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0
“나야!”
“어머! 자기, 자기 온 거예요?”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던 카이로시아는 발딱 일어나더니 곧장 달려든다.
와다다다! 와락―!
“어이쿠!”
달려든 카이로시아를 받아 안으니 살짝 눈을 흘긴다.
“자기야, 왜 이제 왔어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미안, 미안. 내가 여러 일로 좀 바빴어.”
“치! 설마 다른 여자들 만나느라……. 어머! 아니에요.”
카이로시아는 자칫 투기하는 모습으로 비춰질까 두렵다는 듯 얼른 말을 끊는다.
모처럼 온 사랑하는 임이다. 심기를 건드려 좋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게다가 본인은 마탑주의 첫째 부인이 된다.
아우가 될 나머지 부인들을 거느려야 하는 입장이다.
둘째는 그렇다 쳐도 셋째는 성녀이고, 넷째는 드래곤의 제자, 다섯째는 드래곤의 딸이다.
어느 누구도 평범하지 않다.
이런 쟁쟁한 아우들을 잘 다스리며 권위를 지키고 가정의 평화까지 유지해야 할 책무가 있기에 늘 너그러워야 한다고 마음먹었지만 그만 말실수를 한 것이다.
얼른 현수의 품을 벗어난 카이로시아는 고개를 숙이며 풀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용서해 주세요.”
“…잘못한 건 아는 거야?”
“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이다.
“그럼 벌 받아야지.”
“……!”
카이로시아는 두렵다. 자기가 사랑한 남자는 이렇듯 냉정히 말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리 와.”
“으읍!”
갑작스레 잡아끌자 헝겊 인형처럼 힘없이 딸려간 카이로시아는 자신의 입술을 덮는 무엇인가를 느낌과 동시에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바르르 떨린다.
고대하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설왕설래가 시작되자 카이로시아는 전신의 맥이 탁 풀리는 듯 늘어진다.
어찌 내버려 두겠는가!
현수는 카이로시아의 교구를 바짝 끌어안았다.
“…이게 벌이야.”
“아아! 사랑해요. 너무 보고 싶어서……. 이젠 어디 가지 마요. 네? 늘 제 곁에 있어줘요. 자기야가 없으니까 세상이 너무 허전해요.”
“알았어. 하지만 조금 더 기다려. 끝낼 일은 끝내야지.”
“알았어요. 근데 그동안 뭐 하셨어요?”
“나? 얘기하자면 긴데 괜찮겠어?”
“그럼요. 밤은 길잖아요.”
“그렇지. 밤은 길지. 그럼 이리로 좀 와. 아, 잠깐.”
말을 마친 현수는 얼른 아공간에서 푹신한 소파를 꺼냈다. 1인용이다. 카이로시아의 눈이 당연히 커진다.
“어머! 이건……. 이런 거 또 있으면 제게…….”
“알았어. 이런 건 나중에 많이 줄게.”
카이로시아는 장사꾼 딸 아니랄까 봐 새로운 물건만 보면 환장하는 경향이 있다. 부친이 공작이 되었음에도 이러한다. 곧 왕비가 될 터인데 심히 걱정된다.
“자, 이리 와 앉아.”
“어머!”
현수는 로시아를 무릎에 앉혔다. 그리곤 교구를 끌어안았지만 몸을 빼지는 않는다.
현수는 카이로시아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둘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지난 12월 21일이다. 이곳 아르센력이다.
오늘은 2월 16일이니 꼬박 2개월 정도 시간이 흘렀다. 그간 일어난 일이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해적들을 제압한 뒤 로잘린을 구하고 그곳에 이실리프 왕국을 만들었다는 말에 깜짝 놀란다.
“어머! 정말요? 제가 정말 이실리프 왕국의 제1왕비가 되는 거예요? 정말요?”
에델만 백작가에서 태어났으니 귀족가의 여식이기는 하지만 단 한 번도 왕비와 같이 지고한 신분이 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홀로 늙어갈 확률이 매우 높으니 상단 일에나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하인스 백작을 만났고, 그대로 매료되어 버렸다.
