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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1115화 (1,114/1,307)

# 1115

왠지 집요한 느낌이 들지만 내색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싼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긴장한 표정이다.

“그 전에 나도 하나 묻지요. 여러분은 대체 누구십니까?”

“우린… 로렌카 제국에 의해 멸망당한 화티카 왕국 사람들입니다. 놈들을 피해 이 근방에서 살고 있지요.”

“화티카 왕국이요?”

현수가 반문하자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330년 전에 주권을 잃은 나라입니다.”

일본에 의해 강제 합병되었던 대한제국을 떠올린 현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로렌카 제국과는 반목하는 사인가 보죠?”

“그렇습니다. 원수들에 의해 수많은 조상님께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놈들에게 굴복하는 삶을 살겠습니까? 우린 ‘반 로렌카 전선’의 일원입니다.”

사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로렌카 제국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울화통이 터지는 모양이다.

“반 로렌카 전선이라면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이 또 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대륙 각지에 흩어져 숨만 고르고 있는 중이지요. 간악한 마법사 놈들의 이목 때문입니다.”

현수 본인이 마법사라는 걸 알면서도 간악하다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 것을 보니 원한 때문에 이가 갈리는 모양이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제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을 보여달라고 하셨나요?”

“무례인 줄 알지만 그런 게 있으면 보여주십시오.”

“흠! 그러지요.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현수는 아공간에서 지갑을 꺼내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었다.

정작 지구에선 거의 꺼낼 일이 없었는데 이곳에선 자주 꺼내 쓴다는 느낌이다.

“이건 제 신분증입니다.”

현수가 건넨 주민등록증을 받은 사내는 가로세로 2.5㎝ 안에 정교하게 그려진 인물화를 보곤 깜짝 놀란다.

어떻게 실물과 똑같이 그렸는지 이해되지 않는 때문이다.

지구에서도 갑작스런 미술 사조의 변화가 일어난 때가 있었다. 르네상스(Renaissance, 14∼16세기) 시절의 일이다.

당시 미술에 대한 서양미술 사학자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원근법이라는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정확하게 재현해 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위대한 작가들 거의 모두 비밀리에 광학기재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들은 특별한 프리즘과 거울, 또는 현미경을 이용하여 물체의 상(像)을 종이나 화판 위에 비추어주는 장치인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를 사용했다.

캔버스 위에 물체의 상이 그대로 보이도록 한 뒤 밑그림을 그렸으니 제대로 못 그리면 바보이다. 이렇기에 갑작스레 실력이 확 늘어난 듯한 그림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곳 마인트 대륙은 렌즈라는 것이 없다.

따라서 카메라 루시다 같은 광학기재를 만들 수 없으니 라파엘이 그린 ‘발다사르 카스터글리온의 초상’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런데 떡하니 실사에 가까운 인물화가 그려져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이, 이건……!”

“그건 제 용모를 그린 것이고, 그것의 재질은 드래곤의 비늘로 우리나라의 신분증입니다.”

“네? 드, 드래곤의 비늘이요?”

몹시 놀라는 표정이다.

“어라? 이곳엔 드래곤이 없지 않은가요? 혹시 드래곤이 어떤 존재인지 아십니까?”

“압니다. 알고말고요. 어찌 드래곤을 모르겠습니까?”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티마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서점에선 여러 책을 보았다.

그런데 드래곤에 관한 내용이 일절 없었기에 없는가 보다 했는데 그 존재를 안다니 괴의한 것이다.

“이 땅에도 드래곤이 있었읍지요. 드래곤은…….”

잠시 요슈프의 말이 이어졌다.

8장 흑마법사입니까?

개체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마인트 대륙에도 드래곤이 있었다. 약 70여 개체이다.

그런데 대륙이 통일되기 전 현 황제와 그 일당은 이들의 레어를 찾아가 하나하나 제거했다.

그리곤 갓 도살된 드래곤의 사체로부터 드래곤 하트를 뽑아내고 레어의 모든 것을 차지했다.

이것은 마인트 대륙이 일통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

드래곤 하트와 레어에 수집되어 있던 수많은 마법서는 마법사들의 서클을 올려주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리고 레어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금은보화는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칠 병사들을 모집하는 군자금이 되었다.

이후 이들의 행보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그리고 점령지가 늘면서 병사들의 수효 또한 점차 늘어났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음에도 병사의 수는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조사를 해보곤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 거의 모두가 구울, 또는 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무덤 속의 백골들은 스켈레톤이 되어 전투에 참가했다. 이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왕국과 공국, 그리고 제국들이 무너지면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말이나 글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시절이었다.

피의 수레바퀴가 지나는 동안 각국의 기사와 마법사들은 로렌카 제국의 마수를 피해 절지로 숨어들었다.

이들이 바로 바로 반 로렌카 전선의 일원인 것이다.

어쨌거나 마인트 대륙에도 드래곤이 있었고, 이곳에서도 찬탄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무수한 영웅담이 있는데 그중엔 흉포한 레드 드래곤에 맞선 이들에 관한 것도 있다.

오래 전, 레드 드래곤 하나가 온 세상을 분탕질한 사건이 있었다. 아르센 대륙으로 치면 현수의 스승인 멀린에 의해 목숨을 잃은 광룡 사건과 유사하다.

수시로 뿜어댄 화염의 브레스에 의해 여섯 개의 도시가 잿더미가 되었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되었다. 유희 중이던 레드 드래곤이 인간으로부터 모욕을 당했다며 벌인 일이다.

분노한 인간들은 힘을 모았다.

훗날 사가(史家)들에 의해 ‘붉은 전쟁’이라 명명된 이 대결을 위해 여섯 개 나라에서 영웅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레드 드래곤의 레어로 쳐들어가 혈전을 벌였다. 상당히 많은 인원이 출전했지만 아쉽게도 모두가 산화했다.

