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092화 (1,091/1,307)

# 1092

“그, 그런가? 아무튼 그게 들어가면 마른 논에 물 들어간 것처럼 아주 좋겠지.”

“그렇죠? 그럼 그쪽에서 우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죽을 지경이었는데 확 피면 지금껏 괘씸하다 생각했더라도 조금은 너그러워지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럴까?”

백작은 턱을 괴었다. 아무래도 10만 골드는 너무 과하다 싶어 뭔가 다른 수가 없을까 고심하는 것이다.

“실기하면 20만 골드로도 못 막습니다.”

기사단장 역시 필사적이다. 백작이 작위를 잃으면 충성을 맹세한 기사단은 자연히 해산된다.

이렇게 해산된 기사단 소속 기사들은 기껏해야 용병으로 살아야 한다.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다른 영지에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사단장 역시 똥줄이 타기는 마찬가지이기에 백작으로 하여금 거금을 쾌척하도록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영주님, 이번엔 제 말대로 하십시오. 그게 만수무강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 그럴까?”

“네, 하루라도 빨리 저쪽에서 가질 수 있는 반감이나 노화를 누그러뜨려야 합니다. 그러니 조금 무리다 싶어도 결행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돈이야 또 모으면 되잖습니까?”

잠시 뜸을 들인 백작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자네 말대로 하지. 그런데 전표로 보내면 되지?”

“아뇨. 무겁더라도 현금으로 보내셔야 합니다. 그래야 바로 쓸 수 있고 받은 사람도 부담스러우니까요.”

“알겠네. 그리하지. 호송 책임은 자네가 맡아주게. 서찰을 써줄 테니 저쪽에 잘 전해드리고.”

기사단장은 이제야 제 뜻대로 되는 것이 마음에 드는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입니다. 화이트 후작님을 만나 뵙고 그간의 무례를 용서해 달라는 백작님의 말씀을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알았네. 자네만 믿겠네.”

백작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거금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어 몹시 아깝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마탑주의 장인이 되실 분이다.

분노를 사면 이실리프 마탑은 물론이고 영광의 마탑과 왕궁에서도 치고 들어올 수 있다. 아니면 인근 영지의 모든 기사와 마법사들이 총출동할 수도 있다. 따라서 체면이나 자존심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바짝 엎드려야 할 때다.

“하면 지금 바로 10만 골드를 챙겨 다녀오겠습니다. 빠를수록 좋으니까요.”

“그래, 그렇게 하게. 돈은 재정관에게 내달라 하게.”

말을 마친 백작은 종이를 꺼내 ‘10만 골드와 밀 10만 포대 인출’이라 쓰곤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에 인주 비슷한 것을 바르고 꾹 누른다.

영주의 허가가 떨어졌음을 알려주는 증빙이다.

기사단장이 절도 있게 예를 갖춘 후 물러가자 백작은 털썩 주저앉는다.

“쓰벌! 먹지도 못할 걸 괜히 욕심 부렸다가……. 쩝! 10만 3,000골드라니. 영지의 세율을 올려야겠군. 총관! 총관!”

백작의 부름에 후다닥 달려온 총관은 영지의 세율을 10%나 올리라는 명령에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그건 안 됩니다, 영주님!”

“안 돼? 왜 안 돼?”

“며칠 전에 결재하신 서류 중에 왕궁에서 온 공문 못 보셨습니까?”

백작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각 영지마다 다른 세율을 적용하여 일부 영지의 영지민들이 유민이 되어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왕국의 세율을 통일한다는 공문이 왔습니다.”

“그, 그래? 얼마로 하라는데? 전보다 오른 거야?”

“아뇨. 내렸습니다. 우리 영지는 종전보다 35%를 낮춰야 합니다.”

백작의 영지는 소출, 또는 수입의 75%가 세금이다. 그런데 이를 40%로 낮추라는 공문이 온 것이다.

“왕국법에 따르면 각 영지의 세율은 영주가 자율적으로 정하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왕국법엔 그렇게 명기되어 있지요.”

“그런데 왜?”

“우리 영지를 기준으로 말씀드리자면 영지민들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은 소출의 70%입니다. 그중 25%를 왕궁으로 납부했구요.”

“그래, 그렇지.”

