼웠다.
꽃제비는 부모와 가족을 잃고 떠도는 청소년으로, 제대로 먹고 입지 못하며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 돌보는 이가 없기에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경우가 많다.
그때 비로소 인민들의 삶이 어떤지를 깨달았다.
10장 선물! 하얀 눈꽃
혜산을 다녀온 이후 김정은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아내인 리설주가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해도 상념에 잠겨 있었다. 남한과 북한의 현격한 차이에 대한 고찰의 시간이었다. 그때 현수를 떠올렸다.
성공한 기업가 이상인 인물이다. 어쩌면 북한을 완전히 개조시킬 능력의 소유자일 수도 있다.
현수를 생각만 하면 흠모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 국방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주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버지 김정일이 가지고 있던 자리이다. 제1위원장은 위원장보다 아랫자리이니 자신보다 윗자리에 현수를 올려놓을 생각을 한 것이다. 이는 절대충성 마법의 결과이다.
어쨌거나 김정은은 이제 남북한의 격차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다. 아울러 북한의 실상 중 일부는 파악했다.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한데 명분이 없다. 그리고 그걸 시도했을 때 반대세력을 장악할 힘이 아직 없다.
‘기다리자. 안주 기계공업단지와 석유화학단지의 공사가 마무리되고 러시아로부터 오는 가스관 연결 공사가 끝나면 그때는 충분한 힘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야.’
1875년에 칼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비판(Kritik des Gothaer Programms)’에서 처음으로 공산주의를 두 가지 단계로 구분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를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를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칭한 것이다. 이 중 사회주의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속한다.
아무튼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이다. 그런데 그런 나라치고 잘사는 나라가 드물다. 아니, 없다.
김정은은 젊고, 어린 시절을 자유주의 국가에서 보냈다. 당연히 더 나은 사회를 꿈꾼다.
거지같은 나라의 왕보다는 멋진 나라의 왕이 되길 꿈꾸는 것이다. 그런데 가난과 군부가 발목을 잡는다.
현재로썬 유일한 해결책이 현수이다. 그렇기에 현수에 대한 마음이 남다르다.
“김 회장 동지, 이건 여담인데, 브레즈네프 동무와는 어떤 관계이십네까?”
“네? 그건 왜요?”
갑자기 논점을 벗어난 물음에 현수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속내를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 두 분이 연인 관계이십니까?”
김정은의 이 질문은 그냥 확인 차원이다.
지난 방문 이후 현수를 최측근에서 수행한 최철 대좌와 호위사령부 제1특임대 군관 네 명과 사관 여덟 명은 조사를 받았다. 취조가 아니라 백화원 초대소와 송전각 초대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물은 것이다.
현수의 호불호를 파악하여 다음번 방문 때 이를 감안한 대접을 하겠다는 의도이다. 그러다 테리나와 현수의 관계에 대한 것을 물었다. 둘이 동침했는지의 여부를 확인한 것이다.
이에 대해 호위사령부 제1특임대원 전원이 하나같이 둘이 동침한 바 없다고 증언했다.
정신계 마법인 앱솔루트 피델러티의 효과이다.
그렇기에 테리나가 단순한 변호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안 그렇다면 동침을 하는 등의 일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는 김정은의 물음에 대꾸하는 대신 테리나를 바라보았다.
“테리나, 제1위원장께서 우리가 연인이냐고 물으시는데?”
“위원장님, 김 회장님은 지난해 연말에 권지현님과 결혼을 하신 유부남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저는 이실리프 그룹 법률고문 자격으로 이 자리를 수행하고 있는 겁니다.”
테리나는 속은 쓰렸지만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인 자리이기 때문이다.
“아, 그렇습니까? 뭐, 의심해서 물은 건 아니고 그냥 그럴 일이 있어 여쭤본 겁니다.”
“네에.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깔끔하고 단정한 태도인지라 김정은은 고개를 끄덕여 사과의 뜻을 표했다.
“오늘 밤 어쩌면 ‘하얀 눈꽃’을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공화국의 밤은 기니 즐겨주십시오.”
“…아! 오늘 눈이 오는 모양이군요. 저 눈 오는 거 좋아합니다. 기대되는군요.”
