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5
‘사내를 잘못 만나면 평생 고생’이란 말을 들으며 경고한 것이 바로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이다.
시선을 돌려보니 보나와 캐롤도 겁에 질린 표정이다.
이 배엔 현수만 있는 게 아니다. 25명의 선원도 있고 하갑판 아래엔 120명의 노꾼도 있다.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를 먹고 현수의 여인이 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대로 신세를 망치게 된다. 천한 뱃놈과 그보다 더 천한 노예들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면 행복한 삶과는 영원히 안녕이다.
가문에서도 버림받을 것이다.
노꾼의 아내가 되면 똑같이 노예 대접을 받게 된다. 그렇기에 다들 겁에 질린 표정이다.
“흐음! 나는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울 거야. 나 없는 동안 잘들 하고 있어. 알았지?”
말을 마친 현수가 곧바로 사라지자 여인들은 겁에 질린 표정이 된다.
“애, 애슐리, 어, 어서 문을 닫아! 어서 빨리!”
“그, 그래! 내, 내가 닫을게!”
“우, 우리 이제 어, 어떻게 하지? 마탑주님은 안 계시고 우리만 남으면…….”
“아, 안 돼! 빨리 문 닫자! 어서 빨리!”
겁에 질린 보나가 후다닥 나가 컨테이너 문을 닫는다. 그런데 이 문은 밖에서만 잠글 수 있게 되어 있다.
화물을 싣는 용도로 제작된 것이니 당연히 안에서 잠기는 기능은 필요 없기 때문이다.
“보나야, 이 문 안 잠겨. 우리 어떻게 하지?”
“우리가 잡아당기고 있어야 해. 밖에서 누가 열고 들어오면 우린 끝이야. 캐롤, 너도 어서 와서 잡아당겨.”
“아, 알았어.”
세 여인은 밖에서 문을 열 수 없도록 있는 힘껏 잡아당기고 있다. 같은 순간 현수는 컨테이너 위에 앉아 있다.
파도를 가르며 달리니 마치 모터보트를 탄 기분이다.
“흐으음, 좋군.”
시원한 바람을 쐬며 전방을 주시한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는 동안 세 여인은 점차 힘이 빠짐을 느끼고 절망한다.
너무 세게 잡아당기고 있어서 기운이 빠진 건데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의 효능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으으! 보나, 우리 이제 어떻게 하지?”
“노꾼보다는 선원이 나은데. 그치?”
“그, 그럼. 노꾼에게 당하면 똑같이 노예가 되는 거잖아.”
결국 셋은 기진맥진하여 널브러진다. 하지만 컨테이너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선원 중 어느 누구도 감히 마탑주의 처소가 된 이곳에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는 전속력으로 항해한다. 그렇게 여섯 시간쯤 이동했을 때다.
“모두들 집중해라! 이제 곧 SFD 해역이다!”
고든 선장의 고함이 울려 퍼지자 선원들은 일제히 사방을 살핀다. 혹시라도 크라켄이 덤벼들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현수 역시 안력을 높여 전방을 주시한다.
엄청나게 덩치가 큰 놈들이 사는 바다라 그런지 색깔도 짙다. 파란색이 아니라 거의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이다.
“마나 디텍션! 샤프닝 센스!”
샤르르르릉―!
마나가 뿜어져 나갈 때보다 예민한 감각이 되도록 마법을 구현시켰다.
지상에서라면 본인을 중심으로 반경 2㎞까지 생명체가 감지된다. 그런데 이곳은 바다이다. 수면 위에는 당연히 아무것도 없다. 육지에서 너무 멀어 새도 오지 못하는 곳이다.
무언가가 다가온다면 수면 아래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물과 공기는 밀도 자체가 다르다.
액체가 기체보다 밀도가 높다 보니 마나의 확산 속도가 확연히 느린 것은 물론이고 범위 또한 줄어든다.
‘이 정도면 겨우 100m밖에 안 되겠는데?’
현수가 본 몬스터 도감의 내용엔 크라켄 큰 놈의 길이는 2,000m를 넘을 수도 있다고 되어 있다.
본인이 사냥한 것도 200m가 넘었다. 이렇게 큰 놈이 다가오는데 겨우 100m 거리에서 알아차린다면 문제가 있다.
“아리아니!”
“네, 주인님.”
기다렸다는 듯 어깨로 내려앉아 현수의 귀를 잡는다.
“혹시 이 근방 해저에서 이 배로 다가오는 녀석 있어?”
