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9
놈은 아주 도전적인 눈빛으로 현수를 노려본다.
“9서클 마스터시오. 멀린이라는 이름을 가지셨고.”
“9, 9서클 마, 마스터? 그, 그럼 공작님이신가?”
놈은 갑자기 저자세가 된다. 1서클 마법사의 스승이 9서클마스터라는 걸 전혀 예상치 못한 모양이다.
“내 스승님은 공작보다 더 높소. 그런데 조금 전 놈이라 하셨소?”
실제로 멀린은 공작보다 훨씬 높은 존재이니 뻥이거나 틀린 말은 아니다.
“그, 그랬나? 미, 미안하네. 내가 자네 스승님을 몰라서…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 마음 푸시게.”
앞서가던 녀석의 눈빛이 확연히 저자세로 바뀌어 있다.
‘그런데 공작이라니? 뭔 소리지? 흐음! 알아볼게 더 있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지만 현수는 짐짓 마음 상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선배 이름은 뭡니까? 그리고 여긴 어디지요?”
“나? 나, 나는… 아이고, 이보시게. 내가 잘못했다니까. 자자,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한잔하면서 마음 푸세.”
앞서가던 마법사는 얼른 뒤로 돌아 훔친 밀 포대에 핀 한 송이 꽃이라는 괴상한 이름의 선술집으로 되돌아간다.
“이, 이 집이 생긴 건 이래도 술맛 하나는 끝내주네. 가세. 내가 한잔 사겠네.”
자신들의 상관인 5서클 마법사가 갑자기 설설 기자 창을 들고 따라오던 병사들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선다. 같이 있다가 날벼락 맞긴 싫기 때문이다.
“어라? 어찌 다시 온 거지?”
현수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뚱뚱한 아줌마가 한 말이다. 조금 전 현수는 마법사에 의해 연행되었다.
누군가 거수자로 신고하여 끌려간 것이다.
아무 죄가 없어도 본인의 신분을 명확히 증명하지 못하면 모진 고문 끝에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풀려난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아예 세상 구경을 다시 못하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 아주 멀쩡한 얼굴로 되돌아오니 의아한 표정이다.
“자, 자하라, 여기 근사하게 한상 차려.”
“네?”
“술도 안주도 이 집에서 제일 좋고 맛있는 걸로. 알았지? 계산은 내가 하네.”
마법사가 윙크까지 하자 자하라는 별일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주방으로 들어간다.
“자자, 앉으시게.”
마법사가 현수에게 자리를 권하며 앉으려 할 때 현수의 입술이 달싹인다.
“올웨이즈 텔 더 트루스!”
“……!”
뭔가 이상한 듯 흠칫거렸지만 현수가 훨씬 고서클인지라 마법사는 눈치채지 못했다. 같이 온 병사들은 감히 동석할 수 없음을 알기에 아예 선술집 안으로 들어서지 않아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듯하다.
현수가 마법을 건 것은 이곳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마법을 걸 것이라곤 예상치 못하고 있을 것이기에 허를 찌른 것이다.
현수에게 무례를 범한 5서클 마법사는 이즈라 케볼트이다.
이곳에 와서 대화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신분이 높기에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로렌카 제국이 자리 잡기 전 마인트 대륙엔 156개 국가가 있었다. 12개의 제국과 116개의 왕국, 그리고 28개의 공국이 그들이다. 물론 영토의 크기는 제각각이다.
정복전쟁이 끝난 후 초대 황제는 기존의 국가들을 통폐합한 뒤 지형에 따라 영지 분할을 실시했다. 강이나 산맥이 구획선 역할을 했다. 당연히 크기는 제각각이다.
영지 배분은 작위에 따라 이루어졌다.
가장 넓은 81개 영지는 공작에게, 차 순위 158개는 후작에게 주어졌다. 백작의 영지는 372개이고, 자작은 769개, 남작은 1,620개이다. 모두 3,000개이다.
최초로 영지가 배분될 때 공작은 전원 9서클 마스터였다.
후작은 8서클 마스터였으며, 백작은 7서클 마스터, 자작은 6서클 마스터, 그리고 남작은 5서클 마스터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대물림이 이루어졌지만 작위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대륙 전체가 일통된 상태인지라 전쟁 등으로 인한 공훈을 세울 기회가 없어진 때문이다.