지난 12월에 송전각 초대소에 머물렀을 때 테리나와 더불어 설경을 즐긴 바 있다. 4월 중순이지만 이 지역은 눈 오는 게 이상하지 않다. 그때 생각이 나서 한 말이다.
“공화국의 눈은 부드럽습네다. 하하하! 하하하!”
“……!”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웃으니 같이 웃어주었다.
“만찬은 즐기고 가시디요.”
“그럼요. 전에 뵌 분들을 다시 뵐 생각입니다.”
“전에 주신 술만큼 좋은 건 아니디만 기래도 상당히 괜찮은 걸 수배해 뒀습네다. 기대해 주시라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중앙당 제1청사에서의 만찬은 성황리에 끝났다.
김정은이 언급한 술은 100년 이상 묵은 천종삼과 백사를 함께 넣어 담근 것이었다.
각각 1억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이니 귀한 술 맞다.
김정은은 건강상 술을 자제하는 대신 현수에게 많이 따라줬다. 사내에게 좋은 것이라며 계속 권한 것이다.
마다할 현수가 아닌지라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연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테리나를 청하는 로그비노프 특임대사의 전갈이 기다리고 있었다.
테리나는 러시아대사관으로 갔고, 오늘 밤은 그곳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다는 전갈이 왔다.
현수 입장에선 좋다. 오늘 밤 또 육탄 돌격을 감행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늦게 당도한 인사들이 있어 인사를 주고받느라 느지막이 나선 현수는 최철 대좌와 함께 벤츠를 타고 백화원 초대소로 향하고 있다.
“그간 잘 있었지요?”
“그럼요. 덕분에 아주 잘살고 있습니다.”
“어라, 말투가 조금 바뀌신 것 같습니다?”
“제1위원장님께서 김 회장님이 불편해하지 않으시도록 남조선 말투를 배우라 하여 그렇습네다. 아이코, 또 틀렸네요. 쩝! 연습 많이 했는데 자꾸 이럽니다.”
“잘하시는데요, 뭐. 참, 사모님과 아이들도 여전하죠?”
“아이고, 사모님이라니요. 아닙니다. 그냥 마누라쟁이디요. 에구, 또 틀렸네. 아무튼 다 회장님 덕분입니다.”
최철 대좌의 아내는 현수가 선물한 통조림을 팔아 제법 큰돈을 만들었다. 오래 두면 썩는 줄 알고 처분한 것이다.
나중에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후회했다고 한다. 북한에선 좀처럼 구하기 힘든 물건이기 때문이다.
“오는 길에 아이들이 좋아할 과자 좀 가져왔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최 대좌의 얼굴이 확 펴진다. 현수가 준 과자를 먹어본 아이들이 또 먹게 해달라고 졸라서 골치 아프던 차이다.
“가는 길에 들릅시다.”
“네? 아이고, 아닙니다.”
“아니긴요. 댁으로 먼저 가요. 아이들도 보고 싶으니.”
“네, 기럼……. 에쿠, 또 틀렸디요. 남한 말 참 배우기 어렵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최철 대좌는 운전자에게 시선을 준다.
“이보라, 김 상위. 전화 좀 하게 차 좀 잠깐 세우라우.”
“네, 대장님!”
차를 길가에 대자 최 대좌는 차에서 내려 집으로 전화를 건다. 북한에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손전화이다.
뭐라 통화하더니 금방 차에 오른다.
“실례했습니다, 회장님!”
“아뇨. 개의치 마세요.”
차는 이내 창광거리로 들어섰다. 굽이굽이 돌더니 최 대좌의 아파트 현관 입구에서 멈춘다.
“어서 오시라요.”
“안녕하세요? 최혁입니다.”
“저는 최명이야요.”
“지는 최전입네다.”
아이들 이름의 끝 자를 모으니 ‘혁명전’이라는 말이 된다. 하나 더 낳았으면 분명 최사라 불렀을 것이다. 그래야 북한이 키워내고 있는 ‘혁명전사’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최철 대좌의 아내와 세 아이가 일제히 허리를 꺾는다. 주변엔 구경하는 이들이 꽤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