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3
다행히 사고가 난 곳은 아무 데도 없다. 그리고 계열사 전부 아주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다.
하긴 빚은 하나도 없고, 지분의 100%가 현수에게 있는 회사가 대부분이니 경영권 다툼 같은 불미스런 일이 벌어질 이유도 없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모든 계열사와 통화를 마쳤다.
“흐음! 이 정도면 된 거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현수의 앞에는 뭔가가 잔뜩 메모된 다이어리가 놓여 있다. 계열사 관계자들과 통화한 내용을 꼼꼼하게 메모한 것이다.
기지개를 켜곤 연희의 방으로 갔다.
“산책 어때?”
“호호, 좋아요.”
발딱 일어난 연희는 챙 넓은 모자를 챙겨 든다. 오후의 햇살이 제법 따갑기 때문이다.
현수는 연희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다정스레 저택과 호수 주위를 돌며 산책 겸 데이트를 했다. 둘은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느냐를 이야기했다.
현수는 문득 생각난 어떤 강 씨 이야기를 해주었다. 연희의 성이 강 씨인 때문이다.
어느 봄날, 경주의 어떤 강 씨 집안에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다. 아이의 부친은 어떤 이름을 지을까 고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아지랑이가 눈에 뜨였다.
참고로 경주에선 아지랑이를 아지랭이라 한다.
하여 큰 녀석에겐 ‘아지’, 작은 녀석이 ‘랭이’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지랑이처럼 솟아올라 큰 인물이 되라는 뜻이다.
몇 년 후, 집 앞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이 울면서 들어왔다. 이유를 물으니 이름 때문이라고 한다.
큰 녀석의 이름은 강아지, 작은 녀석은 강랭이인지라 아이들이 놀려댄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연희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환한 웃음이 너무도 예뻐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뜨겁고 진한 키스를 나눴다.
연희는 임신한 것이 너무나 좋다며 매우 행복해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저택으로 돌아온 현수는 손수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꼬챙이에 절인 고기와 야채를 꽂아서 숯불에 구워 만든 샤실릭과 토마토소스와 고기를 넣어 끓인 스프 솔랸카, 그리고 밀가루 피(皮)에 고기, 생선, 양파, 버섯, 곡물, 딸기 등으로 속을 채워서 구워낸 피로그가 메뉴였다.
이리냐의 모친이 이곳에 머물 때 여러 번 만들어 주었던 것이라 연희는 아주 맛있다며 여러 번 청해서 먹었다.
밤이 되어 침대에 들었다. 팔베개를 해주니 연희는 이내 쌕쌕거리며 곯아떨어진다.
현수는 모처럼 한가하게 보낸 오늘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으면 더 좋았겠으나 마인트 대륙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흐음! 가야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볼 건 알아봐야 하니까. 명색이 10서클 마법산데 조금 움츠러들었던 것 같아. 그런데 내가 왜 그랬지?”
저택 옥상에 오른 현수는 마인트 대륙의 복식으로 의복을 갈아입었다. 그리곤 차원이동을 준비했다.
팔뚝에 마나를 불어넣으니 전능의 팔찌가 보인다.
차원이동에 필요한 마나를 공급해 주는 두 개의 검은 마나석은 새까맣다. 마나가 완충되었음을 뜻한다.
“참, 깜박했네. 아공간 오픈!”
아공간에 있는 데이오의 징벌을 꺼내 보았다.
폼멜엔 장식처럼 초특급 마나석이 박혀 있는데 아직 마나가 차오르지 않은 듯 뿌연 색이다.
“흐음! 도착하면 이것부터 어떻게 해야겠군. 그나저나 이걸 쓸 일이 없어야 하는데. 쩝!”
데이오의 징벌을 다시 아공간에 넣었다.
이제 지구의 일은 잊어야 한다.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으니 자신이 자리를 비워도 잘 돌아갈 것이다.
각종 사업에 필요한 돈은 충분하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지나와 로스차일드로부터 충분히 뜯어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막대한 돈이 들어올 것이다.
그것은 미국과 일본, 그리고 지나와 로스차일드가 다른 나라, 혹은 힘없는 사람들로부터 뜯어낸 액수와 비슷할 것이다.
핵심은 민주영과 이은정이다.