훗날 이들의 시신을 찾으러 갔던 이들은 난장판이 되어버린 전장에서 몇 개의 붉은 비늘을 발견하였다.

레드 드래곤 또한 부상을 당해 수면기에 접어들었기에 접근이 가능했던 결과이다.

어쨌거나 발견된 비늘은 레드 드래곤의 동체에서 뽑힌 것이다. 이것은 아무런 마법도 인챈트되어 있지 않음에도 마법에 대한 저항성이 컸으며 웬만한 도검으론 흠집조차 내지 못하였다.

하여 왕실은 이를 영웅을 파견한 국가에 하나씩 기증했다.

영웅들의 희생을 애도한다는 의미이며, 연구를 해보라는 의도였다. 수면기가 끝나면 또 한 번 난장판을 벌일 텐데 이를 대비하자는 움직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현수가 내민 주민등록증의 재질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내는 정말 드래곤의 비늘이라 생각한 듯 얼른 되돌려 준다.

모조리 도살당해 하나도 남지 않았지만 드래곤은 생각만으로도 경외감이 느껴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궁금한 것을 묻는다.

“실례하지만 하인스 님은 어떤 분이신지요?”

지극히 정중한 물음과 눈빛이다. 현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바다 멀리 저쪽에 이실리프 왕국이 있습니다. 나는 그곳의 국왕입니다. 또한 이실리프 마탑의 제2대 마탑주이기도 하지요.”

어차피 이곳 사람들은 모를 것이기에 한 말이다.

“네에? 구, 국왕 전하이시면서 마탑주라고요?”

모두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이때 누군가가 물었다.

“호, 혹시 백마법사이십니까?”

“……?”

무슨 의도냐는 표정을 짓자 모두가 긴장된 눈빛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어서 대답해 달라는 뜻이다.

“물음의 의도가 혹시라도 흑마법사가 아니냐는 뜻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이실리프 왕국과 마탑은 흑마법을 배척합니다.”

“아아!”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전하를 저희의 안가로 모셔도 될는지요?”

“…뭐, 그러십시다.”

갈 길이 바쁘긴 하지만 영주 선발대회가 끝나기 전까지만 가면 된다. 게다가 왠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로렌카 제국의 마법사들이 흑마법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현수는 정복전쟁이 벌어질 때 구울과 좀비 등이 등장했음을 듣지 못했다. 그렇기에 로렌카 제국의 마법이 흑마법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는 상태이다.

어쨌거나 이들은 대놓고 로렌카 제국에 반함을 고백했다. 어쩌면 지금껏 듣지 못한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정보란 자세하고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하여 이들의 안내를 받아 근거지로 향했다.

예상대로 어제 본 연기는 이들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은 접근이 쉽지 않은 절벽의 동굴 속에서 생활하는데 밤에만 연기를 피웠다. 자신들의 존재를 감추기 위함이다.

현수는 눈이 밝아서 어슴푸레함에도 연기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가는 동안 들어보니 이들은 어젯밤 현수가 켜놓은 전구를 보고 로렌카 제국이 토벌을 준비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하여 밤새 이곳까지 걸어와 습격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쇠로 만들어진 컨테이너 하나가 있을 뿐이고 밖에서 보기엔 크기도 그리 크지 않으므로 일단은 토벌군은 아니라고 결론 내리고 아침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절벽 안 동굴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따라 들어가니 40대 중반쯤 되는 우아한 여인이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한다.

“제 아내 수아드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잠시 요슈프에게 시선을 준 현수는 미소 띤 얼굴로 수아드를 바라보았다.

“이렇듯 환대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이라 합니다.”

아르센의 예법에 맞춰 한 손을 휘휘 내저으며 정중히 고개 숙여 예를 갖추자 수아드는 두 손으로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또 한 번 예를 갖춘다.

“이쪽은 제 딸 말라크입니다.”

“환영합니다, 전하. 말라크라 하옵니다.”

이번에 치마를 잡고 고개를 숙인 여인은 갓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처녀이다. 참고로 말라크(Mallakh)는 이곳 마인트 공용어로 천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말라크 역시 가죽으로 된 의복을 걸치고 있다.

아르센과 다를 바 없이 이곳도 세제류가 발달되어 있지 않아 냄새가 풍겼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자, 저쪽으로 가시지요. 저희 때문에 아침도 못 드셔서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아! 그래요? 감사한 일이군요.”

현수는 기꺼운 마음으로 말라크의 뒤를 따랐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둔부가 육감적으로 실룩인다. 시선을 둘 데가 마땅치 않아 곁을 따르는 요슈프에게 시선을 주었다.

“난방이 잘 안 되나 봅니다.”

“네?”

“동굴이라 그런지 조금 추운 듯하여 그럽니다. 양쪽이 뻥 뚫려 있어서 그런 듯하군요.”

“네, 그렇다 하여 막을 수도 없습니다. 언제 놈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하거든요.”

이곳은 절벽에 자연적으로 존재한 동굴이었다.

그런데 많은 인원이 살기엔 좁았다.

하여 인공을 가미하여 확장하고 또 확장했다. 그러면서 위험이 닥쳤을 때를 대비해 도주로를 뚫어놓았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은 열일곱 개나 되는 출입구이다. 이 중 열네 개는 가짜이다.

입구를 열 수 있는 기관을 건드리면 그 주변이 폭삭 주저앉도록 만들어져 있다.

바닥엔 날카롭게 벼려놓은 창이 박혀 있다. 심지어 창의 촉에는 절독이 발라져 있다. 조금의 상처만 입어도 수초를 넘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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