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1
철저하게 지워 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비워진 권력의 공백은 전부 마법사들로 채워졌다. 그리곤 마법사 특유의 괴팍한 성품만큼 잔인한 방법으로 백성들을 다스렸다.
세금은 수확량의 70%이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눈알을 뽑거나 팔다리를 분질렀다.
목숨을 빼앗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가축과 동급이었다.
이에 반발한 기사들의 맹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30년에 걸친 대대적인 토벌 끝에 지리멸렬해 버렸다.
처음부터 한데 뭉쳐 저항했다면 어쩌면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각자 다른 나라에 속해 있었고, 각기 다른 주군을 모시던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산발해 있던 기사들은 차츰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마인트 대륙은 늙은 호박과 같은 모습이다. 기다란 꼭지의 하부엔 동서를 가로지르는 높은 산맥이 형성되어 있다.
험준하고 몬스터들이 우글거리기에 육로는 없다.
그 끝이 바로 이곳 헤르마이다.
마인트 어로 ‘꼭지’라는 뜻이다.
마법사에 대항하던 기사들은 배를 타고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어부들의 도움을 얻어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런데 전투에서 죽은 동료가 데스나이트가 되어 공격하는 상황이 빚어지자 전의를 상실했다. 차마 죽은 동료의 시신에 검을 휘두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들은 손에서 검을 놓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반항이 무의미할 정도로 전력 차가 커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대륙에 남은 가족들이 극심한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상당한 수가 마법사들에게 끌려가 살아 있는 마법 재료가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목숨이 사라졌다.
그렇게 로렌카 제국은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마법사들이 모든 것을 차지한 제국이 완성된 것이다.
사람들은 피바다 위에 세워진 제국이라 하여 ‘블러드 엠파이어(Blood Empire)’라 일컫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시절, 마법사들이 죽기 시작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팔팔했는데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다 싸늘한 시신이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마법사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유행성 뇌척수막염’으로 짐작된다. 병에 걸린 자들이 고열과 두통, 그리고 구역질과 목이 뻣뻣해지는 증상을 호소한 것이 그 증거이다.
지구에선 증세를 완화시키는 대증요법으로 사망률을 줄일 수 있었겠지만 로렌카 제국은 의학이 발달된 곳이 아니었다.
힐링과 큐어, 그리고 컴플리트 힐이나 리커버리 같은 마법으로 치료하려 했지만 다스려지지 않았다.
수막염균이 원인인데, 잠복기가 불과 2∼3일이라 마법을 쓰기도 전에 급속도로 악화된 때문이다.
이 시절, 권력을 차지한 마법사들은 문란하다 해도 좋을 만큼 난잡한 성생활을 즐겼다.
‘소돔과 고모라7)’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너도나도 미녀들을 아내와 첩으로 삼기 시작했다.
열 명은 보통이고 이십 명 이상을 처첩으로 거느리는 자들도 수두룩했다. 명분은 우수한 형질을 가진 사내의 자식이 태어나야 훗날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체력이 좋은 사내라 할지라도 매일 밤 열 명, 스무 명을 다 만족시켜 줄 수는 없다.
하여 선택받지 못한 여인들은 독수공방을 해야 한다.
그러다 욕정을 견디지 못한 여인들은 몰래 하위 마법사들과 밤을 보냈다. 일부는 서로가 서로를 만족시켜 주는 레즈비언이 되기도 했다. 그 결과 유행성 뇌척수막염이 마법사들을 휩쓸어 버린 것이다.
사인 규명에 나선 결과 키스가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유행성 뇌척수막염은 환자의 코와 입에서 나오는 물질을 직접 접촉하면 전염되니 나름 정확한 사실 규명이다.
결과를 파악한 황제는 전국에 칙령을 내려 키스를 금지했다. 그런데 그런다고 키스를 안 하겠는가?
칙령이 내려졌어도 마법사들은 무수히 죽어갔다.
