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091화 (1,090/1,307)

# 1091

“아공간 오픈!”

허공에 시커먼 구멍이 일렁이자 손을 넣는다.

“출고!”

말 끝나기가 무섭게 미스릴 관이 튀어나온다.

“플라잉 블랭킷!”

마법 원반이 생성되자 그 위에 관을 올려놓는다.

그리곤 천천히 관 뚜껑을 연다. 보존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지라 생전의 모습 그대로다.

쿵, 쿵―!

“모두 고개를 드시오.”

왕실 시종장의 구령에 따라 모두가 고개를 들어 관을 바라본다. 하지만 멀린의 얼굴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현수는 여전한 스승의 모습에 울컥하는 기분이 든다.

‘스승님……!’

아르센 대륙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30분 정도밖에 같이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아쉽다.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더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랬다면 아드리안 공국의 위기는 더 빨리 해소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오랜 시간 정든 사람과 헤어지는 것 같아 눈물이 나온다. 찌질하던 인생을 바꿔준 인물, 존경하는 스승, 자애로운 할아버지를 한꺼번에 잃은 기분이 든 때문이다.

현수는 공손히 예를 갖췄다.

한국식으로 두 번의 큰절과 한 번의 반절이다. 절을 올리며 현수는 스승이 영원한 안식을 갖기를 기원했다.

“스승님,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현수가 정중히 예를 갖추는 동안 모든 이가 고개를 들어 이 모습을 보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선 현수는 천천히 걸어 멀린이 영원히 쉴 곳으로 이동했다. 귀족들은 멀린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통로 곁에 도열해 있다.

관이 지나칠 때마다 귀족들은 공손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며 한마디씩 한다.

“시조님의 영원한 안면을 기원드리옵니다.”

“시조님이 계셨기에 오늘날 저희가 있사옵니다. 부디 아드리안 왕국을 영원히 수호하여 주시옵소서.”

“마탑주님의 마지막 모습 잘 보았습니다. 평화로운 영면에 드시길 기원드리옵니다.”

“주신이시여, 저희 시조께서 편히 쉬시도록 보살피소서.”

“시조님의 유지를 받들어 평화로운 나라가 되도록 애쓰겠나이다. 부디 아드리안을 보살피소서.”

상당히 긴 통로다. 현수는 시종일관 엄숙한 표정으로 관을 이끌었다. 드디어 관이 안치될 자리에 당도하였다.

“매직 캔슬!”

마법 원반이 사라지자 미스릴 관은 정해진 위치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현수는 고개를 들어 장내를 휘돌아보곤 장중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보아라! 여기 세상 모든 마법사의 정점에 계시던 위대한 마법사께서 계시다!”

마나가 실린 현수의 음성에 모두가 시선을 모은다.

“나는 이실리프 마탑의 제2대 마탑주로서 이 자리에서 선언하노니 누구든 이분의 영면을 방해하는 자는 이실리프 마탑의 분노를 살 것이다!”

이로써 멀린의 영면을 방해할 자들은 사라진 셈이다.

아르센 대륙에서 이실리프 마탑의 뜻을 거스를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마디 더 해야겠기에 현수는 입을 열어 말했다.

“신이시여! 위대한 마법사의 영면을 보호하소서!”

현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관 뚜껑이 서서히 닫힌다.

장내의 모든 인사는 멀린의 마지막 모습에 시선을 집중한 채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다.

너무도 엄숙한 분위기인지라 누구 하나 입을 열어 소리 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쿠웅―!

드디어 관 뚜껑이 닫혔다.

현수는 대기하고 있는 인부들에게 시선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준비해 둔 자재들로 공사를 시작한다.

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현수는 세 겹의 통로에 그려 넣은 마법진에 활성화 마법을 부여했다.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해 둔 공사지만 시간은 오래 걸렸다. 그래도 어느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현수가 지켜보고 있고 국왕 또한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는데 누가 감히 자리에 앉거나 바깥으로 나가겠는가!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마탑주님.”

“네, 스승님을 이렇게 모실 수 있어 좋군요. 준비하느라 애쓰셨습니다.”

