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2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수는 바닷바람을 실컷 쐰 후 호텔로 돌아갔다.
연희는 샤워를 마치고 TV를 보고 있다.
한국의 가요 프로그램인데 포르투갈어 자막이 달려 있다.
“한류가 여기까지……?”
TV 옆 팸플릿을 보니 채널과 상영 시간표가 있다. 음악 방송뿐만 아니라 한국 드라마도 방영된다고 되어 있다.
“피곤하죠? 이쪽으로 와요”
현수가 소파에 앉자 연희는 등받이 위에 걸터앉는다. 그리곤 현수의 승모근 부위를 안마하기 시작한다.
“여기가 뭉치면 피곤한 거래요.”
“그래? 시원하네. 피곤한 거였나?”
현수는 짐짓 연희의 나긋나긋한 손길을 즐긴다.
“그런 자기는 안 피곤해?”
“아깐 조금 그랬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뜨거운 물속에 좀 들어갔다 나오니 풀렸나 봐요.”
“그래? 다행이네. 이제 그만하고 내려와. 난 괜찮으니까.”
“치이! 시로요. 또 나 괴롭히려고 그러는 거죠? 히잉! 그러지 마요. 나, 자기 때문에 힘들어서 죽는단 말예요.”
“알았어. 안 그럴게. 내려와. 자기 안아주고 싶어서 그래.”
“그러다 또 나 괴롭히면 알죠?”
“응, 약속.”
소파에서 내려온 연희를 보듬어 안은 현수는 잠시 TV에 시선을 주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세계 곳곳의 뉴스를 전하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마침 화면엔 불법 조업을 하는 지나 어선과 한국 해경의 모습이 보인다. 단속하는 해경에게 뾰족하거나 날카로운 것으로 반항하는 모습이 촬영되었다.
‘이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야?’
지난 2월 24일에 충남 태안 격렬비열도 인근에서 불법 조업하던 지나 어선 226척을 침몰시킨 바 있다.
NLL 인근 해역에선 318척을 침몰시켰다.
3월 7일엔 마라도 남서쪽 해역에서 불법 조업하던 지나 어선 712척을 수장시켰고, 신안군 가거도 해역에서 싹쓸이 조업을 하던 438척 또한 빠뜨려 버렸다.
1,694척이나 침몰되었으면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아직도 불법 조업을 하며 이를 단속하는 한국 해경에게 극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이런 양심도 없는 것들이……!’
현수는 속에서 치미는 노화를 억지로 눌렀다. 사랑하는 아내 연희가 품속에 안겨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곁에 있을까, 아님 내 방으로 갈까?”
“으음! 오늘은 자기 방에서 자요.”
지금은 순한 양처럼 부드럽다. 따라서 같이 잠들고 싶지만 언제 현수가 짐승으로 돌변할지 몰라 한 말이다.
“그래, 그럼 난 내 방으로 갈게. 편히 쉬어.”
“네, 자기도요.”
현수는 문을 열고 나와 자신의 객실로 향하지 않았다. 혹시 있을지 모를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다.
하여 올 때처럼 블링크로 이동했다.
자신의 객실에 당도했음을 확인한 현수는 마나에 의지를 실어 보냈다.
“아리아니, 내게로 올래?”
부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리아니가 나타난다.
“부르셨어요, 주인님?”
“응. 어디 가 있었어?”
아리아니는 리우데자네이루에 당도한 이후 현수의 곁을 떠나 있었다. 모처럼 만난 울창한 정글이 신 나서 시찰하러 간 것이다.
“여긴 숲이 울창해서 좋아요, 주인님.”
“그래, 좋은 곳이지. 북쪽으로 가면 더 좋은 곳도 있어.”
아마존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
“그나저나 실라디아 좀 불러줄래?”
“네, 잠시만요. 실라디아, 나와!”
프리링―!
아리아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라디아가 현신한다.
“부르셨사옵니까, 마스터?”
공손히 고개 숙여 예를 갖추니 못 볼 것이 보인다.
‘정령더러 옷을 입으라고 할 수도 없고. 쩝!’
현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방금 본 것을 잊기 위함이다.
“실라디아! 여기 이 지도 보이지?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미리 꺼내놓은 지도의 한 부분을 짚자 실라디아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마스터의 나라 한국의 바다네요.”
“이 바다에 가면 불법 조업하는 지나 어선들이 있을 거야. 이렇게 생긴 거.”