백작부인이 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 여겼는데 알고 보니 이실리프 마탑주라고 한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때도 기절할 듯 놀랐다. 그런데 오늘은 더하다.
이번엔 왕비가 된다고 한다. 그것도 제1왕비의 자리에 봉해진다고 하니 또 놀란 것이다.
“그래, 로시아가 제1왕후야. 좋지?”
“자기야……!”
로시아는 말을 잇지 못한다. 물론 너무나 좋아서이다.
제1왕비가 되어서가 아니다. 현수가 마음 써주는 것이 너무도 고맙고 황송해서이다.
따지고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귀족가의 여식일 뿐이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 기준으로 따지면 혼기를 놓친 노처녀인지라 심히 장래가 걱정되는 중이다.
그런데 가장 높은 곳까지 올려주면서도 아무런 생색을 내지 않는다. 그저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자기야, 상 줄게요. 눈 감아봐요.”
“눈? 알았어.”
현수가 눈을 감자 카이로시아의 입술이 다가온다.
쪼옥―!
“으읍……!”
진한 입맞춤을 상으로 주려던 카이로시아는 입술뿐만 아니라 혀까지 빼앗겼다.
현수는 카리로시아의 교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설왕설래에 집중했다. 신체의 한 부분은 이미 통제를 벗어났다.
하지만 오늘은 활약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아직 카이로시아가 수퍼포션을 복용하지 않은 때문이다.
“자기,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죠?”
로시아는 손가락에서 한 번도 빼지 않은 반지를 보여준다.
언제고 품이 그리우면 보듬어주겠다고 약속할 때 준 것이다. 현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샤워는 하셨지요?”
“그럼. 조금 전에 했어.”
샤워는 지구에서 했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카이로시아는 현수의 팔베개를 하고 그간 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한다.
콱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어여쁜 여인이다.
현수는 몇 번의 입맞춤을 더 하곤 눈을 감았다. 잠이라도 자지 않으면 사고를 칠 것만 같아서이다.
‘얼른 수퍼포션을 만들어야겠군. 장인어른 만나 날짜도 잡고. 근데 따로따로 결혼식을 올리면 좀 번거롭지? 그래, 왕국 선포를 하는 그날 합동으로 하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나직한 숨소리가 들린다. 품속에 안겨 깊이 잠든 카이로시아가 내는 소리다.
현수는 부드러운 손길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 잠결에 간지러움을 느끼는지 몇 번이나 밀어냈지만 끝끝내 정리해 주었다.
“잘 자. 내 꿈꿔.”
쪽―!
잠든 로시아의 입술에 입맞춤을 해주곤 누웠다. 조금 잠들어볼 생각이다.
8장 경건한 안장식
짹, 짹, 짹―!
“하음! 어머!”
잠에서 깨어난 로시아는 거울을 보고 있는 현수를 보고는 발딱 일어난다. 늦잠을 잤다 생각한 모양이다.
“자기야, 미안해요. 어제 좀 피곤했나 봐요.”
“아니, 괜찮아. 늦잠 잔 것도 아닌데, 뭘.”
“근데 왜 그 옷을 입고 있어요?”
카이로시아는 현수가 걸치고 있는 휘황찬란한 예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이런 옷을 입고 갈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로니안 공작 일행은 지금 라수스 협곡 안에 있다. 이곳 테세린에 당도하려면 아직 멀었다. 따라서 현수가 의복을 정제할 아무런 일도 없으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다.
“로시아, 오늘은 내가 가볼 곳이 있어.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그러니 로시아는 밀린 서류들과 씨름해도 될 거야.”
“어디… 가세요?”
“응. 아드리안 왕국에 가봐야 해.”
“아! 그럼 다녀오세요. 저는 괜찮아요.”
로시아는 왜 가느냐고 묻지 않는다.
사내가 하려는 일을 꼬치꼬치 캐묻거나 일일이 간섭하는 것은 기품 있는 여인이 할 일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 거기 일만 마치면 로니안 공작님 모시고 이곳으로 올 거야. 그런 다음에 이실리프 왕국으로 가자.”
“……!”
카이로시아는 아무런 대꾸 없이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만 끄덕인다.