하여 키스를 하면 여인이 사내에게 종속되는 법안을 반포했다. 다시 말해 키스를 하면 여자는 남자의 소유가 된다.
여인들이 적극적으로 키스를 회피하려 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자유를 잃고 억압당하기 때문이다.
그 후로 긴 세월이 흘렀지만 로렌카 제국은 그때를 잊지 않고 있다. 하여 아직도 ‘키스 금지’ 법령은 유효하다.
현수는 파티마로부터 마인트 대륙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현재 머물고 있는 이곳 헤르마는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중앙의 입김이 가장 약한 곳이라 한다. 하여 다른 곳에 비해 자유스럽지만 통행은 엄격한 제한을 받고 있단다.
마법사, 또는 그의 휘하에서 일하는 관리가 아닌 일반인은 ‘이동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다.
제국에서 발행한 통행증이 있어야 돌아다닐 수 있다. 관리와 상인, 그리고 용병 등에게만 주어진다.
통행증은 무료 발급이 아니다. 게다가 유효기간까지 있다.
파티마는 누군가 객실에 흘리고 간 통행증을 보여주었다. 받아서 살펴보니 위조 방지를 위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쓰여 있는 내용을 읽어보니 유효기간 10년짜리인데 약 반년 정도 기간이 남아 있다.
현수는 마법사들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마나를 감출 수는 있지만 마법을 쓰면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파티마는 마법사들에 대해 아는 바가 적었다.
워낙 괴팍하고 무섭게 굴어서 그런지 아예 호기심조차 갖지 않은 때문이다.
그래도 아예 정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 헤르마엔 포탈 마법진이 있었다. 이곳을 관리하는 관리들이 있는데 가장 높은 자의 성명이 라쉬드이다.
휘하엔 여섯 명의 마법사와 병사 200명이 있다.
이들의 임무는 포탈 마법진을 이용하여 아르센 대륙으로 이동하는 외출자들의 출입을 관리하는 것이다.
외출 명령서를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조달해 줄 임무가 있다.
외출자들은 아르센 대륙의 이모저모를 파악해 오는 일종의 스파이다. 약 10년에 걸친 엄격한 훈련을 통과한 자들만이 외출자가 될 수 있는데 최하가 4서클 마법사이다.
지난 100년간 은밀히 파견되었고, 거의 모두가 귀환하였다. 이들의 임무 중 하나는 아르센 대륙의 마법서를 구해오는 것이다.
이곳과 사뭇 다른 방법으로 마법을 구현시키는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장차 정복하게 될 아르센 대륙의 장단점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다른 하나는 아르센 대륙의 초특급 미녀들을 데려오는 것이다. 이곳 고위 마법사들의 요구이다.
자신들의 하렘을 보다 풍요롭게 하기 위함이다.
현수는 파티마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정보를 입수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권력의 핵심에 대한 것은 알아낼 수 없었다. 하긴 선술집 주인의 딸이 세상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원하는 정보를 얻으려면 로렌카 제국의 수도 맥마흔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새벽 무렵, 하품을 계속하던 파티마는 결국 깊은 잠에 빠졌다. 피곤한데다 술을 마셨고, 키스 때문에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새벽까지 잠도 못 자고 묻는 말에 대답해야 했기에 결국 곯아떨어진 것이다.
현수는 파티마의 기억 가운데 자신과 관련된 것들을 지웠다. 메모리 일리머네이션 마법을 쓴 것이다.
“흐으음!”
현수는 턱을 괸 채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았다.
로렌카 제국은 마법사들이 장악한 나라이다.
이 대륙에 기사가 얼마나 많았는지는 몰라도 단숨에 휩쓸었다면 그 능력이 결코 허접하진 않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정보 획득이 되지 않았으니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될 것 같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아르센 대륙에 와서 몇 번 느껴보지 않은 기시감이다.
‘흐음! 뭔가가 있다는 거네. 그렇다면 일단 준비할 건 해야겠지? 뭐부터 해야 하지?’