백작은 영지 총 소출의 45%를 차지했다. 그렇기에 거의 후작급에 달하는 호사스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영지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다른 영지들의 평균 세율은 50%였다. 이 중 절반을 왕궁으로 보내고 나머지를 영지 유지 비용으로 썼다.

다시 말해 소출의 25%가 각 영주의 몫이었다.

“공문에 의하면 왕궁에선 세율을 40%로 낮추는 대신 15%만 보내라고 합니다.”

다른 영지들은 영주가 여전히 25%를 갖기에 변화가 없다. 하지만 백작은 수입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멍청하지 않기에 총관의 말에 눈을 크게 뜬다.

“뭐? 그, 그게 정말인가?”

“네, 국왕전하께오서 왕국민이 보다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베푸시는 것이라 하옵니다.”

현수가 준 이실리프 마탑의 금은보화가 국고를 튼튼히 하여 세금을 낮춰준 것이다. 현수의 덕이라면 덕이다.

“끄으응!”

백작은 나직한 침음을 토한다. 수입이 절반으로 줄면 영지를 유지하고 간신히 몇 푼 남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으으! 내 10만 골드! 그걸 어디서 벌충하지?”

백작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총관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디 아픈가 싶은 것이다.

현수가 아무 생각 없이 밧줄을 잡아당긴 결과 화이트 후작가는 살판이 났고, 후작의 영지를 삼키려던 백작은 초상난 얼굴을 하고 있다. 가히 나비효과라 할 만하다.

9장 블랙일 아일랜드로!

“마탑주님, 왕실 기사단장 윌콕스 레온 데 헤일라가 알현을 청하옵니다.”

“들라!”

“네!”

현수의 허락이 떨어지자 왕궁에서 특별히 파견된 레온 백작이 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래, 알아보았는가?”

“네, 선원들을 심문한 결과 다프네 님은 이곳으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600㎞ 떨어진 곳에 위치한 블랙일(Black eel) 아일랜드에서 내리셨다 하옵니다.”

“블랙일 아일랜드? 검은 장어 섬? 검은색 장어가 많이 잡히는 섬인가?”

섬 이름치고는 참 이상하기에 물은 말이다.

“아닙니다. 선원들의 말에 의하면 시커먼 바위로 이루어진 섬인데 장어처럼 길쭉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장어가 잡히는지의 여부는 모릅니다.”

“그래? 그럼 어느 나라 영토인가?”

“그 섬은 주인이 없답니다. 무인도지요. 샘물은 있지만 농토로 쓸 만한 땅이 없어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섬에 다프네가 내렸다고?”

사람이 살지 않는다 함은 주거 시설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 섬에 내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네,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확실히 그 섬입니다.”

“좋아. 누구랑 같이 내렸지?”

“선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남자 여섯에 여자 다섯입니다. 원래는 여자도 여섯이었는데 항해 도중 하나가 병을 얻어 죽었다고 합니다.”

“남자 여섯에 여자 다섯?”

“네, 남자들은 전부 검은 로브 비슷한 걸 걸쳤고, 여자들은 하나같이 미인이라 하였습니다.”

“다른 정보는?”

“없습니다. 항해하는 동안 사내들은 꼭 필요한 말 이외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선실 안에만 머물러서 선원들조차 얼굴을 못 보았다고 합니다.”

“흐으음!”

현수는 낮은 침음을 터뜨렸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이 든 때문이다.

“검은 별의 전설호는 정박해 있나?”

“네, 항구에 정박해 있습니다.”

“선장을 불러주게.”

“알겠습니다.”

물러났던 왕실 기사단장은 10분 만에 되돌아왔다. 그런 그의 뒤에는 텁석부리장한 하나가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다.

“선장인가?”

털썩―!

현수의 시선을 받자 장한은 얼른 무릎부터 꿇는다.

“위, 위대한 마탑주님을 알현하옵니다. 소, 소인은 검은 별의 전설호 선장 고든이라 하옵니다.”

“그래, 고든. 여기 있는 기사단장에게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자네 배에 내 약혼녀가 타고 있었네. 그리고 블랙일 아일랜드에 내렸지.”

“맞사옵니다. 저희 배가 이곳에서 출항할 때 여인이라곤 딱 여섯뿐이었습니다. 항해 중 하나가 사망하였고, 나머지 다섯은, 아니, 다섯 분은 블랙일 아일랜드에서 하선하신 게 맞사옵니다.”

