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7
“흐음! 오늘 안에 정복한다. 그나저나 정상은 ―30℃ 정도 되겠지?”
해발 고도 10,000m라면 밑보다 60℃나 온도가 낮다. 산 아래가 여름이라는 게 다행이다.
한겨울에 당도했고, 그때 산 아래 기온이 ―10℃ 정도라면 정상은 최소 ―70℃이다.
영하 40℃ 이하로 내려가면 뜨거운 물을 뿌렸을 때 그 즉시 눈으로 변해 버리니 얼마나 춥겠는가!
여러 번 바디체인지를 겪어 더위와 추위를 극복한 몸이 되었지만 세포까지 금강불괴가 된 것은 아니다.
새롭게 생성되는 세포는 아직 신체에 적응된 것이 아니므로 너무 낮은 온도는 노출된 피부 세포에 손상을 줄 수 있다. 따라서 한여름인 지금 온 게 다행한 일이다.
“일단 옷을 단단히 입어야겠군.”
현수는 아공간에서 꺼낸 등산복을 꼼꼼히 챙겨 입었다. 등산화와 장갑, 그리고 모자에도 항온마법진을 부착시켰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곤 곧장 출발했다.
점심을 먹고 조금 지났을 때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4,000m 정도의 산지는 평지보다 산소 농도가 60% 정도 낮다. 중력이 줄어들어 산소를 잡아당길 힘이 약해져서이다.
그런데 무려 10,000m 높이까지 올라왔다. 점차 호흡이 가빠진다. 서둘러 하산하라는 신체 반응이다.
그래도 정상에 오른 기분은 만끽해야 한다. 잠시 쉬면서 산허리에 걸린 구름이 밀려가길 기다렸다.
휴대용 산소 캔이 있어 호흡은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그렇게 20여 분의 시간이 흐르도록 구름은 흩어지지 않았다.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장관을 못 보고 내려가면 조금 억울할 것 같다.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휘이이잉, 휘이이이잉―!
두 개의 폭풍이 생성되더니 삽시간에 충돌한다. 그러자 폭풍우의 세기가 증폭되면서 짙은 구름을 밀어버린다.
“퍼펙트 스톰!”
또 한 번 마법을 구현하자 흩어져 있던 나머지 구름마저 싹 쓸려 버린다. 그와 동시에 탁 트인 시야가 드러났다.
“우와아∼!”
저절로 나오는 감탄사이다. 너무나 멋진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지나 운남성엔 석림이라는 것이 있다.
카르스트로 형성된 기암괴석 봉우리들이 마치 숲을 이루고 있는 듯한 지형이다.
현수의 눈앞엔 수천, 수만 개의 거대한 돌기둥이 다양한 모습으로 치솟아 있다.
운남성의 그것은 일반적으로 5∼10m인데, 가장 높은 것도 30∼40m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거대한 돌기둥들은 그것을 완전히 압도하고도 남는다.
가장 낮은 것도 100m를 훨씬 넘는 듯하다. 대부분이 300m 이상인데 500m를 넘기는 것도 상당히 많다.
둘레도 훨씬 굵어 100∼300m 정도인 듯싶다.
“휴우, 텔레포트를 안 쓰길 잘했네.”
산에 오르다 너무 힘들을 때 ‘그냥 마법을 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산소탱크 없이 두 발로 정복한다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하여 현재의 좌표를 기준으로 산 넘어 저쪽의 좌표를 짐작으로 찍으려 했다.
그런데 그랬다면 바위 속으로 텔레포트되는 불상사를 겪을 뻔했다. 그랬다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현수는 한참을 정상에 머물렀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장관을 바라보며 감탄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 이제 가야지.”
마냥 경치만 보고 있을 수 없기에 천천히 걸어 하산을 시작했다. 당연히 등산보다 쉽다.
빙벽이 나오면 거침없이 자일(Seil)을 썼다. 떨어져도 플라이 마법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기에 과감하게 했다.
저녁나절이 되었을 때 7,000m 고지에 당도했다.
컨테이너를 꺼내 결계를 치고 들어가 10서클 마법을 연구했다. 물론 타임 딜레이 마법이 걸려 있다.
