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118화 (1,117/1,307)

# 1118

말라크의 말은 사실이다.

현수는 저녁 식사를 조금밖에 안 했다.

무심코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이다. 이들의 거주지를 둘러보던 중 잠시 쉬는 시간이 있었다.

한참을 걸었는지라 모두들 벽에 등을 대고 휴식을 취하면서 물을 마셨다. 이때 벽 뒤쪽에 있던 어떤 모녀의 대화가 들려왔다.

“엄마, 나 지금 배 많이 고픈데 뭐 먹을 거 없어요?”

“아말, 벌써 배가 고파? 근데 조금 더 참으렴. 아직 저녁 먹으려면 더 있어야 하잖니.”

“히잉! 그래도… 나 배고프단 말이에요. 배가 너무 고파서 뱃가죽이 등에 붙을 거 같아요.”

“그래도 할 수 없구나. 그런데 어쩌니. 오늘은 귀한 손님이 오셔서 어쩌면 배급량이 줄 수도 있다는구나.”

“손님 때문에요?”

“그래, 그렇다는 말이 있어. 오늘 너무 많은 음식을 소모해서 양을 줄여야 한대. 그러니 물이라도 마시렴.”

“쳇! 물 싫은데. 너무 차갑잖아요.”

“그래도 아말…….”

이곳은 현재 겨울처럼 춥다. 당연히 농산물은 있을 수 없다. 하여 있는 양식을 배급제로 나눈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 현수가 당도함에 따라 평상시보다 적어도 열 배는 많은 재료를 사용했다. 잔치 분위기를 낸 때문이다.

그 결과가 당분간 배급량을 줄인다는 공고였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저녁을 걸게 먹을 수 있겠는가!

하여 입 짧은 요조숙녀처럼 적은 양만 먹고 대부분 남겼다. 마음에 걸려서이다.

그리고도 마음에 걸려 밀가루 등을 준 것이다.

아무튼 저녁 식사 때 말라크는 현수를 눈여겨보았다.

비슷한 나이 또래인데 한 나라의 국왕이며 마탑주라는 말이 여심을 자극한 것이다.

그런데 현수가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식사를 마쳤다.

당연히 부족할 것이라 생각하여 약간의 음식과 술을 준비해 온 것이다.

“아! 그건… 그래요. 조금 부족했네요.”

“호호! 그렇죠?”

환히 웃는 말라크는 희고 고른 치열을 가졌다. 건강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보니 아까와 다른 의복을 걸치고 있다.

아까는 몸에 착 달라붙는 가죽 의복을 입고 있어 조금 둔해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풍성한 마직 의류이다.

이곳은 최소한의 소비 규모에도 이르지 못해 거의 모든 생활용품을 자급자족한다고 했다. 로렌카 제국의 영지로 가면 원하는 물건을 구할 수는 있겠지만 거수자로 잡힐 확률이 높기에 아예 얼씬도 하지 않는다.

하여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직접 만들거나 물물교환을 통해 얻는다고 한다.

말라크가 걸친 의복은 포대자루에 구멍 몇 개를 뚫은 것이나 다름없다. 패션이 사치인 곳이니 이런 모양이 이해된다.

문제는 고무줄 같은 것이 없기에 상당히 늘어져 몸을 숙일 때마다 탐스러운 가슴이 절반 넘게 보인다는 것이다.

브래지어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현수는 시선 둘 곳이 없다. 다 큰 처녀의 가슴이 계속해서 눈에 뜨이니 왠지 실례를 범한 느낌이 든다.

의도적으로 그러는지 아님 존경의 뜻을 표하려 그러는지 말라크가 자주 고개를 숙인 때문이다.

한국처럼 손으로 가슴 부위를 지그시 누른 채 고개를 숙이면 되건만 그런 건 모르나 보다.

“이거 여기에 놓으면 되죠?”

식탁 비슷한 탁자에 술과 안주를 내려놓은 말라크는 나갈 생각이 없는지 털썩 주저앉는다.

“전하, 어서 여기 앉으셔요.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는데 지체 높으신 분은 자기 손으로 따라 마시는 게 아니래요.”

“……?”

현수는 말라크의 시선을 피했다. 왠지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때 말라크가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다.

“어라, 근데 그건 뭐인가요?”

말라크가 눈여겨보고 있는 것은 현수가 꺼내놓은 침구이다. 장미 문양이 그려진 극세사 이불과 요다.

