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3
누구든 이 배를 건드리려 하면 이실리프 마탑의 분노를 살 수 있음을 경고하는 의미이며, 위대하신 분이 승선해 있음을 사방에 알리는 역할도 한다.
“마탑주님,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험, 그런가?”
난간에 기대어 넓은 바다를 감상하던 현수가 돌아서자 주방에서 올라온 시녀가 고개를 숙인다.
아르센 대륙에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여자는 승선시키지 않는다. 여자를 태우면 폭풍우를 만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미신이다.
실제로 배에 여자를 태우지 않는 이유는 힘든 뱃일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자칫 분란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선원들이 싸워 이겨야 할 첫 번째는 거친 파도가 아니라 고독이다. 가족, 친구들과 떠나 있어야 하기에 항해술 못지않게 고독에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째는 성욕(性欲)을 참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가 있는 육지로 가고 싶다’는 것이 항해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여자를 태우면 어찌 되겠는가!
모든 선원이 충분히 성욕을 해소할 수 있으면 문제가 없지만 누군 해소하고 누군 참아야 한다면 선상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여 지난 20년간 여자를 태우지 않았다.
그러다 다프네 일행이 그 기록을 깼다.
겉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사내 여섯 때문이고, 많은 돈을 준다 했기에 태운 것이다. 오늘은 두 번째로 여자들이 승선한 날이다.
아드리안 왕국 최남단 항구도시 콘트라는 파이젤 백작의 영지 중 일부이다. 백작의 똘똘한 아들 피터와 유모 엠마는 현재 이실리프 군도에 머물고 있다.
현수의 제자가 되기 위함이다.
파이젤 백작은 마탑주의 부인이 될 다프네를 태웠던 배가 입항한다고 하자 만반의 준비를 했다.
보나마나 다프네를 찾으러 출항할 것이니 마탑주가 불편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를 배려한 것이다.
첫째는 신선한 식량이다.
곡식은 물론이고 채소와 육류까지 충분히 준비했다. 냉장고가 없는 곳이므로 마법사가 동원되어 보존 마법을 걸었다.
적당량의 질 좋은 술도 선적했다.
둘째는 편안한 잠자리이다.
부드러운 지푸라기를 넣어 제법 푹신한 새 침구를 들여놓았다. 매트리스 크기는 더블 사이즈이다.
셋째는 맛깔난 음식을 만들어낼 조리사이다.
영지 최고의 조리사와 보조를 승선시켜 마탑주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도록 하였다.
넷째는 어여쁜 여인들이다.
항해가 얼마나 길어질지 모른다. 그 시간 동안 적적함을 달래줄 처녀들을 뽑아서 승선시켰다.
마탑주의 지고한 신분을 고려하여 귀족가, 또는 기사들의 여식 중에서 순결한 여인들만 골랐다.
웬만하면 불만의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마탑주에 의해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신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승선시킬 처녀들을 찾는다는 백작의 말에 귀족가, 마법사, 기사, 상인의 가문에서 서로 꽃단장을 시켜 보냈다.
마탑주에 의해 딸이나 손녀가 순결을 잃어도 삼생의 영광이라 여긴 때문이다. 조선시대 때 승은2)을 입은 것보다도 더한 광영으로 생각한 것이다.
세상 모든 마법사의 마스터이며 세상 모든 기사의 하늘인 존재가 씨를 뿌려준다는데 어찌 마다하겠는가!
재수가 좋아 잉태라도 하면 그때는 신분이 수직 상승한다.
마탑주의 아들, 혹은 딸을 낳은 여인을 어찌 함부로 대하겠는가! 그렇기에 서로 자신들의 여식이 더 어여쁘다며 뽑아서 승선시켜 달라는 청탁이 있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한바탕 소란이 빚어졌고, 세 명의 여인이 뽑혔다. 애슐리와 보나, 그리고 캐롤이다.
애슐리는 3서클 마법사인 남작의 딸이고, 보나는 소드 익스퍼트 중급인 기사의 딸이다. 캐롤은 항구도시 콘트라에서도 제법 큰 규모의 상단을 운영하는 상단주의 손녀이다.
이들의 임무는 마탑주의 지근거리에서 모든 시중을 드는 것이다. 물론 밤 시중도 포함되어 있다.
방금 전, 현수에게 식사 준비가 되었으니 오라고 한 여인은 캐롤이다. 올해 나이 이십이라는데 아주 예쁘다.