현수와 국왕이 주고받은 대화이다.

“시장하실까 싶어 음식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가지요.”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바로 바깥으로 나간 것은 아니다.

천천히 걸어 스승의 관 위에 만들어진 기념비로 다가가 정중히 허리를 꺾는다.

“스승님, 영면에 드시옵소서.”

허리를 펴자 국왕이 다가와 같은 예를 취한다. 곧이어 왕국의 모든 귀족 또한 예를 취한다.

이로써 멀린의 안장식이 성대하게 끝났다.

“마탑주님 덕분에 왕국이 안정되었습니다. 아울러 시조님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스승님께서 왕국의 안위를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위기에 처하는 일이 없도록 잘 준비하십시오.”

“네, 이제부터는 마탑주님의 말씀대로 늘 준비하는 자세로 살겠습니다.”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 바깥에는 연회장이 준비되어 있다. 현수와 국왕은 상석에 나란히 앉아 술과 음식을 즐겼다.

“그나저나 ‘검은 별의 전설호’는 내일 당도하는 것이 맞는지요?”

“네, 내일 오전에 입항한다고 합니다. 내일이면 다프네 님의 행방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참, 그제 마샤 화이트 폰 그레고리 양을 처소로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국왕의 두 딸도 헥사곤에 있으니 보고가 들어가는 건 거의 실시간일 것이다. 그러니 국왕이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렇습니다.”

“경하드립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마탑주님의 왕비에 우리 아드리안의 여인 또한 포함되었습니다. 이로써 양국 간의 우의가 더 돈독해지길 바랍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아드리안 왕국은 영원히 이실리프 왕국의 우방국이 될 겁니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국왕은 아주 기분이 좋은 듯하다.

“부디 소피아와 아이리스, 그리고 이사벨과 나오미, 마지막으로 아그네스도 아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지요.”

헥사곤의 여인들을 취하고 말고는 전적으로 현수 본인의 의사에 좌우된다. 그럼에도 국왕이 이처럼 간곡히 말하니 더 이상 거두지 않겠다는 말을 해선 안 된다.

좋은 분위기 다 깨지기 때문이다.

같은 순간, 헥사곤엔 왕실 시녀들이 방문해 있다. 마탑주의 제1부인이 된 마샤의 의전 때문이다.

시녀들이 마샤의 치수를 재는 동안 소피아와 아이리스 공주 등은 깍듯하게 마마라는 칭호를 쓰며 예를 갖춘다. 이제 공주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가 된 때문이다.

마샤는 이제 헥사곤에만 머물지 않아도 된다.

다시 말해 언제든 외출이 가능하다. 아울러 모든 공식 행사에 참석할 권한을 얻었다.

마탑주의 제1부인은 국왕의 제1왕비와 같은 서열이니 공작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신분이다.

따라서 마샤가 외출할 때엔 엄중한 경호를 받게 된다. 제1왕비의 그것과 동일하다.

마샤는 이 모든 것이 꿈만 같다. 그렇기에 싱글벙글하고 있고, 나머지 다섯 여인은 한없이 부럽다는 표정이다.

어제 아침, 이들 다섯은 세상의 중심에서 마탑주와 함께 나오는 마샤를 보고 기절할 듯 놀랐다. 고대하던 간택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마샤는 마탑주와 밤을 함께 보냈다.

원래는 처녀막 검사를 한다. 평상시엔 석 달에 한 번 이 검사를 하여 순결이 유지되는지를 파악한다.

그런데 이 검사를 건너뛰었다. 다섯의 증언이 너무도 확실하였기에 이 과정이 생략된 것이다.

공주 둘과 공녀 둘, 그리고 후작의 손녀가 그렇다는데 어찌 시녀 따위가 토를 달겠는가!

마샤 입장에선 정말 천운이다. 그 결과가 현재 상황이다.

한편 화이트 후작가에서도 난리가 벌어지고 있다.

마샤가 마탑주의 제1부인으로 간택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가 환호성을 울리며 잔치 준비가 한창이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말이 진심으로 느껴지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반대로 화이트 후작가를 넘보던 로만 백작가엔 비상이 걸렸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후작가를 찾아가야 하는 거야?”