다프네가 끼어 있다니 무조건 존댓말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곳을 가봐야겠네. 자네의 배를 쓸 수 있겠는가?”

“네? 아, 그럼은요. 저, 저희가 모시겠사옵니다.”

선장은 얼른 고개를 조아린다. 마탑주가 배를 달라고 하면 그냥 줘야 하는 곳이 이곳 아드리안 왕국이다.

태워주는 건 문제도 아니다.

도착 즉시 가져온 물건들을 하역하고, 새로운 상품들을 선적한 뒤 바다 건너 제라스 왕국으로 가야 했다.

배를 하루라도 쉬게 하면 손해이기에 그곳을 다녀온 뒤엔 테리안 왕국으로 가는 일정도 잡혀 있다.

대륙의 상단들과 맺은 계약인지라 배가 침몰하지 않는 이상 꼭 지켜야 할 약속이다. 하지만 마탑주가 쓰겠다면 다른 계약은 전부 뒤로 밀리거나 취소된다.

감히 손해배상을 청구할 간 큰 상단은 없을 것이니 당연히 사용 가능하다 대답한 것이다.

“언제 출발할 수 있는가?”

“도, 동행하실 분이 얼마나 되시는지요? 인원수에 따라 식량과 물을 실어야 해서요.”

“나 혼자 가네.”

“네? 아, 네, 알겠습니다. 하오면 잠시 후에 출항하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도착하자마자 왕실 기사단장을 만나 심문을 받았다. 그럼에도 하역 작업은 무사히 마쳐졌다. 이곳 일꾼들을 고용한 때문이다. 따라서 배는 비어 있을 것이다.

선원들 이외에 현수만 승선한다면 필요한 식량과 물을 싣는 것은 금방이다.

“좋아. 준비되면 이야기하게. 오가는 운임은 지불하겠네.”

“아, 아닙니다. 소인이 어찌 위대하신 마탑주님께 운임을 받겠사옵니까? 그저 소인의 배에 타주시는 것만으로도 삼생의 영광이옵니다. 하오니 운임일랑 마음 쓰지 마시옵소서.”

“…알겠네. 물러나 준비부터 하게.”

“네, 그럼 물러가옵니다.”

선장은 뒷걸음질로 물러난다. 어디서 들은 건 있나 보다.

“마탑주님, 정녕 혼자 가실 것이옵니까? 저희 왕실 기사단이 모시겠습니다.”

“아닐세. 나 혼자가 편해. 그러니 자네는 이만 단원들을 이끌고 왕궁으로 돌아가게. 이건 명이네.”

“…네, 알겠습니다.”

명령이 내려졌으면 따르는 것이 기사 된 도리이다. 그렇기에 기사단장은 정중히 군례를 올린다.

“국왕전하에겐 협조해 주어 고마웠다고 전해주고.”

“알겠습니다. 말씀 전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만 물러가게.”

“네, 그럼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기사단장이 물러나고 2시간쯤 지났을 때 고든 선장이 되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별의 전설호는 아드리안 왕국의 항구를 떠나 넓은 바다로 들어섰다.

길고 긴 항해의 시작이다.

검은 별의 전설호는 갤리선(Galley)의 일종이다. 노를 주로 쓰고 돛을 보조적으로 사용하는 이중 갑판선이다.

상갑판과 하갑판이 있는데 하갑판 아래엔 좌우 20개씩 40개의 노가 달려 있다.

120명의 노예가 교대로 노를 젓도록 되어 있다.

항해하는 동안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들은 하갑판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상갑판과 하갑판 사이는 화물을 적재하는 공간이다. 상갑판 위의 중심부에도 화물을 실을 수 있다.

25명의 선원은 여기저기 자투리 공간에 자신들만의 휴식 공간을 만들어놓고 생활한다.

현수가 승선한 검은 별의 전설호는 상선이며, 해적을 만나면 전투를 벌일 수 있도록 개조된 전투선이기도 하다.

대형은 아니고 중형 규모의 갤리선인 이 배의 마스트에는 스태프와 검이 교차된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이실리프 마탑의 상징이다. 언제 준비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상당히 재빠르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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