현수는 불법 조업하는 지나 어선들이 찍힌 사진을 모니터에 띄웠다.
“알아요, 이런 배. 상당히 많아요.”
“그래, 지금 가서 어디에 이런 배들이 있는지 살펴봐 줘. 내가 그쪽으로 텔레포트해야 하니까 좌표도 알아오고.”
“네, 마스터의 명을 받자옵니다. 그럼 저는…….”
실라디아가 사라지자 현수가 아리아니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리아니, 여기 숲 속엔 쓸 만한 거 없어?”
“바이롯 같은 건 없어요. 대신 다른 것들이 있죠.”
“다른 거? 어떤 거?”
“사하라 사막에 사는 종이 이곳에 있었어요.”
아리아니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막에서 사는 생물이 정글에 있으니 어찌 이상하지 않겠는가!
“뭔데?”
“벌거숭이 두더지[Naked mole rats]요.”
“벌거숭이 두더지? 아, 그거?”
언젠가 읽은 학술 서적에 이 녀석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같은 무게의 포유류가 2년을 산다면 이 녀석들은 30년을 산다. 장수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항암 능력을 가지고 있어 암에 걸리지 않는 유일한 포유류이다. 아직 규명해 내지 못한 항암 매커니즘을 가진 생명체이기도 한 것이다.
항암은 물론이고 장수에 대한 열쇠를 품고 있다 하여 본격적인 연구 대상이 된 녀석들이다.
“잘 있지?”
“네, 잘들 있지요. 땅속에서 살기에 천적으로부터 안전하니까요.”
“걔들은 그냥 놔둬.”
현수는 잠시 아리아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룸서비스를 불러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이 방에 머물고 있었음을 증언해 줄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씰(Seal)!”
어느 누구도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없도록 밀봉 마법을 구현하곤 검은색 로브로 갈아입었다.
‘아직 멀었나?’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라디아는 뜻이 있는 곳에 현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지구의 어느 곳이든 불과 1∼2분이면 당도할 수 있다.
물리적인 형체를 가진 게 아니므로 어느 곳으로든 이동이 가능하다. 물속이나 땅속에도 머물 수는 있지만 갑갑해서 싫어할 뿐이다.
왠지 늦는다 싶어 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실라디아가이 나타난다.
“조금 늦었사옵니다, 마스터.”
“그래, 조금 늦었네. 왜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린 거야?”
“말씀하신 배들이 여러 곳에 있어서 그랬사옵니다. 종이라는 것을 꺼내놓으시지요.”
“그래.”
종이를 꺼내놓자 그 위에 글씨를 쓴다. 펜으로 쓰는 게 아니라 바람의 칼날이 구멍을 뚫는 것이다.
873KDG643QSA ― POG44589Z12V ― 65BRH154EUY3
619SPE143NBL ― KGW15784B96Y ― 23ZZG312RRJ8
331TYI411VCK ― HPT98023W33A ― 44BGP865BCR7
……
419SKS557TPW ― GIR68710R77P ― 74IIW887KKT9
“뭐야? 뭐가 이렇게 많아?”
실라디아가 확인해 온 좌표는 열네 곳이나 된다.
“여기저기 많이 흩어져 있사옵니다.”
“이 밤중에? 아, 지금 거긴 밤이 아니겠구나.”
리우데자네이루와 황해는 14시간의 시차가 있다. 지금 이곳의 시간은 오후 10시 정도 된다.
그렇다면 황해는 현재 오전 8시쯤 된다는 뜻이다.
“위에 있는 것부터 배가 많이 있는 것이옵니다, 마스터.”
“그래? 얼마나 있는데?”
“맨 위에 있는 것은 1,137척, 다음은 1,022척, 그다음은 689척이고, 665척, 612척, 608척, 596척, 588척, 575척, 570척, 561척, 559척, 548척, 449척이옵니다.”
실라디아는 기억력이 좋은 듯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숫자를 이야기한다.
“근데 뭐가 이렇게 많아?”
“1,000척이 넘는 것은 마스터의 나라에서 동해라 부르는 곳에 있사옵니다.”
“지나 어선이 동해까지 갔다고?”
“네, 그곳에서 쌍끌이 어망으로 오징어를 씨를 말리고 있었사옵니다. 황해 쪽은 치어는 물론이고 어구까지 싹쓸이하는 중이옵니다.”