“다가오는 녀석이라면 무엇을…….”
“크라켄이라고 알아?”
“아뇨. 처음 들어요.”
하긴 숲의 요정이 해양 몬스터를 어찌 알겠는가.
“그럼 바닷속에 뭐가 있는지 알아볼 수는 있어?”
켈레모라니의 레어는 호수 속에 있었고, 아리아니가 자유자재로 드나들었다는 것을 상기한 물음이다.
“바다는 짠물이잖아요.”
“그래.”
“그럼 못 들어가요.”
“……!”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현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때였다. 마스트 꼭대기에 올라가 있던 견시수가 고함을 지른다.
“크라켄이다! 좌전방 1㎞ 지점에서 다가오고 있다!”
견시수의 외침에 일제히 좌 전방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곳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물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현수는 배를 둘러보았다. 다른 것은 다 고정되어 있지만 컨테이너는 아니다.
“씰(Seal)!”
마법이 구현되자 컨테이너 문이 밀봉된다.
“고든 선장, 모두 선실로 대피시키게!”
“…네, 알겠습니다.”
현수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인 고든이 크게 소리를 지른다.
“모든 선원은 들어라! 마탑주님의 명이시다! 모두 하갑판에 집합하라! 예외 인원 없으니 전원 집합하라!”
선장의 명이 떨어지자 선원들은 우르르 갑판 아래로 내려간다. 크라켄은 화살이나 검, 또는 도끼로는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다. 무기가 있어도 의미가 없으니 선장의 명에 따라 갑판 아래로 내려간 것이다.
고든 선장은 갑판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 입구에 서서 마스트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견시수가 들어가면 마지막으로 들어가려는 의도일 것이다. 침몰하는 배에서 가장 먼저 탈출한 어떤 선장과는 정말 대조적이다.
“캐빈! 뭐 해, 어서 내려오지 않고? 빨리 내려와!”
고든이 고함을 지르자 캐빈이라 불린 견시수가 오른쪽을 가리킨다.
“크라켄이다! 크라켄이 다가온다! 우현 500m 지점에서 다가온다!”
“뭐야?”
놀란 선장이 우현 너머의 바다를 바라본다. 멀리서 뭔가가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크라켄의 촉수가 수면 위로 올라와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이런! 으으, 망했다! 캐빈! 어서 내려와! 빨리!”
“네, 선장님!”
캐빈은 원숭이처럼 밧줄을 타고 재빠르게 내려온다.
“선장님, 먼저 발견한 크라켄, 엄청나게 커요.”
“알았어. 어서 들어가.”
캐빈이 들어간 뒤 고든 선장은 현수에게 시선을 준다.
“마탑주님, 잘 부탁드립니다.”
“……!”
현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인다.
조금 전부터 마나 디텍션 마법으로 두 마리 크라켄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견시수가 먼저 발견한 놈은 배로부터 800m쯤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고, 나중에 발견된 놈은 400m쯤 떨어져 있다.
둘 다 이 배를 향해 오는 중인데 멀리 있는 놈이 훨씬 더 큰 듯싶다.
“속전속결로 처리하지 않으면 배에 손상이 가겠군. 그럼 안 되지. 아리아니, 데이오의 징벌 꺼내 와.”
“네, 주인님.”
아공간이 열리고 데이오의 징벌이 튀어나온다. 지상에서 가장 강한 금속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폼멜에는 푸른색 초특급 마나석이 박혀 있는데 원래는 라이트닝 마법을 구현시키기 위한 것이다.
“흐음! 속전속결!”
현수는 이 검을 이실리프 왕가의 징표로 삼았다.
그래서 기존의 라이트닝 마법진을 지우고 새롭게 9서클 궁극 마법인 라이트닝 퍼니쉬먼트를 인챈트시켰다.
이게 시전되면 검을 중심으로 5m 이상 떨어진 곳으로부터 200m 이내의 범위까지 마법이 구현된다.
125.521㎡이니 약 0.125㎢이다. 이 면적에 떨어지는 벼락의 수는 약 1,000만 개다.
1㎡당 100개 정도이니 산술적으로 따져보면 100㎠당 하나이다. 가로세로 10㎝짜리 사각형 하나에 번개 하나가 떨어지는 셈이다.
이것을 인챈트시켜 놓고 한 번도 시험해 본 바 없다.
지금이 아주 좋은 기회인 듯싶기에 비릿한 조소가 입가에 번진다. 먹이를 찾았다고 죽기 살기로 다가오는 크라켄이라는 놈이 어떤 운명이 될지 짐작되는 때문이다.