벽안에 금발인 샤를리즈 테론의 리즈 시절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알았다.”
한 번 더 바다를 바라본 현수는 캐롤의 뒤를 따라 갑판 위에 놓인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승선하자마자 꺼내놓은 이것은 스위트룸이나 마찬가지이다. 침대와 소파는 물론이고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까지 갖춰져 있다.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인 20피트짜리 드라이 컨테이너의 내부 사이즈는 폭 2.35m, 길이 5.9m, 높이 2.4m 정도 된다.
여기에 공간 확장 마법을 걸자 폭 9.4m, 길이 23.6m, 높이 9.6m가 되었다. 약 5평이던 내부 공간이 67평으로 대폭 늘어난 것이다.
이렇듯 크게 만든 것은 애슐리와 보나, 그리고 캐롤 때문이다. 출항하자마자 인사를 하러 온 여인들은 현수에게 파이젤 백작의 편지를 전했다.
내용을 읽은 뒤 셋을 바라보곤 컨테이너를 꺼냈다.
자신 때문에 원하지 않은 고생을 하게 된 세 여인을 배려하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칸막이가 쳐져 있는 안쪽엔 셋을 위한 침대와 소파 등이 갖춰져 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기다리고 있던 애슐리가 의자를 당겨 뺀다. 현수가 앉자 보나가 냅킨을 펼쳐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식탁 위에는 잘 조리된 음식들이 놓여 있다.
신선한 채소와 닭 가슴살이 주원료인 샐러드는 드레싱이 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해달라고 주문한 때문이다.
현수는 아공간에 있는 아몬드·호두 드레싱을 적당량 뿌리고 맛을 보았다.
예상대로 고소하면서도 신선한 맛이 느껴진다.
다음은 스테이크이다. 녹차 가루를 뿌려 누린내를 없애고, 나이프로 썰었다.
후춧가루가 아닌 녹차 가루를 쓴 이유는 이것 역시 누린내를 잡아주는 효능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항산화 작용을 하는 성분이 많아 노화를 억제하고 레몬보다 다섯 배나 많은 비타민C가 들어 있어 피부가 거칠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스테이크 이외에도 스튜가 있다. 한국 사람인 현수는 국물이 있는 음식을 선호하기에 이런 식단을 요구한 것이다.
속 깊은 접시에 담긴 스튜엔 후춧가루를 넣었다. 그리곤 휘휘 저은 뒤 맛을 보았다.
예상대로 감칠맛이 난다. 다시다가 큰 역할을 한 듯싶다.
“맛이 괜찮군.”
“네.”
애슐리와 보나, 그리고 캐롤은 침만 삼키고 있다. 배가 고픈데 풍기는 냄새가 정말 좋기 때문이다.
속내를 짐작한 현수는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컨테이너 바깥으로 나갔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쾌청한 날이고, 바람이 불어 돛이 부풀어 있어 제법 빠르게 항해하는 중이다.
현수가 바닷바람을 쐬고 있는 동안 애슐리와 보나, 그리고 캐롤은 생전 처음 맛보는 진미에 정신이 팔려 있다.
누린내가 하나도 나지 않는 스테이크, 감칠맛 나는 스튜, 그리고 곱게 갈린 호두와 아몬드로 만든 드레싱을 뿌린 샐러드를 언제 먹어보았겠는가!
셋은 입맛을 버리는 중이다.
“선장, 이 속도로 가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는가?”
현수의 물음에 고든 선장은 얼른 이물3) 아래의 파도를 살피곤 입을 연다.
“에에, 이 정도면 블랙일 아일랜드까지 여드레나 아흐레 정도 걸릴 겁니다요.”
“8일이나 9일? 확실한가?”
“네, 지금처럼 바람이 도와주면 보통 3∼4노트로 항해하거든요. 그럼 여드레나 아흐레 후면 당도합니다.”
도량형으로 환산해 보면 1노트(kn)는 1.852㎞/h이다.
3∼4노트라면 약 5.5∼7.4㎞/h의 속도이다.
하루가 24시간이니 이를 곱해보면 하루에 132∼177㎞가량을 항해할 수 있다는 소리이다.
블랙일 아일랜드까지 600㎞ 정도 된다 하였으니 3노트로 가면 닷새가 걸리고, 4노트이면 나흘이 걸려야 한다.
