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8
마탑주로서 율법서를 검토했고, 수정할 것은 수정했다고 이야기를 끝낸 후이다. 수정 이후의 율법은 본인도 준수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기에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도 확인할 것은 확인해야 한다.
“마샤, 오늘이 며칠이지?”
“네? 아, 네. 오늘은 2월 16일이옵니다, 마탑주님.”
“그래? 다행이군.”
“네?”
무슨 의도냐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는데 애처롭기 이를 데 없다. 배고픈 강아지가 주인의 손에 들린 먹음직한 고깃덩이를 볼 때 이런 표정을 짓지 않을까 싶다. 아기 고양이가 빤히 바라보는 모습과도 닮았다.
“지금 시각은?”
“지, 지금은 밤이 깊었사옵니다, 주, 주인님.”
마샤는 부끄러운 듯 얼른 고개를 숙인다.
마탑주라는 호칭에서 주인님이라는 호칭으로 바뀐 것은 오늘 밤만 지나면 자신의 몸과 마음 모두를 가져갈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혼의 지배자가 될 것이기에 이런 표현을 쓴 것이다.
“……!”
현수가 아무런 대꾸 없이 입을 다물고 있자 마샤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현수를 바라본다.
“주, 주인님, 소, 소녀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지요?”
가문과 본인의 명운이 걸린 질문인지라 몹시 떨리는 음성이다. 현수의 대답 여하에 따라 천국, 또는 지옥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그렇기에 긴장된 표정으로 빤히 바라본다.
선택을 받으면 가문은 영광이고 본인은 행복이 보장된다. 아니라면 그야말로 끝이다.
천 길쯤 되는 벼랑 끝에 선 기분으로 현수를 바라보는 마샤의 눈빛엔 조마조마함이 어려 있다.
“배고프지 않아? 뭣 좀 먹을까?”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인지 마샤는 깜짝 놀란다.
“네?”
“나는 배가 조금 고파. 그러니 뭣 좀 먹자. 잠시만.”
말을 마친 현수는 아공간에서 식재료와 조리도구들을 꺼내 말없이 조리를 시작한다.
현수가 만들려는 것은 프라이드치킨이다.
순식간에 튀김옷을 만들어 숙성시킨 후 조각낸 신선한 닭고기에 입힌다. 타임 패스트 마법이 쓰였다.
그리곤 곧바로 설설 끓는 기름에 넣고 튀겨냈다.
당연히 냄새가 끝내준다.
곁에서 보고만 있던 마샤는 저도 모르게 고이는 침을 삼키곤 어찌 만드는지를 유심히 살펴본다.
생전 처음 보는 것이지만 잘 익혀서 나중에 마탑주를 위한 밤참으로 만들려는 의도이다.
이런 걸 보면 현숙한 아내 역할은 아주 잘할 여인이다.
현수가 프라이드치킨을 선택한 이유는 목이 타서이다.
마샤를 어찌해야 할지 실로 난감할 때 문득 시원한 맥주 한잔이 생각났던 것이다.
아무튼 치킨은 기막힌 냄새를 풍기며 만들어졌다.
현수는 아공간의 식기와 포크를 꺼내 이것을 담아내고 시원하게 냉장 보관된 캔 맥주를 꺼냈다.
딱―! 치익!
돌돌돌돌―!
두 개의 유리잔에 노란 맥주가 담기며 흰 거품이 위를 덮는다. 마샤는 ‘대체 이게 뭔가?’ 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다.
왕궁 시녀장으로부터 술 마시는 법을 배우긴 했지만 맥주는 마셔본 적이 없다.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들이켠 현수는 마샤를 불러 마주 앉게 하였다.
“캬아! 마샤도 마셔봐. 맛이 괜찮을 거야. 이렇게!”
현수는 두 개의 포크로 치킨 먹는 법을 시범 보였다. 입에 넣고 씹어보니 맛이 환상적이다.
그러고 보니 저녁 식사를 걸렀다.
마타디항 컨테이너 야드에서 가와시마 야메히토에게 금괴를 건네고, 정승준을 만나 브리핑을 받았다.
그리곤 곧장 저택으로 돌아와 피터스 가가바와 무스크하코에서 올 사람들의 주거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연희랑 같이 있으면서 쉐리엔 주스 한 잔을 마신 게 점심 이후의 전부이다.