게다가 마법사들의 특징인 내성적인 성향이 강해서 갈등으로 인한 영지전도 거의 없었다.
그렇다 하여 다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식량 부족, 혹은 미녀 쟁탈 등으로 인한 국지전은 가끔 벌어졌다.
어쨌든 현재는 영주가 없는 영지들이 있다.
그 숫자가 거의 세 자리 숫자이다. 연구에 몰두하느라 대가 끊긴 때문이다.
로렌카 제국법은 양자, 또는 제자에게 영지를 물려주는 걸 엄격히 금하고 있다. 하여 후사 없이 영주가 사망할 경우 황궁에서 대리 영주를 파견하여 관리한다.
애써 가꾼 영지를 다른 누군가가 차지하는 것이 싫다면 가정을 이루고 애를 낳으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후사가 없는 영지가 상당히 많았다.
자식에게 영지를 물려주는 것보다 본인의 성취가 훨씬 더 중요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 마냥 여인들을 멀리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대가 끊긴 영지가 많은 이유는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한 번 동침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매 30년마다 주인 없는 영지의 새로운 영주를 뽑는 대회가 열린다. 열심히 수련하여 서클을 올렸거나 새롭게 5서클 마스터 이상에 진입한 자들을 위한 자리이다.
예를 들면 포탈 마법진을 관리하는 마법사들이 그러하다.
마인트 대륙엔 현재 703개의 포탈 마법진이 있다.
이렇듯 많은 포탈이 필요한 이유는 너무도 험준하고 높은 산맥이 즐비한 때문이다.
게다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물살이 거센 강 등이 많아서 발달된 도로를 갖기 힘들다.
지금은 훨씬 덜하지만 예전엔 산마다 몬스터들이 우글거렸다. 오크, 오우거는 물론이고 바질리스크와 와이번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드레이크까지도 상당했다.
꾸준한 소탕 결과 현재는 그 수효가 100분의 1 이하로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위협적이다.
깊은 산속에 사는 바질리스크와 드레이크 같은 상위 포식자들은 마법사들도 감당하기 힘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마인트 대륙의 물류 대부분은 포탈 마법진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류는 국가가 유지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인이다.
그 중요도가 인정되었기에 6서클 마법사들을 파견하여 관리토록 한 것이다. 6서클이니 거의 자작급 귀족이다.
이들은 황궁이 정한 포탈 사용료를 받아 생활한다. 물류가 매우 활발한 포탈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곳도 있다.
하여 포탈을 관리하는 마법사들은 영지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영주가 되는 것과 포탈 마법진의 관리자로 있는 것의 차이가 너무도 확연한 때문이다.
어쨌거나 매 30년마다 실시되는 ‘영주 선발대회’는 두 가지 형식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가장 규모가 작은 남작령의 영주를 정하는 것이다. 새롭게 5서클 마스터가 된 자들이 각축을 벌인다.
다른 하나는 자작령 이상의 영지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전자는 토너먼트로 진행되어 순위를 정한다. 1위부터 빈 영지를 차지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진다.
후자의 경우는 조금 복잡하다.
새롭게 6서클 마스터 이상에 진입한 마법사뿐만 아니라 기존의 영주들까지 참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작령이 비어 있을 경우 후작급 이하 마법사가 참가한다. 물론 9서클 마스터가 되어야 참가 자격을 획득한다.
그렇게 하여 한 후작이 새롭게 공작으로 승작되면 그 후작이 차지하고 있던 영지의 새 주인을 뽑기 위한 대결이 진행되는 식이다.
올해는 로렌카 제국력 330년이 되는 해이다. 다시 말해 30년 만에 영주 선발대회가 개최된다.
이 대회는 조만간 수도 맥마흔에서 열릴 예정이다.
“올해는 공작령 2개, 후작령 5개, 백작령 16개, 자작령 21개, 그리고 남작령 88개의 주인이 가려지게 됩니다.”
“그래?”
“네, 유례없는 일이지요. 3년 전 가브랄 산맥의 몬스터 토벌 때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져 상당히 많은 영지가 비어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사태?”