‘덩치가 제법 크니 미리 준비해야겠지?’
“플라이!”
현수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아오른다.
그 상태에서 배보다 조금 더 앞으로 나간다. 자칫 배에 손상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컨테이너에 갇힌 세 여인은 유리창을 통해 현수가 바다 위 허공에 머물러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마법사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바 있지만 실제로 사람이 하늘에 떠 있는 건 처음 보았기에 다들 눈을 크게 뜨고 있다.
이들 셋은 크라켄이 다가온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문을 열려고 했지만 요지부동인지라 포기하고 창문 밖으로 도망치려 하다 이 모습을 본 것이다.
창문을 열려고 애썼지만 어떻게 여는지 알 수 없다. 아무리 잡아당기거나 밀어도 꼼짝도 않는다.
창호 중앙 부위에 있는 이상한 모양의 쇳덩이가 무엇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이다. 게다가 창문 밖엔 굵은 창살이 박혀 있다. 유리창이 열려도 나갈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애슐리! 마탑주님 좀 봐! 정말 멋있어!”
“그래! 아, 저분이 내 남자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게. 저분 품에 안겨봤으면 소원이 없겠어.”
애슐리와 보나, 그리고 캐롤은 멍한 시선으로 현수를 바라보고 있다. 같은 순간, 현수는 점점 다가오는 크라켄에게 시선을 주고 있다.
“엄청 크군.”
전에 잡은 200m짜리가 새끼로 보일 정도로 큰 놈이 다가오고 있다. 몸집만으로 비교하면 500m는 넘을 듯하다.
‘저놈이 저렇게 큰데 저쪽에서 오는 놈은 대체 얼마나 큰 거야? 그나저나 오징어의 급소가 어디더라?’
크라켄은 지구의 오징어와 같은 두족류이다. 머리에 발이 달렸다는 뜻이다.
오징어의 급소는 두 눈 위쪽의 중앙 부위이다. 위쪽이라 함은 다리가 있는 반대편을 이른다. 이곳을 찌르면 몇 번 꿈틀거리다 움직임이 멈춘다. 오징어의 급소인 셈이다.
낙지 역시 연체동물문 두족강에 속한다. 이런 종류의 신경 분포는 ‘뇌―신경계―다리 근육’으로 연결되어 있다.
칼로 다리를 자르게 되면 다음과 같이 된다.
뇌 ↔ 신경 /절단/ 신경 ↔ 다리근육
다리가 잘렸으니 뇌로부터의 명령은 전달되지 못하지만 신경은 그대로 존재한다. 그런데 잘릴 때 신경이 자극을 받았기에 이에 반응하여 다리가 꿈틀거린다.
잘렸다 하여 세포가 곧바로 죽는 것이 아니므로 살아 있는 것처럼 반응하는 것이다.
현수는 다가오는 크라켄 또한 두족류이므로 뇌가 있을 부위를 가늠했다. 그곳에 손상을 입히면 다리를 일일이 잘라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크라켄의 속력은 상당히 빨랐다. 400m라는 거리를 금방 좁히고 순식간에 다가왔다. 배를 노리고 있기에 허공에 있는 현수는 발견하지는 못한 듯싶다.
촤아아아! 츄아아아아아악―!
녀석이 배를 휘감기 위해 촉수들을 수면 위로 들어 올리자 집채만 한 파도가 친다.
그리고 허연 촉수들이 쭈욱 뻗어간다. 놔두면 단번에 배를 휘감고 힘을 줄 것이다. 그러면 검은 별의 전설호는 부서지거나 침몰하게 된다.
“라이트닝 퍼니쉬먼트!”
데이오의 징벌로 녀석의 몸통을 가리키자 순식간에 엄청난 빛의 향연에 벌어진다.
번쩍, 번쩍, 번쩍! 번쩍, 번쩍, 번쩍―!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케에에에엑! 꾸와아아아악! 촤라라라라라! 꾸에에엑!
검은 별의 전설호를 집어삼키려 내뻗은 촉수들이 일제히 오므라든다. 전기 자극에 의한 자연스런 현상이다.
“쳇! 바다라 그런가?”
어마어마한 벼락이 전신에 내리꽂혔지만 전기의 특성상 금방 바다로 흘러든 듯하다.
느닷없는 번개에 놀라 잔뜩 웅크린 크라켄은 허공의 현수를 발견했는지 촉수를 뻗어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