연희는 쉐리엔이 있음에도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저녁을 건너뛰는 습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임신을 했으니 그러지 말라고 했더니 저녁을 일찍 먹었으니 되었다 하여 졸지에 굶은 것이다.
마샤는 현수의 눈치를 보며 치킨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르센 대륙에선 맛볼 수 없는 진미였기에 점점 먹는 속도가 빨라진다. 혹여 누가 빼앗아 먹을까 싶어 허겁지겁 먹는다.
그러면서 간간이 맥주를 마신다. 드디어 아르센 대륙에도 치맥이 상륙한 것이다. 현수는 마샤의 잔이 빌 때마다 채워주었다. 그렇게 하여 마샤가 비운 건 캔 맥주 세 개이다.
치킨을 거의 다 먹었을 때 마샤는 당연히 취했다.
어느새 내려앉은 마샤는 소파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배는 부르고 취기 때문에 약간은 몽롱한 상태이다.
이쯤 되면 겁이란 걸 상실하게 마련이다.
“휴우∼!”
긴 한숨을 몰아쉰 마샤는 고개를 들어 현수를 바라본다. 다소 도발적인 눈빛이다.
“주인님!”
“왜?”
“오늘 저 안아주실 거죠?”
“…글쎄? 그래야 하나?”
“안 그럼 저 죽어버릴 거예요.”
“……!”
엄청 과격한 말이다. 그런데 농담 같지 않다.
조금 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샤는 헥사곤으로 보내질 때 부친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마샤야, 마탑주님을 뵙게 되거든 부디 마음을 사로잡도록 노력하거라. 그래야 우리 가문이 예전의 성세를 되찾을 수 있단다. 부탁하마. 알았지?”
화이트 후작가는 요즘 이웃의 백작가로부터 은근히 견제를 당하는 중이다. 소출이 점점 줄어들어 기사단 유지가 어려워지면서부터이다.
은퇴 기사가 발생되면 젊은 기사로 채워 넣어야 전력이 유지되는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현재의 기사단은 노령화되어 있다.
팔팔한 20대는 눈을 씻고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고, 40대 늙다리들만 즐비하다. 다들 아직은 근력이 있다고 큰소리치지만 실제 전투가 벌어지면 어떨지는 미지수이다.
화이트 후작가가 보유한 기사의 숫자는 현재 38명이다. 이 중 11명은 올해가 지나면 은퇴한다.
기사 정년인 나이 50이 되기 때문이다.
보충 인력이 없다면 내년은 27명으로 줄어든다. 원래 50명이었으니 거의 절반으로 쪼그라드는 것이다.
내후년이 되면 더 줄어서 22명이 된다.
그런데 이웃 백작가의 영지엔 40명의 젊고 팔팔한 기사로 채워진 기사단이 건재할 것이다.
아직은 거의 비등한 숫자지만 내년이나 내후년에 영지전이 선포되면 영지를 빼앗길 확률이 매우 높다.
40대 후반 27명과 20대 중반 40명의 전투는 균형을 유지할 수 없다. 한 해가 더 지나면 40대 후반 22명과 20대 중반 40명의 대결로 더 불리해진다.
저울추가 한쪽으로 기우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이웃 백작가의 일방적인 승리가 예상된다.
그렇기에 화이트 후작은 헥사곤으로 들어가게 된 딸에게 간곡하게 부탁한 것이다.
“주인님, 오늘 밤 저를 가져주시면 안 돼요?”
“……!”
지구에서도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다. 김정은이 선물로 준 하얀 눈꽃 백설화도 같은 말을 했다.
현수가 품어주지 않으면 가족 전체가 교화소나 수용소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꼼수를 부려 그리고리 로그비노프 북핵담당특임대사의 양녀가 되도록 하여 위기를 넘겼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마음 약한 현수는 백설화를 안아주었을 것이다. 눈치를 보아하니 마샤도 그런 듯하다.
하지만 품을 수는 없다. 이미 다섯이나 거두었는데 추가한다는 건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마샤, 술이 조금 취한 것 같은데, 일단 의자에 앉아봐.”
위에서 내려다보니 가슴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속이 비치는 망사의인지라 소파에 앉아도 마찬가지이긴 해도 왠지 껄끄러워 일어나 앉으라 한 것이다.
“네, 주인님.”
자리에서 일어난 마샤는 소파에 앉으려다 휘청거린다. 취기가 올라 몸에 균형을 잃은 모양이다.