“왕국 선포하는 그날 결혼식을 올릴 거야. 내 제1왕비가 되어줄 거지?”
“치! 맨입으로요?”
“그런가? 그럼 안 되지. 자, 이거…….”
현수가 내민 것은 푸른 벨벳으로 싸여 있는 반지 함이다.
딸깍―!
뚜껑을 열자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반짝이고 있다. 적어도 10캐럿은 되는 것이다.
“이건 결혼해서 제1왕비가 되어달라는 뜻으로 주는 거야.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나하고 결혼해 줘. 그럴 거지?”
화려한 예복을 걸친 현수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정중히 반지 함을 내밀자 카이로시아는 얼른 받아 든다.
“네! 사랑받는 아내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고마워요. 청혼해 주셔서.”
“하하! 다행이네. 난 결혼 안 한다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치!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밤새 껴안고 잤으면서.”
카이로시아가 살짝 눈을 흘긴다.
현수 본인은 모르지만 밤새 카이로시아를 주물럭거렸다. 채워지지 않는 본능 때문이었다.
때문에 잠에서 깬 카이로시아는 밤새도록 고생했다. 달궈만 놓고 실전에 돌입하지 않은 현수 때문이다.
* * *
“어서 오십시오, 마탑주님!”
“네, 국왕전하!”
현수와 아민 멘데스 폰 아드리안 국왕은 서로에게 더없이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공식적인 자리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이 영원한 안식을 얻는 날이다. 이를 위해 왕국의 귀족들이 총집결하였다.
왕비와 왕자, 그리고 공주들도 모두 참석해 있다.
이곳은 헥사온 오브 이실리프의 후원이던 자리에 마련된 묘소이다. 공식 명칭은 ‘이실리프가 정지된 곳’이다.
이실리프란 아르센 대륙어로 ‘위대한 마법사의 생애’라는 뜻이다. 따라서 위대한 마법사의 생애가 멈춘 곳이라는 표현이다.
이곳은 드나들 수 있는 별도의 문이 있는데 출입구의 위에는 아르센 대륙어로 다음과 같이 양각되어 있다.
The master of whole wizards and absolutely great man Merlin Adrian van Nigel’s eternal rest.
Without exception, Be quiet and be reverent!
세상 모든 마법사의 정점이며, 누구보다도 위대했던 거인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의 영원한 안식처.
예외 없이 조용하고 경건하라!
매년 오늘을 기념하여 이곳에선 국왕이 집전하는 예식이 치러질 것이다. 아드리안 왕국의 2월 18일은 ‘위대한 시조의 날[The day of great progenitor]’이다.
노예와 농노까지 하루를 쉬며 시조를 기리는 날이다.
모든 분쟁 또한 정지되어야 한다. 영지전 중이라도 이날만큼은 검을 놓아야 한다.
만일 이날에도 시조를 기리지 않고 전쟁을 계속한다면 이웃 영지 전부가 나서서 징치하도록 법이 제정되었다.
현수는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같이 예복 차림인 것을 보면 모두가 귀족이다.
변방의 작은 영지의 영주들까지 모두 모인 것은 개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덕분에 아드리안 왕국의 수도 멀린은 몸살을 앓는 중이다.
모든 숙박 시설은 100% 채워졌고, 식당마다 손님들로 넘쳐난다. 남작과 자작도 귀족이건만 요즘엔 거의 평민 취급을 받는다. 즐비한 백작, 후작, 공작들 때문이다.
현수와 국왕이 정중히 예를 갖추자 기다렸다는 왕실 시종장이 예식용 스태프로 바닥을 두드린다.
쿵, 쿵, 쿵―!
“지금부터 우리 아드리안 왕국의 시조이신 위대한 존재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 님의 안장식이 거행될 예정입니다. 모두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시길 바랍니다.”
쿵, 쿵―!
스태프가 바닥을 두 번 두드리자 일제히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갖춘다.
귀족은 물론이고 왕자와 공주, 그리고 왕비와 국왕까지도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하지만 딱 한 사람, 현수만은 아직 뻣뻣하게 서 있다. 상주이며 아공간에 담긴 멀린의 관을 꺼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