오후 8시쯤 시작된 연구는 다음 날 새벽 6시까지 이어졌다. 내부 시간으로 75일간이나 몰두한 것이다.
하지만 원하던 성과는 없었다.
대신 새롭게 구상하던 대인 마법인 다이아몬드 마법과 렁스 버스터, 멀티 스터리지, 그리고 인사이드 애로우와 아이스 니들 마법은 웬만큼 틀을 잡았다.
완성된 것이 아닌지라 아직 실전 사용은 불가능하다.
30명의 9서클 마스터와의 심상 대결은 10전 10패로 끝났다. 현수에게 10서클 마법이 없어서이다.
같은 9서클 마법이지만 현수 쪽이 더 강력했다. 하지만 상대는 숫자로 이를 커버했다. 당연히 이길 수 없다.
“괜찮아. 수도 맥마흔까지 가려면 시간은 많아.”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친 현수는 편한 얼굴과 마음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조급하게 마음먹는다 하여 성과가 바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느긋하게 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인 것이다.
하산은 순조로웠다. 산이 험하고 높아서 그런지 몬스터도 별로 없고 맹수 역시 거의 없는 듯하다.
“휴우! 이제 다 내려왔군.”
현수는 고개를 들어 정상을 바라보았다. 자욱한 운무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 내가 저길 밟은 최초의 인간일 거야.”
정상은 전문 등반가들도 오르기 힘든 곳이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체감온도가 ―50℃인데다 눈보라가 심해서 시야도 좋지 않은 때문이다.
하여 현수는 자부심 어린 시선으로 정상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가까운 데 마을이 있을 것 같지가 않네.”
아르센 대륙도 청정 지역인데 이곳은 거기보다 더한 듯싶다. 그러고 보니 마나 농도도 조금 진한 것 같은데 왠지 이질적인 느낌이다.
아마 다른 대륙이라 이런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흐으음!”
코를 벌름거려 냄새를 맡아보았다.
연기 냄새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다.
여름이긴 하지만 음식을 만들려면 불을 피워야 하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연기가 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인가가 있다면 연기 냄새가 섞여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여긴 인적이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내일은 볼 수 있으려나.”
현수는 컨테이너에서 하룻밤을 더 보냈다. 모처럼 야영하는 기분을 내려 바비큐 세트를 꺼내 소시지 구이를 즐겼다.
기분 좋게 맥주도 몇 잔 마시며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지현에게’와 ‘첫 만남’도 불렀다.
본인이 생각해 봐도 멜로디가 너무나 좋은 노래들이다.
짹, 짹, 짹―!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현수는 느긋하게 샤워부터 했다. 그리곤 아침도 챙겨 먹었다.
오랜만에 라면을 먹으니 맛이 아주 좋다.
“조금 짰나? 그나저나 오늘은 좀 달려볼까?”
대륙의 중심부에 수도가 있다고 하니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곤 아주 빠른 걸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를 향해 직선 코스를 잡은 것이다.
숲이 울창하고 산과 계곡도 많았지만 10서클 마법사에겐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 결과 저녁나절엔 연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흐음! 드디어…….”
이곳까지 오는 동안 여러 번 텔레포트 마법을 쓸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다. 곳곳에 석림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수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가급적 빨리 맥마흔에 당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볼 건 다 보았다. 하긴 그랜드 마스터의 동체시력을 가졌으니 그럴 만도 하다.
현수가 이곳 경치를 보고 느낀 점은 대단히 아름답다는 것이다. 아르센 대륙과 마인트 대륙의 모든 곳을 돌아본 것은 아니지만 이곳이 더 낫다는 느낌이다.
기암괴석이 즐비한 절벽과 울창한 수림, 오염되지 않은 개울과 강, 그리고 깨끗한 공기와 맑은 하늘이 널려 있다.
예상외로 몬스터의 숫자가 적은지 사슴이나 노루 같은 짐승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장면도 많이 보았다.
물론 표범이나 샤벨타이거 같은 맹수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 수효는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저긴가?”
울창한 숲을 벗어나자 탁 트인 평원이 드러난다.
그리고 멀리 시커먼 성벽이 솟아 있다. 떨어진 거리를 감안해 보면 성벽의 높이는 15m쯤 되는 듯싶다.