베개는 50×70㎝짜리로 요, 이불, 베개 세트이다. 옥션에서 세일가 1,483,280원에 팔리는 것이다.

기왕 꺼내는 것이니 부러 비싼 것을 꺼냈다. 당연히 마인트 대륙엔 없는 물건이다.

말라크의 눈에는 생전 처음 보는 귀한 물건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전하, 소녀가 이거 한번 만져 봐도 되나요?”

“…그, 그래.”

“고마워요. 어머, 어머! 이거, 이거 뭐로 만든 거예요? 엄청 보드라워요. 이거 진짜 따뜻할 거 같아요.”

말라크는 요와 이불을 쓰다듬으며 연신 감탄사를 터뜨린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촉감이기 때문이다.

“……!”

현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가져온 것이라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 어머! 이거 너무 부드러워요. 세상에, 이건 어디서 만든 물건이래요? 나도 이런 거 하나 있으면 좋겠다.”

말라크는 몹시 부럽다는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갑작스레 분위기가 요상해지자 현수는 아공간의 술안주를 꺼냈다.

“난 한잔할 건데 말라크는 안 나가나?”

“네? 저, 저요? 제가 꼭 나가야 하나요? 그냥 여기 조금 더 있으면 안 돼요?”

목마른 사슴처럼 바라보기에 현수는 단호하게 대할 수 없었다. 보드라운 이불을 더 만져보고 싶다는 표정이다.

“그, 그럼 조금 더 있던지.”

쪼르르륵―!

현수가 술을 따르자 말라크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선다.

“어머! 제가 따라드려야 하는데 왜 그러셨어요.”

후다닥 달려온 말라크는 현수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나머지 잔을 채운다.

그러다 마카다미아를 보고 얼른 집어 든다.

안주라고 가져온 것이 시원치 않아 아공간에서 꺼낸 것이다.

“근데 이건 뭐예요?”

“내 고향에선 술 마실 때 안주로 먹지.”

“저 이거 하나 먹어봐도 돼요?”

“그럼. 이것과 이것도 먹어도 돼.”

현수가 가리킨 것은 육포와 대구포이다. 제법 두툼해서 두어 개만 먹어도 한 끼 식사로 족한 최고급품이다.

“어머! 이건 뭐예요? 근데 정말 먹어도 돼요?”

“그럼! 술도 한잔할래? 이거 말고 조금 더 순한 걸로.”

“정말요? 좋아요. 저도 한 잔 주세요. 아까부터 한잔하고 싶었거든요.”

이 말은 사실이다. 말라크 역시 이곳 사람이다. 밤이 되면 몹시 춥기에 매일 술 몇 잔을 들이켰다.

그런데 오늘은 귀빈이 와서 그럴 틈이 없었다. 부모인 요슈프와 수아드가 바싹 신경 쓰고 있어 깜박 잊은 것이다.

현수는 아공간에서 캔 맥주를 꺼내 한 잔 따라줬다.

돌돌돌돌돌―!

흰 거품이 올라오자 신기한 듯 바라본다. 태어난 이래 이곳에서만 생활했기에 맥주를 본 적 없다.

“이거 정말 마셔도 되는 거죠? 저, 그럼 마셔요?”

“응, 마셔.”

말 떨어지기 무섭게 잔을 비운다.

꿀꺽, 꿀꺽, 꿀꺽―!

“캬아∼! 시원하네요.”

생전 처음 맛보는 맥주는 정말 시원했을 것이다. 냉장 보관된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안주도 먹어봐.”

“네, 먹을게요.”

말라크는 순순히 대구포를 집어 한입 베어 문다. 짭조름한 맛이다. 이곳 사람들에게 있어 소금은 황금보다 귀한 것이다. 바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짭조름한 맛을 느낀 말라크는 눈을 크게 뜬다.

“어머! 이건… 우와! 정말 맛있어요!”

이때 현수가 슬쩍 물었다.

“근데 진짜 술과 안주를 주려고 온 거야?”

“아뇨. 오늘 밤 전하의 씨를 받으려구요.”

화들짝 놀란 현수는 얼른 물러앉았다.

뭔가 속셈이 있어 온 것이라 생각하여 은근히 물어본 건데 적나라하게 털어놓자 오히려 당황한 것이다.

“뭐라고?”

