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4
그때 크라켄 한 마리가 소리 없이 다가와 기다란 촉수로 배를 휘감았다.
놀란 선원들이 열심히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선원이 육십 명이나 되는 큰 배였는데 크라켄의 촉수에 의해 반파되었다. 그리고 선원 모두 크라켄의 먹이가 되어버렸다.
고든 선장은 크라켄의 촉수에 의해 마스트가 부러질 때 같이 바다에 빠졌다. 그런데 다행히도 지브가 몸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크라켄은 움직이는 모든 선원을 촉수로 휘감아 잡아먹었지만 고든은 살아남았다. 바다로 떨어지는 순간 기절하였기에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고든은 열이틀 만에 구조의 손길을 만났다. 그리고 다시는 인근 해역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SFD 인근을 지날 때면 가급적 멀리 돌아서 항해하곤 했다. 그렇기에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저 바다를 가로질러 가면 시간과 거리가 단축되는가?”
“…마, 마탑주님, 저 바다는 절대 들어가면 안 되는 금역이옵니다.”
고든 선장은 바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마탑주 때문에 몰살당하게 생겨 죽을상을 하고 있다.
“말하게. 가로질러 가면 시간과 거리가 단축되나?”
“마탑주님, 진짜 저긴 가면 안 되는 곳입니다요.”
고든은 애원하는 표정으로 읍소했다.
“어허! 어서 말을 하게! 직진하면 시간이 덜 걸리나?”
현수가 음성을 높이자 고든은 한숨을 내쉰다.
“휴우∼!”
마탑주의 심기를 거스르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마법사란 다들 괴팍한 성품을 가졌다고 알고 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고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직진하면 거리가 짧아지죠. 콘트라에서 약 250㎞ 거리이옵니다.”
처음에 600㎞라고 이야기했으니 무려 350㎞를 돌아간다는 뜻이다.
“…항로를 수정하게.”
“마탑주님, 제발……. 우리 다 죽습니다. 크라켄이 얼마나 흉포한지 아십니까? 금역으로 들어가면 배는 다 부서지고 선원은 모조리 놈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요.”
고든의 말에도 현수는 표정 변화가 없다.
“키를 잡게. 바람을 저쪽으로 불게 할 터이니.”
“마탑주님!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정말 다 죽습니다요! 저쪽은 절대 가면 안 되는 바다라구요!”
고든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애원했지만 현수는 요지부동이다. 대신 입술을 달싹인다.
“아리아니!”
“네, 주인님.”
바다로 나온 후 아리아니는 아공간에 들어가 있었다. 바다엔 숲이 없기 때문이다.
“실라디아 좀 불러줘. 엘리디아도 부르고.”
“알겠습니다. 실라디아, 엘리디아, 주인님이 부르신다.”
아리아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실라디아의 아름다운 교구가 드러난다. 연한 갈색이 섞인 긴 금발이 가슴과 하복부 아래의 비소를 살짝 가리고 있다.
“부르셨어요, 마스터?”
“그래, 잘 있었지?”
“그럼요. 제가 뭐 도와드려요?”
“응. 이 배가 저쪽으로 가야 해. 너무 느려서 그러니까 바람 좀 불게 해. 그렇다고 너무 세겐 하지 말고 적당히 조절해서 빠르게 갈 수 있도록 해봐.”
“네, 마스터. 맡겨만 주세요.”
말을 마친 실라디아는 생긋 미소 짓고는 고물 쪽으로 향한다. 고든 선장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룩이는 둔부가 몹시 육감적이다.
“마스터, 부르심 받고 왔어요.”
말을 하면서도 투명한 동체를 휘휘 휘감는 엘리디아는 물의 최상급 정령이다.
“이 배가 저쪽으로 갈 거야. 이야기 들어보니 저쪽 바다엔 크라켄이라는 놈들이 있대. 놈들이 이 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줄 수 있지?”
“크라켄이요? 네. 그런데 많아요?”
“응. 한 100여 마리가 있나 봐.”
“끄응! 모여 있으면 몰라도 흩어져 있으면 한두 마리 정도는 제어 못할 수도 있어요. 크라켄은 워낙 돌대가리인데다 막무가내라서요.”
