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8
이럴 땐 무반응이 상책이다.
“여기 오다 험한 일 당했수?”
“네? 아, 네. 조금…….”
말을 하며 슬쩍 아줌마의 시선을 따라 실내를 훑어보았다.
저쪽에 족히 60은 넘은 사내가 앉아 있는데 등 뒤에 삽과 곡괭이가 매달려 있다.
허리춤엔 망치가 걸려 있는데 몹시 피곤하다는 표정이다.
‘여기 용병은 저런 차림을 해야 하나? 근데 용병이 웬 삽과 곡괭이지? 저걸로 어떻게 몬스터들을 상대해?’
현수가 이런 생각을 할 때 아줌마가 말을 잇는다.
“여기서 잘 거요?”
“네? 아, 그럼요. 방도 하나 부탁합니다.”
“그럽시다. 숙박비 대신 내일 자고 일어나면 우리 집 지붕이나 좀 손봐줘요. 저쪽에서 물이 새니까.”
“네?”
아줌마가 손짓하는 곳을 보니 정말 물이 샜는지 흥건하게 젖어 있다.
“그쪽 용병이라며? 용병더러 집수리해 달라는데 뭐 잘못되었수? 아! 비용이 부족해서? 그럼 내가 안주 한 접시 더 주지. 그걸로 퉁쳐요.”
말을 마친 아줌마는 살찐 궁둥이를 흔들며 주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현수는 ‘이건 뭐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여긴 용병이 집수리를 해? 뭐야, 대체?’
현수는 어리둥절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곧 음식과 술, 그리고 닭튀김 비슷한 음식이 나왔다.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주위의 대화를 들었다. 특히 삽을 등에 멘 채 술을 마시고 있는 장년인의 테이블에 집중했다.
같은 용병인 듯싶어서이다.
‘근데 저렇게 늙은 용병이 어떻게 몬스터들을 상대하지?’
다음은 현수의 귀에 들린 용병들의 대화 내용이다.
“휴우! 자네 힘들겠어. 어떻게 하지?”
“이만 은퇴할까 싶네.”
“왜? 아직 일할 수 있는 나이인데. 혹시 자네, 이번이 세 번째 거절인 건가?”
60이 넘어 보이는 사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젊었을 때 함부로 거절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닐세. 그건 거절할 만한 일이었어. 우리가 아무리 용병이라 하지만 어떻게 그런 더러운 일을 하겠나. 안 그래?”
“그렇지. 사육 오크들의 분뇨를 푸라니. 한두 마리도 아니고. 그건 너무한 일임이 분명했네.”
“맞아. 그 일은 나라도 거절하겠네.”
“휴우! 용병도 아니면 이제 뭐 해서 먹고살지? 모아놓은 돈도 얼마 안 되는데. 이런 줄 알았으면 술이라도 덜 마실 것을……. 어휴! 내 신세 참…….”
사내는 본인의 신세가 한심한지 말을 잇지 못한다.
‘뭐야? 여기에서의 용병은 몬스터나 강도로부터 의뢰인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떠돌이 일꾼인 거야?’
현수의 이런 생각은 사실이다.
마인트 대륙에선 대가만 치를 수 있으면 아무나 불러서 일을 시킬 수 있는 존재가 용병이다.
몬스터 구축이나 상단 호위 등의 일은 마법사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용병은 용역이나 다름없다.
통행증의 유효기간은 10년으로 정해져 있는데 그 기간 중 세 번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통행증에 표시가 된다.
누적하여 세 번 거부하게 되면 통행증의 효력은 즉시 사라진다. 대신 주민패를 받는다.
거주이전의 자유를 잃었으니 눌러앉아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급적 한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취한 조치이다.
마법사의 제국이 만들어진 이후 엄청난 수의 유민이 발생하였다. 새롭게 영주가 된 마법사들이 말도 안 되는 수탈과 잔인한 학정을 일삼은 때문이다.
이를 골치 아프게 생각한 황제는 모든 유민에게 통행증을 발부했다. 용병이라 불렀지만 용역으로 써먹기 위함이다.
“휴우∼!”
늙은 용병은 신세 한탄을 하며 술을 마셨다. 현수는 내일 이 집 지붕을 고쳐줘야 한다.
그러려면 연장이 필요하기에 늙은 용병으로부터 헐값에 삽과 곡괭이, 그리고 망치 등을 샀다.