현수가 가볍게 반문하자 이즈라 케볼트는 수다를 떨 좋은 기회를 얻었다는 듯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털어놓았다.
3년 전, 마인트 대륙 서쪽에 치우쳐 있는 가브랄 산맥에선 큰일이 벌어졌다. 갑작스레 엄청난 수의 몬스터가 인근 영지들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인근 영지들은 전부 남작령인데 영주들의 힘만으론 해결할 수 없어 중앙에 지원 요청을 하였다.
이에 상당히 많은 귀족이 파견되었다. 내전이랄지 외침이 없는 평화시기였기에 대단위 공격 마법을 연습할 기회가 없어 너도나도 지원을 자청한 결과이다.
어쨌거나 공작 6명, 후작 13명, 백작 81명, 자작 222명, 남작 691명이 토벌대가 되어 파견되었다.
이들은 이끈 건 차기 황제로 주목받는 2황자였다.
흉포하기 이를 데 없는 바질리스크과 드레이크들까지 사냥하며 기세를 올리던 중 느닷없이 화산이 폭발했다.
몬스터들은 인간보다 예민한 감각을 가졌기에 이를 감지하고 가브랄 산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이를 불규칙적인 몬스터 러시라 여겨 대규모 토벌대를 보낸 것이다.
느닷없는 분화였지만 마법사들은 침착하게 대처했다. 그럼에도 상당히 많은 수가 희생되었다.
폭심지 인근에 있던 마법사들이 그들이다.
공작 3명, 후작 8명, 백작 23명, 자작 101명, 남작 223명이 용암에 휩싸여 한 줌 재가 되어버렸다.
이들 중 상당수는 아들이 대를 이었지만 그러지 못한 곳은 졸지에 영지의 주인을 잃은 것이다.
현수는 이즈라 케볼트로부터 보다 많은 정보를 얻어냈다.
5장 절세미녀를 상으로
영주 선발대회가 벌어지면 수도의 모든 행정은 올 스톱이 된다. 대륙 각지로부터 엄청난 수의 마법사가 모여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대부분 포탈을 이용하기 때문이고, 이를 이용하려면 일차적으로 신분 확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매 대회 때마다 새롭게 영지를 갖게 되는 자들은 절세미녀를 부상으로 받는다. 마법사들은 개인의 성취를 높이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황제가 친히 내린 상이니 신임 영주들은 싫어도 그녀들을 아내로 맞이해야 하며, 반드시 자식을 보아야 한다.
아울러 훌륭한 마법사로 양성시켜야 할 의무를 가진다.
절세미녀들은 마인트 대륙에서도 선별되지만 아르센 대륙에서도 상당수 데려온다.
이곳 여인들은 99%가 흑발이지만 아르센 쪽은 다양한 색상의 머리카락이 존재한다. 금색, 붉은색, 보라색도 있으며 심지어 초록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도 있다.
젊어선 흑발이고 늙으면 백발밖에 없는 곳이니 이곳 사람들에게 있어 얼마나 신선하겠는가!
게다가 아르센 쪽엔 미의 대명사인 엘프도 있다.
하여 이곳 사람들은 아르센 대륙에서 온 여인들을 아주 색다른 미녀로 여기고 있다.
이런 연유로 외출자들은 원대 복귀할 때마다 아르센의 미녀들을 대동한다. 상납을 통한 신분 상승을 꿈꾸기 때문이다.
다프네의 경우처럼 노예로 사서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납치이다.
한번 이곳에 오면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으므로 후환 따윈 전혀 염려하지 않아도 되기에 아주 과감하다.
하여 공작가나 후작자의 영애들도 심심치 않게 실종되었다. 심지어는 공주도 사라졌고, 갓 결혼한 백작부인이 사라지는 일도 있었다.
가장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에 실종된 마카디아 납치 사건이다.
백주에 마차를 타고 가다 20여 명에 달하는 수행원 전부를 죽이고 납치해 갔다. 당시 마카디아는 세상의 빛을 다스리는 여신의 가장 강력한 성녀 후보였다.
마차를 타고 성전으로 들어가 여신으로부터 은총의 빛을 받으면 곧바로 성녀가 될 예정이었는데 그러기 몇 시간 전에 대로 한복판에서 납치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