우선 조금 더 정보를 얻어야 한다.
용병이나 상인이 많으니 그들을 통하면 파티마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전혀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은 이실리프 마탑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으니 마탑주라는 신분도 소용없다.
올웨이즈 텔 더 트루스 같은 자백 마법을 쓰면 되지만 저어된다. 포탈을 관리하는 마법사가 몇 서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나 유동을 완벽하게 감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턱을 괸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 뇌리를 스치는 상념이 있다.
“참, 내가 제 시간 내에 돌아가지 못하면 미국과 일본, 그리고 지나와의 금괴 거래에 문제가 생기는군. 일단 그것부터 정리해 놓고 와야 해.”
10서클 마법사가 되었지만 만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서둘러 인적이 드믄 곳을 찾았다.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스르르 사라진다. 마인트 제국에서 지구로 향한 첫 번째 차원이동 마법이 시전된 때문이다.
현수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을 두리번거리는 인영들이 있다.
“우마르! 찾았나?”
“여깁니다! 마나 유동의 근원지를 찾았습니다, 샤림!”
현수가 텔레포트한 자리를 찾아온 사내들은 포탈을 관리하는 마법사들이다.
트랜스퍼 디멘션은 최고위 마법이다.
엄청난 양의 마나가 소모되는 마법이기에 마나 유동을 완벽히 감출 수 없어 꼬리를 잡힌 것이다.
“모두들 흩어져 주변을 샅샅이 뒤진다! 실시!”
“실시!”
샤림이라 불린 사내의 명이 떨어지자 다섯 명의 마법사와 200명의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수색 작업을 한다.
결코 평범한 움직임이 아니다. 한국으로 치면 육군 2사단 노도부대 수색대원 수준이다.
* * *
킨샤사 저택 옥상에 나타난 현수는 의복부터 갈아입었다. 그리곤 곧장 서재로 내려갔다. 연희는 잠들어 있을 것이다.
컴퓨터를 부팅시키곤 편지를 작성했다. 모두 네 통이다.
하나는 게리 론슨에게, 다른 하나는 왕리한에게, 그리고 나머지는 가와시마 야메히토와 민주영에게 보낼 것이다.
가장 먼저 게리 론스에게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미스터 론슨에게.
인도받은 것은 무사히 잘 가져갔는지요?
추가로 체결한 구매 건의 일정을 맞추기 위해 당분간 금광을 비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인도하기로 한 금괴를 약속된 날, 약속된 장소에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없더라도 알아서 가져가십시오.
매번 성분 조사를 하여도 좋으며, 수량이 확인되면 인수했다는 확인서를 [email protected]으로 보내주십시오.
아울러 구매 대금은 전에 논의된 대로 분산 송금을 당부드립니다. 좋은 날 또 뵙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이실리프 그룹 회장 김현수.
추신) 추가 구매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조촐하나마 선물을 보내고자 합니다. 귀하의 계좌번호를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왕리한과 가와시마 야메히토에게 보낼 편지도 작성했다.
몽땅 선금으로 받기로 했으므로 송금하라는 것을 뺀 나머지 내용은 비슷하다.
날이 밝으면 전화를 걸어 주소나 이메일 주소를 물어 보내면 된다.
민주영에게 보낼 것은 어느 계좌로 얼마의 돈이 입금될 것이니 각각의 자치령 개발 자금으로 사용하라는 내용이다.
편지 작성을 마친 현수는 게리 론슨 등에게 금광이라고 소개한 동굴로 이동했다.
먼저 팔레트를 꺼내고 그 위에 정해진 날짜와 시간, 정해진 장소로 보내는 마법진을 그렸다.
현수가 창안한 인터벌 텔레포트(Interval teleport) 마법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들의 생일선물을 정해진 날짜에 보내기 위해 만든 것인데 유용하게 쓰일 모양이다.
『전능의 팔찌』 46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