“그래? 그래도 좋으니 제어 부탁해.”
“부탁이라니요? 명령하셔도 된답니다.”
“그래. 아무튼 그렇게 해줘.”
“호호, 네. 명에 따르옵니다.”
몸은 용처럼 변했지만 엔다이론 시절의 여성성은 잃지 않은 듯 교소를 터뜨리곤 물러난다.
10장 크라켄과 한판!
휘이잉―! 휘이이잉―!
“으앗! 바람이 점점 세지고 있다. 바람 받아!”
고든 선장의 말이 떨어지자 선원들은 일제히 밧줄을 잡아당겨 바람이 최대한 실릴 수 있도록 방향을 조절한다.
그와 동시에 검은 별의 전설호는 그야말로 쏜살처럼 질주하기 시작한다.
점점 빨라지는가 싶더니 금방 10노트의 속력이 된다. 시속 18.5㎞의 속력으로 수면 위를 스치기 시작한 것이다.
검은 별의 전설호는 빨라진 속력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듯 요동친다. 선수는 위아래로 움직이는데 좌우로 흔들리기까지 하자 갑판 위의 물건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쾅! 콰쾅! 쿠당탕! 와당탕! 쿠쿵! 콰당!
“으앗! 조심해!”
“아앗! 밧줄, 밧줄 좀 줘!”
“우아앗! 내 발목을 밧줄이 휘감았어!”
“이봐! 조심해! 물통이 굴러다녀!”
갑판 위의 선원들은 요동치는 배 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붙잡는다.
하갑판 아래 노꾼들은 노에 걸리는 압력이 거세지자 일제히 안으로 잡아당긴다. 노를 젓는 것이 오히려 속력을 늦추는 상황인지라 일제히 거둬들인 것이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현수는 이물로 향한다.
“그리스(Grease)!”
이물에 윤활 마법이 걸리자 배의 요동이 급격하게 줄어든다. 저항이 확연하게 줄어든 때문이다.
“흠! 250㎞를 10노트로 가면 13시간 반쯤 걸리겠군.”
선장은 될 수 있으면 SFD 해역으로 향하지 않도록 키를 잡았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현수의 명을 받은 실라디아가 곧장 블랙일 아일랜드로 가도록 바람의 방향을 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엘리디아는 SFD 해역의 크라켄이 마스터의 배를 침범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하는 중이다.
강한 해류와 초강력 소용돌이를 생성시켜 크라켄을 해역에서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크라켄은 아무리 덩치가 커도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지 화들짝 놀라며 심해로 내려가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검은 별의 전설호는 전속력으로 쏘아져 가고 있다.
“세상에 맙소사! 아무리 마법사라고 하지만…….”
잔뜩 긴장한 채 키를 잡고 있는 고든은 고개를 끄덕인다.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는 확실히 일반 마법사들과 궤를 달리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이런 분에게……. 흐미! 죽을 뻔했구나.”
SFD 해역으로 가면 안 된다고 끝까지 뻗댔으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한 고든 선장을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어떤 벌이 내려졌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이다.
검은 별의 전설호의 돛은 부풀대로 부풀었다. 간신히 찢기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흐음! 이제 되었군.”
현수가 컨테이너에 발을 들여놓자 소파에 앉아 있던 애슐리, 보나, 그리고 캐롤이 화들짝 놀라며 일어선다.
“아! 나는 괜찮으니 다들 편히 앉아 있어.”
“…네에.”
손짓으로 앉으라 하자 셋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앉는다.
현수는 커피를 만들었는데 넉 잔이다. 혼자만 마시면 좀 치사한 느낌이 들어서이다.
커피만으로는 조금 그래서 케이크도 꺼냈다. 화이트 초콜릿과 생크림으로 데코레이션된 것이다.
아공간에서 접시들을 꺼내자 셋은 눈은 크게 뜬다. 이처럼 아름다운 식기는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마셔.”
“네에, 고맙습니다.”
셋은 예를 갖춘 뒤 커피 잔을 입에 댄다. 그윽한 향과 달착지근한 맛이 마음에 드는지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한다.
한국이 발명하고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커피믹스이니 맛 하나는 확실할 것이다.
