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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1087화 (1,086/1,307)

# 1087

승준은 나윤을 떠올리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짓는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어쩌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새집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연히 웃음이 나온다.

현수는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실실 쪼개는 정승준을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택으로 돌아온 현수는 시원한 물에 샤워를 했다.

엘리디아를 부르면 2초면 끝날 일이지만 이렇게 직접 씻는 게 더 개운해서이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는데 시장에 간 연희가 들어선다.

“어머! 언제 들어왔어요?”

“응! 쇼핑 잘했어?”

“네! 오늘은 해산물이 싱싱했어요.”

싱긋 미소 짓는 연희의 모습은 방금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다. 본바탕도 예쁘지만 그보다는 선한 심성이 우러나와 이렇게 보이는 것이다.

“샤워할 거야?”

“네, 그래야 할 거 같아요.”

연희는 오가며 비포장도로를 달렸기에 먼지가 묻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얼른 씻어.”

“기대해요. 샤워 마치고 나와서 아주 맛있는 해물탕 끓여줄 테니까요.”

“그래? 기대되네.”

현수는 슬쩍 연희의 뒷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신다.

임신 중이라며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니 화중지병(畵中之餠)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쩝!”

일찌감치 저녁을 먹곤 저택 뒤편 호수로 향했다. 엘리디아가 솜씨를 부려 그런지 아주 맑은 물로 변해 있다.

둘은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며 호수 주변을 산책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다시 저택으로 돌아온 현수는 피터스 가가바를 불렀다.

그리곤 조만간 도착하게 될 무스크하코 사람들이 머물 곳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

저택 뒤쪽에 거대한 농장이 조성되는 것도 놀랍지만 러시아에서 800가구의 4,000여 명이 온다는 말은 더 놀라웠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은 곳으로 마을 전체가 이동하는 일이 어디 흔한 일인가!

피터스 가가바는 열심히 메모했다.

러시아 사람들이니 이곳 사람들이 쓰는 프랑스어나 콩고어를 모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생활하게 하려면 준비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집만 지어주어서 될 일이 아니다.

당장은 식료품을 구매할 수 있는 상점만 있으면 되지만 프랑스어나 콩고어를 배울 수 있는 학교도 있어야 한다.

당분간은 통역도 필요하기에 난감한 표정이다. 러시아어를 아는 콩고민주공화국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래도 온다니 준비를 해야겠기에 부지런히 메모하는 한편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한참을 이야기했음에도 아직 잠들 시간이 아니다. 현수는 연희의 방을 찾았다가 이내 문을 닫고 돌아 나왔다.

연희는 샤워를 마친 뒤 엷은 침의만 걸치고 있는데 안에 들어가면 사고를 칠 것 같아서이다.

서재에 앉아 이런저런 뉴스를 검색했다. 그리고 시각을 확인해 보니 11시 50분쯤 되었다.

문득 차원이동한 지 꽤 되었다는 생각에 날짜를 따져보았다.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에 있다가 지구로 차원이동한 날짜는 4월 14일이다. 그리고 오늘은 5월 13일이다.

딱 30일이 되었다.

“헉! 하마터면…….”

저쪽에서 이쪽으로 차원이동을 하고 30일 이내에 되돌아가면 저쪽의 시간은 멈춘 상태가 된다.

지구에서 아르센으로, 아르센에서 지구로 이동할 때 모두 적용되는 법칙이다.

만일 30일이 지나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면 저쪽 역시 30일이 지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마법 스승인 멀린이 남긴 이실리프 마법서에 쓰여 있는 내용이다.

현수는 한 번도 이 날짜를 넘기지 않았기에 실제 그런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호기심 때문에라도 모험을 해볼 수는 있지만 그래선 안 된다. 저쪽에 아주 중요한 일이 준비되는 중이기 때문이다.

스승인 멀린의 유해를 영원한 안식처에 안장하는 일이 그것이다. 아드리안 왕국 입장에선 시조 왕의 장례식이다.

그러니 얼마나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겠는가!

