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0
이후로 종적이 묘연했는데 바로 이곳 마인트 대륙으로 끌려왔다. 그리곤 영주 선발대회의 승자에게 하사되어 여섯 번째 부인이 되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뒷방에 처박혀 있다.
어쨌거나 아르센에서 데리고 온 미녀들은 고위 귀족들에게 상납되거나 고가로 팔린다.
다만 영주 선발대회가 시작되기 2년 전부터 데리고 오는 미녀들은 미추에 관계없이 전원 황궁에 머물도록 되어 있다.
우승자 선물은 충분히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이네. 아직 괜찮겠군.’
현수는 다프네의 신상에 별 탈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프네는 아르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절세미녀인 때문이다.
“수고했네요. 이제 돌아가도 됩니다.”
“네, 스승님 만나시면 말씀 좀 잘해주십시오.”
“그러지요.”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즈라 케볼트는 허리까지 숙여 예를 갖추곤 물러났다.
왠지 심상치 않다 여겨 멀찌감치 떨어져 현수를 살펴보면 뚱뚱한 아줌마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늘같은 5서클 마법사가 겨우 용병에게 허리까지 숙여 예를 갖추니 의아한 것이다.
이즈라 케볼트가 물러가자 슬금슬금 다가온다.
“이봐요!”
“네?”
“내일 지붕 수리하라고 한 거, 그거 취소할게요.”
“네?”
“안 해도 된다고요. 근데 그쪽, 뭐 하는 사람이에요? 평범한 용병 아니죠? 혹시 외출자?”
사실대로 말해 궁금증을 풀어달라는 표정이지만 그래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용병이에요.”
“근데 왜……?”
5서클 마법사가 허리까지 숙이느냐는 말이다.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그냥요.”
말을 마친 현수는 제 방으로 올라갔다.
마법사의 불심검문에 의해 연행되었으므로 못 돌아올 줄 알고 말끔히 치워진 상태이다.
“내일 아침까지 날 방해하지 말아요.”
“네, 알았어요.”
자하라라는 이름의 뚱뚱한 아줌마는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분명 평범한 용병은 아니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쿵―!
문이 닫히자 현수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조금 전에 얻어낸 정보들을 정리해 보았다.
조만간 영주 선발대회가 개최된다. 이게 끝나기 전에 다프네를 구하지 못하면 험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이다.
흔히들 한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을 경국지색이라 한다.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한 초선(貂蟬)이나 춘추전국시대 때 오나라 왕 부차에게 접근하여 오나라가 멸망케 한 서시(西施)가 이런 여인이다.
다프네도 충분히 이런 반열에 들 초절정 미녀이다.
그런 아름다운 여인을 그림 감상하듯 바라만 볼 사내는 없을 것이니 화를 당하기 전에 구해내야 한다.
그래야 친구가 된 라이세뮤리안에게도 면(面)이 선다.
쿵, 쿵, 쿵―!
“문 좀 열어주십시오.”
쿵, 쿵, 쿵―!
“어서요. 어서 문 좀 열어주십시오.”
“끄응! 누구지?”
날이 새도록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깜박 졸던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이즈라 케볼트 씨?”
“아, 하인스 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네, 그런데 웬일이십니까?”
“어제 범한 무례가 마음에 걸려서요. 아침 식사를 대접하러 왔습니다. 아직 식전이죠?”
“으음! 괜찮은데…….”
“어차피 아침은 드셔야 하잖아요. 내려가시죠.”
보아하니 거절한다 해서 금방 갈 것 같지가 않다.
그렇다면 이곳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찰 이유가 없다.
“그러죠. 잠시만요.”
벗어놓았던 의복을 갖추고 내려가니 자하라가 준비해 놓은 테이블로 안내한다.
“아침치곤 조금 거하군요.”
현수의 말은 공치사가 아니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은 열 명이 먹어도 될 정도로 많았다.
“제 정성입니다. 앉으시죠.”
“흐음, 그럽시다.”
자리에 앉으니 어서 먹으라고 손짓한다.
하여 이것저것 맛을 보았다. 아르센 대륙에선 볼 수 없던 음식인데 맛도 향도 괜찮았다.
기왕에 차려놓은 음식인지라 체면 차리지 않고 배를 채웠는데 맛이 좋아 그런지 과식을 했다.
“끄으윽! 잘 먹었습니다.”
“하하! 다행입니다. 차도 한잔하셔야죠?”