둘만 잘해주면 의도한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지현과 연희, 그리고 이리냐도 지켜보고 있으며 여차하면 달려들어 회사 일을 보도록 해놓았다.
현수는 지구에서 미진한 점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짚어보았다. 그리곤 마인트 대륙의 좌표를 확인했다.
이제 차원이동할 장소는 아르센이 아니라 마인트이다.
“마나여, 나를 마인트 대륙으로!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릉―!
킨샤사 저택에 존재하던 현수의 신형이 스르르 사라진다.
* * *
“왔군.”
멀리 ‘뿔난 양의 엉덩이’라는 괴상한 이름을 가진 여관 겸 선술집이 보인다.
이곳은 마인트 대륙 북단에 위치한 자유 영지 헤르마이다.
슬쩍 시간을 보니 여명이 아니라면 어둑어둑한 저녁이다. 이때 누군가의 음성이 들린다.
“이봐, 엊저녁에 파티마와 내기해서 이긴 친구는 어떻게 되었대? 키스는 한 거야?”
“친구들이 밤새 주점에 있었는데 아침에 사라졌대.”
사내가 둘인데 하나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다른 하나는 작고 뚱뚱하다.
“키스는 했대? 그게 궁금한 거야.”
“그거야 모르지. 그런데 다들 못했을 거라고 해.”
키 작은 사내의 말이다. 이에 큰 녀석이 묻는다.
“왜? 내기에서 이겼는데 그냥 놔뒀다고?”
“그래, 파티마가 취해서 토한 데 엎어졌대. 너 같으면 토한 여자 입술에 키스하고 싶겠어?”
키 큰 사내가 얼른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당근 아니지. 그럼 파티마는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긴, 내기에서 졌으니 언젠가는 키스를 할 거고, 그럼 끝이지.”
“근데 그놈도 단물 다 빼먹으면 파티마로 하여금 몸을 팔게 할까? 그년 그렇게 내돌리면 얼굴 반반해서 제법 쏠쏠하게 돈을 벌 텐데. 안 그런가?”
“그래, 파티마가 몸을 판다고 하면 사내들이 줄을 설 거야. 그럼 자네도 가게?”
“그럼! 고년 때문에 내가 돈을 얼마나 많이 탕진했는데.”
“그래? 몇 번이나 도전했는데?”
“일곱 번.”
키 큰 사내의 말에 작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헐! 그럴 만하군. 아무튼 아직은 키스를 안 했나 봐. 파티마가 아직 주점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그래? 가보자. 거기 있으면 어찌 되는지 알겠지.”
사내 둘이 뿔난 양의 엉덩이로 가는 동안 현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파티마의 기억만 지운 게 실수였다. 주점에 있던 사내들 모두 내기 결과를 알고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오늘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파티마는 골이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왜 이런가 싶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하여 늘 하던 대로 씻고 장사 준비를 하기 위해 홀로 나갔다.
그런데 사람들로 꽉 차 있다. 그리고 모두들 자신의 얼굴만 바라본다. 이에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뭘 봐요? 나 처음 봐요?”
“파티마, 했어, 안 했어?”
“네? 하긴 뭘 해요?”
파티마가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사내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제 떡이 되어 기억을 잃었나 봐. 파티마, 어제 젊은 친구랑 술 내기 한 거 기억 안 나? 키스 걸고.”
“내가? 어제? 키스를 걸었다고? 내가 미쳤어요?”
“그래, 걸었어. 그리고 졌잖아. 키스했어?”
사내들은 이실직고하라는 표정으로 파티마를 바라본다.
“……!”
파티마는 어젯밤의 일을 기억해 내려 애를 썼다. 그런데 지워진 기억이 어찌 떠오르겠는가.
“몰라요. 생각이 안 나요.”
파티마의 말을 믿는 사내는 없었다.
“했네, 했어!”
“그러게. 파티마, 안됐다.”
“그 친구는 어디에 있어? 아직 2층에 있어?”
사내들은 현수의 행방을 물었다. 파티마가 기억나지 않는다며 발뺌하고 있다 생각한 때문이다.
“모른다니까요! 정말 몰라요!”
“허어! 파티마가 키스를 하고 그 충격 때문에 기억을 잃었나 봐. 안 그런가?”
“하긴, 신세를 망쳤으니……. 안됐다, 파티마!”