“저 아직 처녀예요. 오늘 밤 제게 씨를 뿌려주세요.”

말라크는 말을 돌려서 말하는 법을 모르는지 원색적인 이야기를 해서 현수를 당황시킨다.

“헐!”

글자 그래도 ‘헐!’이다. 현수는 넋이라도 나간 듯한 표정으로 말라크를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스물쯤 된 아가씨가 정절 따윈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빤히 바라본다.

“아! 여기 풍습을 잘 모르셔서 그러는 거죠?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집 주인은 아내나 딸과 동침하도록 해요. 손님에 대한 가장 큰 예절이죠.”

“뭐라고……?!”

“그게 우리 풍습이에요. 우린…….”

330년 전에 멸망한 화티카 왕국엔 사람들이 깜짝 놀랄 풍습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귀한 손님이 올 경우 아내, 또는 딸과 동침하게 해주는 것이다. 주인의 입장에선 대단한 호의이다.

이는 계속된 근친 교배를 피해 새로운 유전 형질을 얻으려는 본능적인 풍습이다.

그런데 집주인의 호의를 거절하면 모욕당했다 여겨 손님을 살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손님을 살해할 수 없는 경우엔 하룻밤을 같이하기로 한 여인이 자결해야 한다.

손님으로 하여금 동침을 거절치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율법이다.

둘째는 첫아이가 딸이면 반드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이다.

노부모는 맏아들에게 생계를 의탁하는 풍습이 있다.

그런데 부양해 줄 아들이 없으면 노년기의 생계가 어렵기에 반드시 아들이 있어야 했다. 하여 첫아이가 딸일 경우 탯줄을 끊자마자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 묻어버렸다.

참고로 이 풍습은 에스키모의 그것과 기가 막힐 정도로 유사하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어요. 제가 전하와 어울릴 만한 나이이니 가서 씨를 받아오라고요.”

말라크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그래도 아직 처녀지신인 때문이다.

“험, 험!”

현수는 헛기침을 했다. 너무 원색적이라 뭐라 대꾸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말라크와의 동침은 불가한 일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으면 모욕당했다 생각한다는데 뭐라 말하겠는가! 하여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한편, 말라크는 처분만 기다린다는 듯 긴장된 표정으로 슬쩍슬쩍 눈치를 살핀다.

“호, 혹시 제가 마음에 안 드셔서…….”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말라크, 내가 이실리프 왕국의 국왕이라는 말은 들어보았지?”

“네, 전하이시면서 마탑주이기도 하다 들었어요.”

“우리 왕국의 풍습은 사내와 여인이 한 몸이 되려면 반드시 혼인의 예를 갖춰야 해.”

“……!”

말라크는 뭐라 알아들었는지 몰라도 심히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두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귀밑머리며 목덜미의 솜털은 바르르 떨리고 있다.

결혼이라는 말만 들어도 부끄러운 나이인 때문이다.

“그리고 한 사내는 다섯 이상의 아내를 거느릴 수 없어.”

“……!”

말라크는 그게 정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뜬다. 이곳 사람들은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로렌카 제국의 눈길을 피해 숨어사는 형편이다.

그런데 한 사내가 힘이 세다 하여, 혹은 권력을 쥐고 있다 하여 여러 여인을 거느리게 되면 자연스레 짝이 부족해진다.

이에 불만을 품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최악의 경우는 욕구불만에 처한 자의 밀고가 로렌카 제국의 병사들을 불러들이는 일이다.

병력 수 등에서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에 토벌당하면 다시 한 번 멸망을 겪을 수 있다.

하여 모두가 공평하게 일부일처제가 유지되는 중이다. 그런데 아내가 다섯이라 하니 놀란 것이다.

“나는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 이미 다섯이나 있어. 하여 말라크를 품을 수 없어.”

현수는 더 이상 대화할 여지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말라크는 다소 당황한 듯하다.

“…소, 소녀는 국왕 전하의 아내가 되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저 하, 하룻밤의 승은을 입겠다는 건데 정녕 거절하시는 건가요?”

말라크의 눈빛이 결연하게 바뀌어 있다.

이런 모욕을 당하면 손님을 죽이거나 본인이 자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곳의 율법이다.

지금은 술잔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이제 둘 중 하나는 목숨을 잃어야 하는 상황이니 이런 눈빛이 될 수밖에 없다.

말라크는 멸망당한 화티카 왕국 후작가의 직계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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