“…그러죠.”
“자하라, 여기 차.”
“네, 갑니다, 가요.”
뚱뚱하지만 자하라의 동작은 민첩했다.
“자, 특제 호들펜 차입니다.”
“……?”
처음 듣는 명칭이지만 내색해선 안 되기에 아무런 대꾸 없이 바라만 보자 이즈라 케볼트는 접시 위의 가루를 뜨거운 물에 넣고는 휘휘 젓는다.
“아이스! 아이스! 아이스! 드시죠.”
뜨겁던 물을 차갑게 식히곤 현수에게 건넨다. 이건 대체 어떤 맛일까 싶은 현수는 찻잔을 입에 댔다.
후루륵! 후르르륵―!
“……!”
생강엿을 물에 풀어놓은 듯한 맛이다. 달착지근하면서도 톡 쏜다.
“어, 어떻습니까?”
“좋군요. 덕분에 식사 잘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이즈라 케볼트는 아주 기분이 좋다는 듯 환히 웃는다.
“네, 수도로 가면 스승님께 말씀 잘 드리겠습니다.”
“그래주시면 저야 고맙죠. 근데 곧장 수도로 가실 겁니까? 여기 며칠 더 머무시는 건 어떨까요?”
“네? 머물러요?”
“이 근처에 볼거리가 좀 많거든요. 머무신다고 하면 식대는 물론이고 숙박비까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이즈라 케볼트는 어서 고개를 끄덕이라는 표정이다.
“에구! 말씀은 고마운데 스승님이 빨리 오라고 하셔서요.”
“그렇군요. 그럼 곧장 수도로 가실 겁니까?”
“네, 그럴 생각입니다.”
“휴우, 먼 길이군요. 부디 조심해서 가시길 바랍니다.”
“걱정해 줘서 고맙습니다.”
현수는 주변 탁자의 인물들이 보내는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꺼려졌다. 다분히 의심스럽다는 표정이다.
하긴 5서클 마법사가 한낱 용병에게 절절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어찌 평범해 보이겠는가!
식사를 마친 현수는 객실로 올라가 짐을 챙겼다.
어제 더 이상 용병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장년인으로부터 구입한 삽과 곡괭이, 그리고 망치 등을 걸머졌다.
누가 봐도 완벽한 용병의 모습인지라 슬쩍 만족에 찬 미소를 짓기도 했다.
‘훔친 밀 포대에 핀 꽃 한 송이’라는 괴상망측하고 긴 이름의 여관을 운영하는 자하라는 문을 열고 나가는 현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평범한 용병은 아닌 게 분명한데 대체 뭔가 싶은 것이다.
“흐음! 저쪽인가?”
수도 맥마흔 쪽을 바라본 현수는 곧바로 출발했다.
성문 밖으로 나갈 때에도 통행증 검사를 했는데 나가는 것이라 그런지 설렁설렁하는 듯하다.
그래도 출입자 기록 명부에 날짜와 시간, 그리고 이름을 꼼꼼히 기록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일이 없었나 봅니다. 잘 가슈.”
“그렇지요. 뭐, 수고하십쇼.”
현수는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위병의 입가에 매달려 있던 미소가 사라진다. 대신 매서운 눈빛으로 현수의 뒷모습을 살핀다.
“곡괭이는 오른쪽 어깨에, 삽은 왼쪽 어깨, 그리고 망치는 왼쪽 허리춤. 흐음, 키는 180㎝가 조금 넘는 것 같고 몸무게는 한 80㎏쯤 되겠군.”
같은 시각, 현수와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요조모조를 살핀 이즈라 케볼트는 보라색 수정구 앞에 앉아 있다.
“여기는 누라하, 여기는 누라하 영지입니다. 수도의 정보처에 거수자 관련 긴급 보고드립니다.”
“누라하는 말씀하십시오.”
“보고자 이즈라 케볼트. 5서클 마법사입니다.”
“그래? 계속하게.”
저쪽이 더 서클 수가 높은 듯 바로 말을 내린다. 이즈라는 이에 대해 조금의 불만도 없는 듯 바로 보고를 이어간다.
“이곳에 거수자가 발견되어 보고드립니다. 신장 약 180㎝, 몸무게 약 80㎏이며, 흑발에 약간 못생겼습니다. 나이는 삼심대 초반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황색 피부입니다.”