“아무래도 그러셔야 하지 않을까요?”

백작은 기사단장의 근심스런 표정을 보고 낯빛이 흐려진다. 그동안 다소 무례하게 굴었고, 노골적으로 화이트 후작의 영지를 탐낸 것이 소문난 상태이다.

이 때문에 저쪽에서 발작을 하면 그걸 기회로 영지전을 선포하려는 의도였다. 따라서 무례하고 노골적으로 영지를 탐낸 것은 사전에 계산된 전략이다.

그런데 지금은 심히 부담스럽다. 화이트 후작가를 건드리는 것은 마탑주에게 욕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마샤가 공주와 공녀들을 모두 제치고 마탑주의 제1부인이 된 때문이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할까? 끄으응!”

그간의 무례를 트집 잡으면 문제가 된다. 상대는 후작이고 이쪽은 백작이기 때문이다.

하극상을 범했으니 왕궁으로부터 처벌하겠다는 교지가 날아올 수도 있다. 그 결과 자칫 자작이나 남작으로 작위가 낮아질 수도 있고, 영지 일부를 빼앗길 수도 있다.

전혀 원하지 않은 일이다.

백작은 기사단장을 앞에 둔 채 장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대책은 없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괘씸하기 이를 데 없어 조만간 사달이 날 듯하여 조마조마하다. 그렇다고 영지를 버려둔 채 도망갈 수도 없다.

“끄응! 어떻게 하지?”

“저어… 영주님.”

“오, 그래. 어서 말하게. 뭐 좋은 수라도 있나?”

백작은 기사단장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먼저 예물을 보내는 건 어떨까요?”

“예물? 무슨 예물?”

“화이트 후작의 따님께서 마탑주님의 제1부인이 되셨으니 경하드린다는 의미로 금화를 보내십시오.”

백작은 대꾸하지 않고 어서 말을 이어가라고 손짓한다. 지금은 사소한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쪽에서 생각하기에 ‘이건 누가 봐도 무리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거금을 보내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효과가 없을 테니까요.”

“그래? 그, 그럼 얼마나 보내지? 오천 골드? 만 골드?”

1골드가 한화로 약 100만 원이다. 따라서 1만 골드라면 100억 원 정도의 거금이다.

“흐음, 그거 가지곤 어려울 겁니다. 적어도 10만 골드 정도는 되어야 무리했다 생각하지 않을까요?”

“시, 십만 골드나?”

자린고비 뺨치게 인색하고 탐욕스런 백작이기에 십만 골드라는 말에 정신이 혼미해진 듯 털썩 주저앉는다.

하긴 1,000억 원이면 지구에서도 엄청나게 큰 금액이다. 아등바등 재물을 모았으니 아깝기는 할 것이다.

기사단장은 영주의 성품을 알기에 쐐기를 박는다.

“작위가 낮춰지거나 영지를 잃으실 수도 있습니다. 십만 골드를 택하시겠습니까, 아님 작위와 영지를 보존하실 겁니까? 최악의 경우 평민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이건 대답이 정해진 물음이다. 일 년에 약 2만 골드쯤 순이익이 발생되는 영지를 보존하는 것이 훨씬 낫다.

“다, 당연히 영지지. 근데 정말 10만 골드나 가져다 줘?”

“그것만으론 부족하지요.”

“부족해? 10만 골드나 되는데?”

백작은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네! 부족하다 여길 수도 있습니다. 화이트 후작님의 영지가 지난 몇 년간 몹시 어려웠다는 거 아시죠?”

“당연히 알지. 소출이 점점 줄어 기사단도 제대로 유지 못하는 지경이잖아.”

화이트 후작의 영지를 먹기 위해 거의 날마다 세작을 보냈으니 그쪽 사정은 손바닥 들여다보는 듯 훤하다.

“이쯤해서 10만 골드와 밀 10만 포대가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밀 10만 포대를 추가로?”

“그게 아까우십니까? 원가로 따지면 30만 실버이니 3,000골드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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