그런데 멀린의 시신을 가진 현수가 한 달쯤 지난 후에 나타나면 어찌 되겠는가!

왕국을 상대로 무례를 범한 것이 되어 마탑주의 체면이 확 깎일 것이다. 따라서 모험할 타이밍은 아니다.

얼른 시계를 보니 12시 3분 전이다.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날짜가 바뀐다.

그럼 30일이 초과되기에 마음이 급해진 현수는 서둘러 차원이동을 실시했다.

“마나여, 나를 아르센……!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르릉―!

지구로 온 지 딱 30일 만에 현수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진다. 차원이동 마법이 재현된 것이다.

* * *

“오늘이 며칠이지?”

지구 시간으로 지난 4월 14일에 차원이동한 곳은 이곳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의 ‘세상의 중심’이다.

마탑주 집무실인 이곳은 현수의 허락이 있기 전까진 어느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물론 예외는 있다.

바깥에서 세 번 노크하며 ‘마탑주님, 보고 사항 있습니다’, 또는 ‘마탑주님, 들어가도 되나요?’를 열 차례 이상 반복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열어볼 수는 있다.

문만 열면 내부가 훤히 보이므로 마탑주가 있는지의 여부는 한눈에 알 수 있다.

있다면 당연히 허락을 받고 드나들 수 있다.

하지만 마탑주가 보이지 않으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이는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의 안주인인 여섯 여인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중심’은 오로지 마탑주만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현수는 침대 곁에 있는 파란색 밧줄을 잡아당겼다.

딸랑―!

부드러운 종소리가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에 이어 조심스런 음성이 들린다.

똑, 똑, 똑―!

“마샤가 마탑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사옵니다. 소녀, 안으로 들어가도 되올는지요?”

현수는 머릿장 쪽에 늘어져 있는 여섯 개의 밧줄을 보았다. 하양,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보라색이다.

파란색은 마샤를 부를 때 쓰는 모양이다.

“…들어와!”

“하오면 들어가옵니다.”

스르르르릉―!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하늘하늘한 침의를 걸친 마샤가 걸어 들어온다.

사박, 사박, 사박―!

마샤는 연한 분홍색 실내화를 신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걸을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난다.

조심스레 들어선 마샤는 현수로부터 서너 발짝 떨어진 곳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공손히 고개를 조아린다.

“소녀 마샤, 마탑주님을 뫼시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비록 변변하지 못한 몸이오나 마탑주님의 기쁨을 위해 기꺼이 열겠사오니 소녀를 취하시옵소서.”

말을 해놓고 보니 심히 부끄러운 듯 마샤의 목덜미가 붉어진다. 숙이고 있는 얼굴 또한 붉을 것이다.

‘헐! 이게 무슨……? 아! 맞아. 끄응!’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냈다.

일전에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의 율법서를 읽어본 바 있다.

어떤 것이 율법으로 기록되어 있는지 살펴보고 불합리한 내용이 있으면 수정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읽은 내용 중엔 밤 시중을 들어줄 여인을 부를 때는 밧줄을 잡아당기면 된다는 내용도 있었다. 하나를 당기든 여섯 모두를 당기든 마탑주의 맘이다.

여인들은 밧줄을 당겨 종소리가 나면 하던 일이 있더라도 즉시 멈추고 ‘세상의 중심’으로 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생리 중일 때엔 밧줄을 당겨도 종소리가 나지 않도록 되어 있으니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가야 한다.

부름을 받아 갈 때엔 속이 훤히 비치는 침의 하나만 걸쳐야 한다. 날씨가 추워도 모든 속옷을 벗고 간다.

마탑주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함이다.

언제 부름을 받거나 선택받을지 모르므로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의 여인들은 늘 청결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는 여섯 여인뿐만 아니라 이들의 시중을 들어주는 시녀들도 마찬가지이다. 시녀도 승은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샤는 일과대로 하루에 두 번 있는 수욕을 마쳤다. 점심 식사 후와 저녁 식사 직후에 씻는 것이 율법이다.