수정구에 비친 인물은 규칙에 따라 보고 내용을 기록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런데 뭐가 이상하지?”
“거수자는 1서클 마법사인데 마나 링이 이상합니다.”
“이상해? 어떻게 이상한가?”
상대편이 시선을 드는데 육십은 족히 되었을 얼굴이다.
“링이 띠처럼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작은 덩어리처럼 엉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용병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작은 덩어리라고? 크기는?”
“좁쌀보다 조금 더 컸습니다.”
“흐음, 좁쌀보다 큰 덩어리라……. 계속하게.”
상대는 신고서 내용에 호두알 크기의 마나 덩어리라 쓰려 고개를 숙인다.
“네, 거수자가 가진 통행증은 카리미 구르센에게 발급된 것으로 3급 용병입니다. 통행증 유효기간은 330년 8월 2일까지입니다.”
“카리미 구르센이라고? 잠깐만. 아, 20분 후 통신 재개할 터이니 대기하게.”
“네, 알겠습니다.”
마인트 제국의 모든 용병에겐 통행증이 발부되고 이에 대한 기록을 중앙으로 보내게 되어 있다.
상대는 이를 확인하려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다.
이즈라 케볼트는 현수가 거수자이길 간절히 바랐다. 거수자 발견 보고는 대단한 공적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로렌카 제국이 건국된 이후에도 이에 항쟁하던 존재들이 있다. 마수로부터 운 좋게 몸을 피할 수 있던 기존 국가의 귀족과 마법사들, 그리고 기사와 병사들이다.
이들은 길도 끊긴 깊은 산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곤 게릴라 전법으로 제국의 체계를 공격하곤 했다.
이들에겐 당연히 통행증이 발급되지 않았다. 신분증도 마찬가지다.
아주 가끔 약을 구하거나 특별한 물건을 찾아 산을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을 일컬어 거동수상자라 한다.
줄여서 거수자라 부르는 이들을 신고하는 자에겐 상당히 큰 상을 내린다.
노예는 평민으로 신분이 바뀌게 되고, 평민은 많은 돈, 또는 넓은 농토를 상으로 받게 된다.
가끔은 미녀가 추가로 하사되기도 한다.
제국을 유지하는 근간인 마법사들의 경우는 이보다 혜택이 더 크다. 거수자를 신고한 마법사는 현재보다 1서클이 높은 것으로 인정된다.
5서클에서 6서클로 올라가는 것보다 6서클에서 7서클로 올라가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우니 어마어마한 혜택이다.
이즈라 케볼트는 5서클 유저이다. 아직 마스터에 이르지 못해 이번에 있을 영주 선발대회에 참가할 자격조차 없다.
다음 기회는 30년 후에 오는데 그때쯤이면 나이 70이 넘게 된다. 영주가 된다 해도 영광을 누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가 되는 것이다.
만일 현수가 거수자인 것이 확실하다면 6서클로 인정된다. 드디어 5서클 마스터를 넘어서는 것이다.
게다가 영주 선발대회 때 가산점을 받게 되므로 잘하면 영지를 가진 귀족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초조한 마음으로 20분을 기다렸다.
치직, 치지직!
“누라하, 누라하 나와라.”
수정구에서 빛이 흘러나오자 이즈라 케볼트는 얼른 허리를 펴며 시선을 집중한다.
“네, 누라하의 이즈라 케볼트입니다. 말씀하십시오.”
“기록을 확인한 결과 3급 용병 카리미 구르센은 3년 전에 사망했다. 따라서 자네가 신고한 자는 일단 거수자로 의심된다. 누라하의 영주가 누구지?”
“네? 그, 그렇습니까? 이, 이곳 누라하의 영주님은 카이젠 누라하 자작님이십니다.”
“그런가? 알았다. 일단 대기하라.”
“네, 마법사님.”
이즈라 케볼트는 심장이 마구 뛰는 기분을 좀처럼 진정시킬 수 없다. 로또복권 1등 당첨을 갓 확인한 사람이나 느낄 그런 기분이다.
“아싸!”
두 주먹을 불끈 쥔 이즈라 케볼트는 터져 나오려는 환호성을 억지로 삼켰다.
그리곤 자신이 취할 바를 생각해 보았다. 거수자를 신고하고 검거까지 하면 더 큰 상을 받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영주님의 명이 떨어진 다음에 추격을 시작하면 늦는다. 남보다 한발 더 빨라야 해.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