그럼에도 선장이 여드레나 아흐레를 이야기한 것은 예비 인력이 있기는 하지만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노를 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흐음! 바람이 조금 더 세면 어떤가?”
“바람의 방향이 문제인데, 뒤에서 불어준다면 당연히 더 빨라지겠지요.”
“얼마나 빨라지나?”
“강풍이 불면 9∼10노트까지도 가능할 겁니다요.”
16.7∼18.5㎞/h로 항해하면 600㎞ 떨어진 블랙일 아일랜드까지 약 32∼36시간이 걸린다. 하루에 8∼9시간만 노를 저으면 꼬박 나흘을 가야 당도한다.
마음이 급한데 어떻게 나흘이나 기다릴 수 있겠는가!
“그래? 바람이 더 세지면 더 빨라진다고?”
“네, 물론이옵니다.”
선장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그럼 더 강한 바람이 불게 하지. 선원들에게 대비하도록 하게.”
“네? 바람을 불게 해요?”
마법사는 바람을 이용한 공격이 가능하다는 소리를 들어본 바는 있다. 그건 일회성이며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
갤리선처럼 큰 배가 속력을 얻으려면 바람의 세기도 엄청 강해야 하지만 지속적이어야 한다.
마탑주라 해도 배가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바람을, 그것도 원하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불게 할 능력은 없다.
마법이 신기하기는 하지만 만능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잠시 후부터 아주 강한 바람이 불 것이네. 어느 방향으로 바람이 불게 하면 되겠는가?”
“네? 저, 저쪽으로… 저쪽으로 곧장 100㎞쯤 갔다가 방향을 틀어서 저쪽으로 가다가 다시 저쪽으로…….”
선장은 손짓을 섞어가며 항로에 대해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배들은 직선으로 항해하지 않는다. 암초와 소용돌이, 그리고 해류 때문이다.
오랫동안 항해를 했기에 고든 선장은 바다를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다. 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해류 등을 감안하여 방향을 가리킨다.
그런데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직선으로 가면 될 것을 빙 돌아서 간다는 느낌을 받은 때문이다.
“블랙일 아일랜드가 저쪽에 있다면 직진을 하지 왜 그렇게 가는 건가?”
“그, 그건 저쪽 바다가 SFD이기 때문입니다.”
“SFD? 그건 무엇의 약자인가?”
“네, Sea of Ferocious Devil의 약자입니다요.”
“씨 오브 퍼로우셔스 데빌? ‘흉포한 악마의 바다’라는 이름이 왜 붙은 거지?”
“저 해역엔 크라켄이 우글거리니까요. 그래서 절대 가지 않는 곳입니다요.”
“크라켄이 우글거려? 얼마나 많은가?”
현수는 크라켄을 사냥해 본 적이 있다.
해적들에게 납치된 로잘린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가 상대했다. 당시엔 20m짜리 검강과 체인 라이트닝, 그리고 윈드 커터 마법으로 제압했다.
그때 잡은 크라켄은 길이가 200m쯤 되었는데 촉수를 휘두르니 해적선의 굵은 돛대가 힘없이 부러졌다.
검강에 의해 다리가 잘리자 지랄발광을 했는데 그 때문에 해적선 여섯 척이 침몰해 버렸다.
드래곤을 제외하곤 가장 강력한 몬스터이다.
“적어도 100여 마리는 있는 걸로……. 마, 마탑주님, 저쪽으론 절대 항해하지 않습니다요.”
선장은 현수가 그곳으로 가자 할까 싶어 두려운 듯 어두운 표정이다. 마탑주가 타고 있지만 저 바다에 사는 무시무시한 놈을 떠올리면 진저리가 쳐지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고든 선장은 견습선원으로 되어 배에 올랐다.
첫날 맡은 임무는 찢겨진 지브(Jib)를 꿰매는 일이었다.
참고로, Jib란 뱃머리의 큰 돛 앞에 다는 작은 돛이다.
제일 윗부분이 찢겨졌기에 일단은 마스트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해야 하는 작업인데 일종의 극기 훈련이다.
어쨌거나 갑판장의 지시에 따라 마스트 꼭대기까지 올라간 고든은 안전을 위해 자신의 허리를 견시수가 서 있는 난간에 묶었다. 그리곤 지브에 매달려 열심히 꿰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