물론 구석구석 신체의 모든 부위를 깨끗이 씻어야 한다.

언제 부름을 받을지 모르기에 향기로운 꽃잎을 띄운 물을 사용했다.

그리곤 자신의 처소에서 아르센 대륙사를 읽고 있었다.

무식하면 마탑주의 여인이 될 자격이 없기에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잊지 않으려 반복해서 읽는 중이다.

마샤는 화이트 후작의 딸이다.

자신보다 한 살 어린 나오미는 할렌 후작의 손녀지만 가문의 성세가 다르다.

할렌 후작가는 아드리안 공국에서 가장 큰 상단을 운영하기에 돈이 아주 많은 가문이다. 반면 화이트 후작가는 예전엔 잘나갔지만 조금씩 몰락해 가는 중이다.

너른 농토를 보유하고 있지만 매년 소출이 줄어들고 있다.

이는 매년 같은 작물을 같은 장소에 심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력이 다해 점점 소출이 줄어드는 것이다.

소피아와 아이리스는 공주이고, 아그네스와 이사벨을 실세 공작들의 손녀이다.

마샤는 가문도 기울고 나이도 제일 많기에 여섯 중 자신이 가장 처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종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부터 마샤의 심장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너무도 긴장되고 흥분되어서이다.

마탑주는 아직 헥사곤의 여인 중 어느 누구도 취하지 않았다. 이건 확실한 일이다.

그런데 오늘 자신이 마탑주의 밤 시중을 들게 되면 즉각 서열 1위가 된다.

국왕과 마탑주는 동격이다. 따라서 아드리안 왕국에선 제1왕비에 버금가는 위치가 되는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마탑주가 누구를 먼저 취하느냐에 따라 서열이 매겨지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떨리는 마음으로 와서 노크를 했고, 문을 열었으며, 긴장된 마음으로 자신을 취해주기를 청했다.

율법엔 마탑주에게 본인의 얼굴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지만 감히 시선을 마주칠 수 없어 고개를 숙인 것이다.

한편 현수는 난감했다.

첫째는 눈앞의 마샤 때문이다.

속이 훤히 비치는 침의를 걸치고 있기에 벗은 몸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와 심히 곤혹스럽다.

둘째는 수정하지 않은 율법 때문이다.

마탑주가 밧줄을 당겨 밤 시중을 청해놓고 이를 행하지 않으면 부름을 받은 여인은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를 떠나야 한다.

불러놓고도 취하지 않았다 함은 마탑주로부터 버림받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바로 가문의 몰락을 의미한다.

누구든 마탑주에 의해 헥사곤에서 방출되면 불경죄를 물어 여인이 속한 가문의 작위는 즉시 회수되며 전 재산은 국고에 귀속된다.

가문의 모든 구성원이 귀족에서 평민으로 주저앉는 것이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풍비박산 나고 패가망신하여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이다.

또한 쫓겨난 여인은 평생 독신으로 살게 된다.

아드리안 왕국의 어느 누가 마탑주로부터 버림받은 여인을 누가 취하겠는가!

자칫 본인에게도 화가 미칠 수 있기에 아무리 예뻐도 다가가는 사내가 없으니 평생 독신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귀족도 아닌 평민 여인이 아무런 재산도 없이 어찌 혼자 살 수 있겠는가! 정처 없이 유리걸식(流離乞食)하다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왕국에선 혹시라도 또 다른 귀족가가 피해 입는 것을 막기 위해 버림받은 여인의 손등에 낙인을 찍는다.

아르센 대륙어로 ‘ΏΨΓξ’로 표시된다. 이는 버림을 받았다는 뜻의 ‘기(棄)’ 자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의 율법서에 기록된 내용이 아니라 아드리안 왕국의 왕국법이다.

그런데 현수는 왕국법을 모른다. 따라서 마샤의 가문이 박살 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난감해하는 이유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마샤의 속내를 짐작하기 때문이다.

‘끄응! 내가 왜 그건 안 고친 거지? 제기랄!’

밤 시중을 들라 청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손대지 않은 항목이 발목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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