셋은 그런대로 먹고살 만한 집의 여식이다. 그럼에도 이런 맛은 생전 처음이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머! 너무 맛있어요!”
“이런 맛은 정말 처음이에요!”
“마탑주님, 이런 건 처음 보는데, 이거 이름이 뭐예요?”
애슐리와 보나, 그리고 캐롤은 마탑주가 괴팍한 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한 듯 스스럼없이 말을 건넨다.
이들 셋은 현수가 선장과 이야기하는 동안 음식을 먹었다.
그러면서 녹차 가루와 후춧가루, 그리고 다시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넣자마자 누린내가 사라졌고, 밍밍하던 스튜는 감칠맛이 났으니 마법 가루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로 화제가 번져갔다.
애슐리는 거기 사는 여섯 여인은 이런 진귀한 마법 가루의 혜택을 매 끼니마다 입을 것이라 말했다.
다음 순간 보나가 입을 열었다.
“근데 소문엔 아직 마탑주님의 승은을 입은 분은 없다고 들었어요. 그게 사실일까요?”
“정말? 아직 청년이신데?”
캐롤의 말에 애슐리가 타박한다.
“얘, 겉모습만 그런 거야. 마탑주님의 연세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200살을 되셨을 거라는 게 정설이야.”
“에? 200살이요? 그럼 우리 할아버지보다도 훨씬 늙은 거잖아요?”
“그래. 증조부는 물론이고 고조부보다도 더 연세가 많으시지. 어쩌면 그분의 할아버지보다도 더 많을지도 모른대.”
애슐리의 말을 보나가 받았다.
“내가 듣기로 마탑주님은 몇 번의 바디 체인지를 경험하셨을 거래. 그래서 나이는 많지만 겉과 속 모두 청년이시래.”
“정말요? 그런데 왜 헥사곤에 계시는 분들이 아직 처녀인 거예요? 설마 고자는 아니겠죠?”
캐롤의 말을 애슐리가 받았다.
“고자는 아니셔. 소문에 의하면 라이셔 제국의 공녀와 미판테 왕국의 공녀, 그리고 가이아 여신의 성녀 같은 분들이 마탑주님의 부인이 되실 거래. 그러니 고자는 아니지.”
“그래? 그런데도 아직 헥사곤에 계신 분들이 전부 처녀인 거야?”
“그렇다고 들었어.”
보나의 대답에 캐롤이 눈빛을 반짝인다.
“그럼 우리가 먼저…….”
말을 하며 현수의 침대를 바라보자 애슐리와 보나의 눈빛도 반짝인다. 살아서 걸어 다니는 로또가 바로 곁에 있다.
일만 성사되면 평생 시중 받아가며 놀면서 먹고산다.
시선을 교환한 여인들은 어떻게 하면 현수를 유혹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다.
지구에서도 그렇지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처녀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세상의 뜬소문과 어디서 얻어 들은 귀동냥이 전부인지라 성사 가능성이 하나도 없는 이야기만 주고받는다. 그럴 때 현수가 들어선 것이다.
어쨌든 현수의 눈에 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용기를 내어 각자 한마디씩 한 것이다.
현수는 컨테이너로 오는 동안 이들 셋이 나누는 앙큼한 이야기를 들었다. 듣고 싶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자연스레 들린 것이다.
밤이 되면 홀딱 벗고 침대로 파고들자는 말을 한 건 애슐리다. 보나는 그래도 다 벗는 건 그러니 속옷 하나는 남기자고 했다. 캐롤은 흥분한 척 신음을 내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어이가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이곳 사람들에게 있어 자신의 위치가 너무나 높으니 벌어지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따끔한 교육은 필요할 듯싶다. 하여 커피를 준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게 뭐냐?’는 질문이다.
“아, 그거?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라는 거야.”
현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세 여인은 들고 있던 커피 잔을 얼른 내려놓는다.
“세, 센트 오브 워, 워머나이저라고요?”
애슐리의 입술이 떨리고 있다. 모친으로부터 듣고 또 들은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진한 갈색의 따끈한 액체, 그리고 달콤한 맛.
확실히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를 설명한 말이다.
이걸 먹으면 제아무리 지조 높은 여인이라 할지라도 욕정에 절은 탕녀처럼 군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