“그 친구가 널 언제 몸 팔기 시킨대?”
“뭐라고욧?”
파티마는 소리를 버럭 지른다. 멀쩡한 자신이 곧 창녀가 될 것처럼 이야기하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그렇잖아. 어제 그 친구, 외출자라며. 외출자들은 대개 귀족들이랑 결혼하잖아. 파타마 너는 예쁘기는 해도 평민이고. 그러니 볼 장 다 보고 나면 그때부터는 그걸 시키지 않겠어? 나 같으면 그러겠다.”
“그래, 파티마 정도면 돈이 잘 벌릴 거야. 아암!”
“파티마, 나도 갈게. 그때 잘해줘.”
“뭐라고욧? 어서 썩 여기서 나가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말아요! 어서요! 아, 어서요! 빨랑 나가요!”
파티마는 홀에 있는 사내들을 모조리 쫓아냈다.
이때 동생 야흐야가 왔다. 매일 아침 홀을 청소하는 임무를 맡은 때문이다.
“누나!”
“그래, 야흐야! 너는 알지? 누나가 어제 진짜로 술 내기를 하면서 키스를 걸었어?”
“응, 그랬어. 그리고 졌잖아. 어제 그 외출자 형아가 누나를 안고 누나 방으로 갔는데 기억 안 나?”
“……!”
파티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동생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야흐야가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처음 보는 사내와 키스를 하고 같은 방을 쓴 모양이다.
파티마는 서둘러 제 방으로 돌아가 침대와 자신의 몸을 살폈다. 첫날밤의 흔적을 찾는 것이다.
“없는데……. 아프지도 않고.”
파티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술을 만져본다. 키스를 했다면 아무리 취했어도 생생히 기억이 나야 한다.
일생이 걸린 충격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충격적이라 그런가?”
사람들은 너무 두렵거나 심히 불쾌한 일, 또는 심한 욕구 불만의 상태에 부딪치게 되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기억을 지우기도 한다.
이를 정신과에선 정신기제(精神機制)라 한다.
파티마는 이런 것도 모르면서 용케도 자신의 상태를 파악한 듯싶다.
2장 산맥을 넘어라
“정말 내가 그랬을까?”
파티마는 현수를 떠올려 보았다. 기억나는 건 처음 홀에 들어왔을 때 주문하던 그때뿐이다.
파티마는 제 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나오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홀은 손님들로 넘쳐났다.
소문이 번진 때문이다. 그간 파티마와 내기를 했다 주머니를 털린 사내들 거의 대부분이 와 있다.
신세 망친 파티마를 보러 온 것이다.
이 주점의 주인이자 주방장인 파티마의 부친은 손님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낙담했다. 딸의 신세가 걱정되어서이다.
사람들은 파티마가 나타나지 않자 신세 망친 걸 한탄하고 있다면서 축배를 들었다.
이곳도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인 모양이다.
“흐음, 퍼시발 산맥을 넘어가야 한다고 했지?”
퍼시발 산맥은 헤르마가 자유 영지일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중앙의 명령이 이 산맥에 가로막혀 전달되기 힘든 때문이다.
“배는 허가된 자들만 탈 수 있다니 할 수 없군.”
신분증이 없고 통행증 또한 없으니 배가 있어도 탈 수 없다. 몰래 승선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발각되면 앞으로의 행보에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여 산맥을 넘어 로렌카 제국의 수도 맥마흔으로 갈 마음을 품었다.
파티마는 아르센 대륙에서 데려온 여인들은 거의 모두 수도로 간다고 했다. 따라서 다프네가 그곳에 있을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쩝! 하루는 여기서 자야 하나?”
벌써 날이 어두웠기에 뿔난 양의 엉덩이로 향했다. 다른 곳으로 가도 됨에도 저도 모르게 향한 것이다.
삐이꺽―!
“와아! 드디어 왔군, 왔어!”
“……!”
문을 열고 한 발을 떼었을 뿐인데 모든 시선이 현수에게 쏠린다. 결코 원하지 않은 반응이다.
“이봐, 외출자 친구! 파티마를 데려갈 건가?”
‘으잉?’
시선을 돌려보니 서른쯤 된 장한이다. 자신의 물음에 현수가 금방 대답하지 않자 다시 말을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