“이런 개 같은……! 아리아니, 아공간에 들어가서 전처럼 컨테이너 좀 열어놔.”
“네, 주인님. 근데 하나당 500명씩만 넣으세요.”
“알았어. 동해부터 가보자. 텔레포트!”
샤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스르르 사라진다.
다음 순간 현수는 울릉도에서 멀지 않은 바다 위에 나타났다. 밤이라 착각하여 걸친 검은색 로브가 해풍에 휘날린다.
“실라디아, 바람은 잦게 하고.”
“네, 마스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겨울의 삭풍처럼 불어오던 바람이 멈춘다. 시선을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지나 어선이 늘어져 있다. 이곳이 동해인지 지나의 앞바다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퍼펙트 트랜드페어런시! 플라이!”
두 개의 마법을 구현시킨 현수는 지나 어선 근처로 다가갔다. 당연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씽크(Sink)! 씽크! 씽크! 씽크!”
가장 외곽에 있던 어선부터 침몰하기 시작한다.
마치 바다 괴물이 강력한 힘으로 잡아당기는 것같이 단숨에 수면 아래로 빨려든다.
“어어! 배가 왜 이래?”
“아악! 침몰한다! 탈출하라! 탈출하라!”
“으아악! 왜, 왜 이러는 거야? 아악!”
텀벙! 첨벙! 첨벙!
“어푸! 어푸! 꼬르륵! 어푸! 어푸!”
아무런 조짐도 없다가 갑자기 배가 침몰하자 선상에 있던 자들은 황급히 바다로 뛰어든다.
그런데 몇 번 허우적거리기도 전에 사라진다.
“입고! 입고! 입고!”
현수는 계속해서 배들을 침몰시키면서 바다에 뛰어든 어부들을 아공간에 담았다. 워낙 어선 수가 많았기에 컨테이너 수용 인원 1,500명이 금방 채워진다.
현수는 어선이 너무나 많음을 느낀다.
“아리아니, 엘리디아도 불러줘.”
“네, 주인님. 엘리디아, 현신해. 주인님께서 부르셔.”
추와아아악―!
바닷물을 헤치고 투명한 용이 튀어나온다. 물의 최상급 정령 엘리디아이다.
“마스터를 뵙사옵니다.”
“그래, 엘리디아, 저기 저 어선들 보이지?”
“네, 그러하옵니다.”
“지금부터 실라디아와 힘을 합쳐 모조리 침몰시켜.”
“모조리 말씀이시옵니까?”
마스터의 명령이니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 모조리 침몰시켜.”
“알겠사옵니다. 명대로 하겠사옵니다.”
“난 잠시 자리를 비울 테니 일 끝나면 여기서 대기해.”
“알겠사옵니다.”
실라디아가 바람을 일으키자 잔잔하던 바다는 금방 폭풍우에 휘말린 것처럼 들썩이기 시작한다.
점점 파도가 높아지는가 싶더니 모든 어선이 삼각파도에 휩싸인다.
“아악! 이건 뭐야? 왜 이래? 이게 대체 뭐야?”
“폭풍우다! 폭풍우야! 아앗! 침몰하겠다!”
“어, 어서 구조 신호 보내! 어서!”
놀란 어부들이 황급히 구조 신호를 보내는 한편 침몰에 대비할 때 엘리디아의 투명한 동체가 파도와 같은 색깔로 변한다. 그리곤 곧장 수많은 배를 휘감기 시작한다.
그것은 곧 침몰을 의미한다.
구조 신호는 보냈다. 하지만 이곳까지 도움의 손길을 베풀러 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같은 순간, 현수는 연옥도에 당도해 있다.
쏘이기만 하면 비명도 지를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고통을 선사하는 타란툴라 호크가 우글거리는 곳이다.
“아공간 오픈! 출고!”
컨테이너 세 개가 바닥에 놓이고 문이 열리자 1,500명의 불법 조업 어부가 튀어나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과연 시끄럽기 이를 데 없는 족속이다.
“모두 이곳을 보라!”
현수의 위엄 넘치는 음성에 고개를 든 자들은 눈을 비빈다. 사람이 허공에 떠 있으니 놀란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매뉴얼에 따라 모든 의복을 벗겼다. 모아놓으니 되놈 아니랄까 봐 지독한 악취가 풍긴다.
“입고!”
이것들을 아공간에 넣은 현수는 설명 없이 동해로 텔레포트했다. 다음 순간 기다렸던 타란툴라 호크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