평생의 손때가 묻은 공구의 가격은 5실버이다. 이곳도 철의 값이 매우 비쌈을 짐작할 수 있는 가격이다.
식사를 마치곤 슬슬 바깥을 둘러보았다.
마을은 아르센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대장간, 여관, 주점, 상단, 마법상점 등이 있다.
그중 서점이 있기에 얼른 들어가 보았다. 서점이라 해봐야 불과 10여 평인데 책도 많지 않았다.
이것저것 둘러보다 마인트 대륙어라 쓰인 책을 펼쳐보았다. 자음과 모음을 합쳐 32개 글자이다.
워낙 두뇌가 뛰어나기에 쓱 한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이곳의 언어에 대한 대략적인 지식이 습득된다.
내친김에 마인트 대륙어 정복하기라는 책이 있어 펼쳐보았다. 일종의 문법책이다.
별로 어렵지 않기에 금방 이해했다.
서점 주인이 눈치를 주기에 ‘마인트 대륙의 역사’라는 제목이 붙은 제법 두꺼운 책을 샀다.
이곳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온 책을 가지고 여관으로 돌아오자 아까 주문을 받던 뚱뚱한 아줌마가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어라? 용병이 글도 읽을 줄 아나 보네?”
“아는 만큼 보이거든요.”
“그래? 그럼 이것 좀 봐주겠수?”
“네?”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주방으로 들어가 뭔가를 들고 온다. 그리곤 이 층의 방으로 데리고 간다. 현수가 숙박할 룸이다.
“이것 좀 봐줘요. 난 글씨를 몰라서…….”
양피지에 쓰인 건 차용증이다.
≪ 차 용 증 ≫
일금 : 8실버 50쿠퍼
상기 금액을 로렌카 제국력 329년 4월 2일에 월 3리의
이자율을 적용하여 1년간 차용하였음.
로텐상단 하디 쿠에스
“8실버 50쿠퍼를 빌려줬다고 쓰여 있네요. 이자율은 월 3리이고요. 로덴상단의 하디 쿠에스라는 사람이 빌려간 사람 맞습니까?”
“얼마?”
“8실버 50쿠퍼요.”
갑자기 아줌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에에? 8골드 50실버가 아니구요?”
“네, 분명히 8실버 50쿠퍼로 쓰여 있네요.”
“이익! 이런 개 같은 잡놈이! 감히 내게 사기를 쳐?”
보아하니 글자를 읽을 줄 모름을 악용한 사기에 휘말린 듯하다. 문득 궁금하다.
“얼마를 빌려줬는데요?”
“8골드 50실버! 월 3푼 이자를 준다고 꼬드겨서……. 그 잡놈이 급하다고 징징대기에 빌려줬는데.”
“……!”
돈 빌려가 놓고 차용 금액과 이자율 모두 10분 1로 줄여서 써놓았다. 명백한 사기에 해당된다.
“돈 빌려줄 때 증인 있었습니까?”
무심코 한 말이다. 그런데 아줌마 입장에선 도와주려는 것으로 느껴졌는지 반색하며 대꾸한다.
“있지. 그때 손님들이 제법 있었거든.”
“그럼 그때 8골드 50실버를 빌려주는 것도 그 사람들이 확실히 본 거죠?”
“그, 그럼! 아래층 홀에서 하나하나 세면서 줬으니까.”
“그럼 그 사람들 찾아서 영주님에게 가보세요.”
“영주님에게?”
아줌마는 흠칫하며 물러앉는다. 영주라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두렵다는 표정이다.
‘뭐야? 여기 영주도 개차반인가?’
“거, 거긴 안 가. 아니, 못 가.”
아줌마는 체념하는 표정이 되어버린다.
8골드 50실버면 약 850만 원이다. 이 중 85만 원밖에 못 받게 되었음에도 포기하려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대체 왜 이러는가 싶지만 가만히 있었다.
“그럼 쉬어.”
반말하다 존댓말을 쓰다 뒤죽박죽이지만 그런 건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내려가 버린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린 현수는 이 동네에 대해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곧 밤이 될 것인지라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는 검은색 로브로 갈아입으려 아공간을 열었다.
이때였다.
쿵, 쿵―!
“문 열어라! 검문이다!”
“캔슬! 누구십니까?”
쿵, 쿵―!
“문 열란 말이다! 검문이다!”
“검문?”
대체 뭔 소린가 싶었지만 열라니 열어주었다.