“어머낫!”
“이런……!”
현수는 탁자 위로 쓰러지려는 마샤의 교구를 받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러면 엉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컹―!
두 손으로 몸을 받쳐줬는데 하필이면 왼손이 손대선 안 될 곳에 닿은 듯하다. 하지만 모르는 척했다.
“그렇게 많이 취한 거야? 자, 앉아.”
“네에, 죄송해요.”
마샤를 얼른 귀밑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숙인다. 몹시 고혹적인 모습인지라 현수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7장 저를 안아주셔요
‘이게 다 임신 때문이야.’
지현과 연희가 함께 있어도 그림의 떡인 듯 바라만 보아야 하던 지난 며칠 동안 독수공방한 부작용인 듯싶다.
한편 자리에 앉은 마샤는 조금 전 현수의 손이 닿은 부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빤히 바라본다. 술에 취해 겁은 상실했지만 촉감마저 마비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 주인님의 손길이 여기에 닿았어.’
마샤의 눈빛이 점차 몽롱해진다. 자신이 마탑주의 제1부인이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때문이다.
“마샤, 맛은 괜찮았어?”
“네? 아, 네. 그, 그럼요. 생전 처음 맛보는 진미였어요.”
“그래? 다행이네. 그럼 뭐 하나 물어봐도 되지?”
“네, 그럼요. 무엇이든 말씀만 하셔요.”
무엇을 물으려 하는지 몰라도 자신은 성실히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기에 흐트러진 정신을 다잡으려 고개를 흔든다. 그런데 이 모습도 매우 예쁘다.
마치 전성기의 제시카 알바가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부끄럽다는 듯 바라보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내가 저 밧줄을 잡아당겨서 마샤가 여기에 온 거지?”
“…네에.”
파란색 밧줄에 시선을 준 마샤는 심히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 거야?”
말 떨어지기 무섭게 마샤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오늘 밤 소녀의 모든 것을 바쳐 마탑주님을 즐겁게 해드려야 하는 거라고 알고 있어요. 원하시는 무엇이든 기꺼이 봉사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말씀만 하셔요.”
마샤의 목소리가 떨린다. 첫날밤이 얼마나 아픈지에 대한 교육을 받은 바 있기 때문에 두려운 때문이다.
“그래? 그런데 마샤는 올해 나이가 얼마나 되지?”
“스물하나이옵니다.”
아르센 대륙도 미국처럼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나이를 헤아린다. 따라서 한국식으로 치면 마샤는 생일이 언제냐에 따라 22세일 수도 있고 23세일 수도 있다.
“스물하나? 좋은 나이네.”
현수의 말은 헛말이 아니다.
마샤는 과일이나 채소에 비유하면 아주 싱싱한 상태이다. 벌레 먹은 부분도 없고, 시든 곳도 없다.
하긴 아직 어린데다 모든 것이 풍족한 헥사곤에 있으니 잘 먹고, 잘 쉬고, 잘 잤을 것이다.
언제 마탑주의 부름을 받나 싶어 조마조마하던 것만 빼면 몸도 마음도 더없이 편했으니 싱싱한 것이 당연하다.
“마탑주님께 바치려 늘 청결을 유지하려 애썼사옵니다.”
“그래, 그랬겠지.”
마샤의 말은 사실이다. 언제 부름을 받을지 모르기에 늘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려 애썼다.
언제든 밧줄을 당겨져 본인 처소에 있는 종이 소리를 내기만 하면 곧장 세상의 중심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탑주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는 것도 율법에선 불경으로 다스린다 되어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마샤.”
“네, 말씀하시옵소서.”
“오늘 난 너를 품어줄 수 없어.”
“네에?”
마샤는 ‘벗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천천히 벗을까, 아니면 얼른 벗고 모든 걸 보여드릴까? 부끄러운데 어쩌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의표를 찔렸다.
“너를 품어줄 수 없다 했어.”
“……!”
마샤의 두 눈에 금방 습기가 차오른다. 그리곤 곧장 커다란 이슬을 만들어 볼 위로 밀어낸다.
두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린다.
갸름한 턱 선을 지난 눈물방울이 제법 풍만한 가슴 위로 떨어졌지만 마샤는 미동도 않고 현수를 바라본다.
그런데 시선에 초점이 잡혀 있지 않다.
화이트 후작가는 이제 끝이다. 아울러 본인은 낙인찍힌 채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