현수는 파티마로부터 얻은 통행증을 꺼내서 확인했다.
“카리미 구르센. 그러고 보니 파티마도 평민이라고 했는데 성이 있네. 이곳 사람들은 다 그런가?”
아르센에선 귀족만이 성을 가졌는데 조금 이상하다.
하여 고개를 갸웃거린 현수는 통행증을 갈무리한 후 복색을 살폈다. 로브와 비슷한데 활동에 편하도록 소매가 좁다.
아르센에서는 보지 못한 복식이다.
‘뭐, 동네가 다르니까.’
나라마다 전통 의상이 다른 세상에서 살다 왔기에 그럴 수 있다 생각한 현수는 천천히 성문 앞으로 갔다.
“멈춰! 통행증 제시!”
“여기 있수.”
짐짓 시니컬하게 통행증을 건네자 슬쩍 살펴보곤 고개를 갸웃거린다.
“용병 아닌가?”
“용병 맞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슨 일 겪었나?”
“네? 아, 네. 조금 곤혹스런 일이…….”
“알았다. 통과!”
위병은 긴말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슬쩍 한 걸음 비켜선다.
말을 마친 위병은 준비된 서류에 카리미 구르센이란 이름을 기록한다. 누가, 언제 이곳을 드나들었는지를 기록하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다.
“수고하슈.”
통행증을 건네받은 현수는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건축양식 또한 아르센과 다르다.
아르센 대륙의 집들은 지붕의 경사가 완만한데 이쪽은 급하다.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림을 의미한다.
눈은 많이 오는데 지붕의 경사가 완만하면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에 눈이 엄청 많이 오나 보군.’
지붕의 처마는 약간 길고 우데기의 흔적이 보인다.
우데기란 울릉도의 투막집에서만 보이는 벽의 형태로 눈보라와 비바람, 햇빛 등을 막기 위해 집채에 설치한 울릉도 특유의 외벽이다.
이게 있음은 겨울철에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눈이 온다는 뜻이다.
“그렇군.”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그러다 선술집 겸 여관이 분명한 건물을 보게 되었다.
“뭐야? 훔친 밀 포대에 핀 한 송이 꽃? 무슨 여관 이름이 이래? 하여간 이 동네는…….”
파티마가 일하던 여관은 ‘뿔난 양의 엉덩이’였다. 그 이름 또한 괴상하다 여겼는데 이건 더 하다.
“뭐, 음식만 맛있으면 되지.”
여관으로 향하는데 그 옆 건물의 간판이 보인다. 조금 전엔 사각이라 보이지 않던 것이다.
“헐! 발정 난 고양이의 콧구멍? 거, 이름 한번 참.”
피식 웃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이다.
현수가 발을 들여놓은 건 훔친 밀 포대에 핀 한 송이 꽃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여관이다.
이쪽이 더 붐비는 듯하다. 사람이 많으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듯하여 이리 온 것이다.
4장 훔친 밀 포대에 핀 한 송이 꽃
삐걱―!
문을 열고 들어서니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대략 30여 명이다. 자리에 앉자 뚱뚱한 아줌마가 주문을 받으러 온다.
“뭘 드실 거유?”
“이 집에서 제일 잘하는 걸로 주십시오. 시원한 술 있으면 그것도 한 잔 주시구요.”
파티마랑 마신 12도짜리 라덴주의 맛이 제법 좋았기에 같은 게 있을까 싶어 달라고 했다.
“2실버…….”
“여기요.”
현수는 파티마로부터 환전한 마인트 대륙 은화를 건넸다.
아줌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돈을 받고는 한마디 던진다.
“근데 이 동네 사람은 아니군요.”
“아, 네. 오늘 들어왔습니다. 여긴 처음이구요.”
“그래요? 그럼 용병이슈?”
“아, 네. 용병 맞습니다.”
아줌마는 현수의 위아래를 훑어본다.
“용병인데 옷이 왜 그래요?”
“네?”
“용병이라면 의당 삽, 곡괭이, 망치 뭐 이런 걸 주렁주렁 매달고 다녀야 하는데 왜 칼을……?”
아까 성문에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또 그러니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