콰앙―!
“꼼짝 마랏!”
거칠게 문이 열리자 두 명의 사내가 창을 들고 들어서며 소리친다. 거수자를 심리적으로 제압하기 위함일 것이다.
현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병사들을 헤치며 들어서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로브를 걸친 마법사이다.
“어쭈? 손도 안 들고.”
마법사는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마나 스캔!”
샤르르르―!
마법사들은 자신보다 상위 마법사라 생각되면 이 마법을 쓰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마나를 뿜어내게 되는데 상위 마법사가 독한 마음을 품으면 하위 마법사의 마나를 빼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마나 피탈 현상이라 한다.
마법사가 현수를 보고 서슴없이 마나를 뿜어낸 이유는 척 보자마자 1서클 마법사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현수는 9서클 마스터를 넘어설 때 바디체인지를 겪는 과정에서 아홉 개의 링이 하나로 결합되었다.
드래곤 하트와 같은 맥락인 휴먼 하트를 갖게 된 것이다. 유사 이래 인류 최초의 전무후무할 일이다.
사람은 심장이 하나뿐이다. 따라서 휴먼 하트도 하나이다. 이를 보고 1서클 마법사로 오인한 것이다.
현재 현수의 휴먼 하트엔 드래곤 하트에 버금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켈레모라니의 비늘에도 그만한 양이 있다.
드래곤이 1,000년간 쉬지 않고 오로지 마나 호흡에만 몰두해야 모을 수 있는 분량이다.
따라서 현수는 드래곤 하트를 두 개나 가진 존재이다. 하여 현수는 마나의 확산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다.
그러지 않으면 하루 종일 드래곤 피어를 뿜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유량이 너무 많아 조금씩은 흘러나올 수밖에 없다.
현수의 마나를 스캔한 마법사는 심장에 존재하는 마나를 감지해 냈다. 하나뿐이다. 1서클 마법사라는 뜻이다.
“뭐야? 마법사였어? 근데 왜 하찮은 용병 따위를 해?”
“네?”
“제국에 신고만 하면 평생 편히 살 수 있는데 왜 용병 따위의 일을 하느냐고.”
“아, 그거요? 제가 이제 막 그런 거라…….”
“따라와!”
마법사는 더 물을 것도 없다는 듯 등을 돌린다.
하지만 병사들이 겨눈 창까지 거둬진 것은 아니다. 여차하면 찌르겠다는 듯 삼엄한 기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둘 중 하나가 창끝을 흔든다. 마법사의 뒤를 따라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럽시다.”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앞서가던 마법사가 등을 돌리곤 째려본다.
“뭐, 그럽시다? 이게 어디서 감히……. 하늘같은 선배 마법사에게 방금 ‘그럽시다’라고 했나?”
“……!”
현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방금 전 슬쩍 살펴보니 놈은 5서클 마법사이다. 밑에선 치고 올라오고 위에선 찍어 누르는 딱 중간계급 정도이다.
그렇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생각했다.
한편, 자신의 말에 현수가 대꾸하지 않자 잘못했음을 깨달아 그런 것이라 여겼는지 다시 몸을 돌린다.
놈이 몇 발짝을 걷도록 현수가 움직이지 않자 뒤에 있던 병사가 슬쩍 민다. 이때 앞서가던 마법사가 입을 연다.
“이제 막 1서클을 이뤄서 뭐가 뭔지 모르는 모양인데, 마법사란 말이지, 선배 알기를 하늘처럼 여겨야 하는 거야. 어떤 놈이 널 가르쳤는지 모르겠다만 내 말을 귀담아듣고 명심하도록. 알았나?”
“……!”
이번에도 대꾸하지 않자 빙글 돌아선다. 그리곤 성난 표정으로 뭐라 하려고 한다. 이때 현수가 입을 연다.
“내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말라 하셨소.”
“뭐라? 좋아! 네 스승이란 작자는 누구냐? 얼마나 대단하기에 선배를 보고도 고개를 숙이지 말라 했느냐?”
버럭 지른 노성이다.
“……!”
현수가 대답 없이 빤히 바라보자 더욱 크게 소리친다.
“어쭈? 선배가 물었는데 감히 대답을 안 해? 말해! 네 잘난 스승이란 작자가 누구냐?”
“말하면 다칠 수도 있는데 그래도 듣겠소?”
현수의 말에 놈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말해! 얼마나 대단한 작자인지 한번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