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119화 (1,118/1,307)

# 1119

그리고 이곳의 율법은 귀한 손님이 왔다 하여 무조건 아내나 딸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공작가에 손님이 들었다.

그런데 그 손님의 신분이 하찮은 평민이라면 하룻밤 품으라고 공작부인이나 공녀를 내어주겠는가?

손님 수가 많아지면 공작부인, 또는 공녀는 고귀함을 잃게 된다. 저잣거리의 창녀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신분이라는 것이 있다.

따라서 요슈프는 손님의 신분 또한 후작가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일 경우에만 아내인 수아드, 또는 사랑하는 딸 말라크로 하여금 하룻밤 동침을 지시한다.

참고로 후작 이상의 신분을 가진 자가 이곳을 방문한 경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현수는 본인이 국왕이자 마탑주임을 밝혔다. 그렇기에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는 딸을 들여보냈다.

귀한 씨앗을 받아 후작가의 동량으로 쓰기 위함이다.

그런데 거절당했다.

현수는 10서클 마스터이다. 이곳 사람들 전부가 달려들어도 어쩌지 못할 절대자이다.

따라서 현수는 건드릴 수 없는 존재이다. 이제 남은 것은 말라크가 가문의 명예를 위해 자진해야 하는 상황이다.

“저, 정말 안 되는 건가요?”

“나는 우리 왕국의 국왕이야. 내 스스로 왕국법을 어기는 건 조금 문제가 있지 않을까?”

슬쩍 상대의 동의를 구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스스로 물러나 주길 바란 것이다. 물론 현수는 거절당한 여인이 스스로 목숨을 끓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기에 한 말이다.

포카혼타스나 라푼젤 같은 느낌의 말라크는 애원 섞인 처연한 눈빛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그래도… 정말 안 되는 거예요?”

“난 솔선수범하여 국법을 지켜야 하는 존재야. 그러니 이만 물러가 주면 좋겠어. 괜히 여기에 있다 청백만 의심받을 수도 있으니까.”

과년한 처녀가 혈기왕성한 사내와 한 방에 오래 머문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춰지는지를 알기에 한 말이다.

그런데 현수는 말라크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용기를 내어 하룻밤 시중들어 주겠다고 왔는데 거절당했으니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럴 땐 기분 전환이 최고지.’

슬쩍 고개를 끄덕인 현수는 아공간에서 옷을 꺼냈다. 백두마트에서 팔던 것들이다.

“말라크, 옷이 조금 낡은 거 같은데 내가 이걸 선물해도 될까?”

“네?”

일렁이는 시커먼 구멍에서 튀어나온 것은 일종의 드레스이다. 일부러 포카혼타스나 라푼젤 분위기가 나는 걸 꺼낸 것이다.

“이 옷, 말라크에게 어울리는 거 같은데 한번 입어볼래?”

“저, 정말요?”

어느새 눈빛이 바뀌어 있다. 아주 반짝거린다.

“그래, 잠깐만.”

현수는 아공간에서 파티션을 꺼내 옷을 갈아입을 공간을 만들어줬다. 그리곤 여러 가지 옷을 꺼냈다.

눈짐작으로 말라크의 사이즈를 재봤는데 66사이즈 정도 되는 듯하여 그 크기로 꺼냈다.

참고로 한국에서 판매되는 여성복의 사이즈는 44, 55, 66 등으로 구분된다.

이는 1979년에 실시된 국민체형조사 결과 때문이다.

당시 20∼24세 여성들의 치수를 재어봤더니 평균 신장은 155.5㎝였고, 가슴둘레는 85.6㎝였다.

이것들의 소수점 아래의 숫자를 빼고 끝자리 숫자만 조합 것이 55사이즈이다.

다시 말해 당시 평균 여성의 사이즈가 55이다.

그리고 이보다 키 5㎝, 가슴둘레 3㎝가 크면 66사이즈이고 작으면 44사이즈라 칭한다.

10장 정말 안 되는 거예요?

말라크의 신장은 163㎝ 정도 되지만 영양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 약간 마른 체형이다.

그렇기에 66사이즈를 꺼낸 것이다.

예상대로 이곳 사람들은 속옷을 입지 않는다. 하여 팬티와 스포츠 브라도 꺼냈다.

그리곤 어떻게 입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오래전 카이로시아에게 브래지어 착용법을 가르쳐 준 경험이 있기에 남세스럽지 않은 분위기다.

다음은 위에 입을 옷들이다. 어깨에 뽕이 들어간 원피스 위주로 골라주었더니 아주 잘 어울린다.

“어머! 이 옷 정말 좋아요!”

말라크는 보드랍고 색상이 선명한 옷을 입어보곤 한 바퀴 휘돌아본다. 그 순간 악취가 느껴진다.

‘윽! 냄새!’

비누도 없고, 샴푸도 없으며, 비데와 생리대 등이 없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물이 귀하다.

암반을 깎아 조성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여 마실 물은 절벽 아래에 위치한 호수로 흘러드는 개울에서 떠온다.

씻는 것은 당연히 호수를 이용한다.

그런데 이곳의 현재 기온은 1∼2℃밖에 안 된다. 목욕을 하거나 머리를 감기엔 너무나 쌀쌀한 날씨이다.

말라크는 이곳에 오기 전 뒷물이라는 것을 했다. 하지만 충분치 못했다. 게다가 목욕을 한 지 오래되었다.

머리를 감지 않은 게 석 달쯤 되었으니 몸에서 냄새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말라크, 잠깐만!”

“네?”

“잠깐만 그냥 있어 보라고.”

“네에.”

왜 그러느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현수의 말대로 움직임을 멈춘 채 빤히 바라본다.

현수는 아공간에서 항온마법진을 꺼냈다. 온도는 30℃ 정도로 세팅했다.

마법진을 가동시키자 실내 기온이 확연히 올라간다.

“거기 가만히 서 있어.”

“네.”

“워싱! 클린! 워싱! 클린!”

“으읏! 차가워요.”

말라크는 갑자기 차가운 물이 온몸을 휘감자 바르르 떤다.

하지만 금방 상쾌함이 느껴지자 찌푸린 얼굴을 편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왜 씻기느냐는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이건 세안을 하거나 목욕을 할 때 쓰는 거야.”

현수는 비누와 수건을 꺼내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아울러 하이타이 같은 중성세제도 꺼내 주었다.

제법 넓은 방이지만 금방 채워졌다.

“이건 말라크에게 주는 선물이야. 우리 왕국의 법 때문에 안아주지 못하는 건 미안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마음에 안 두었으면 좋겠어.”

“…네, 전하. 소녀, 목숨을 끊지는 않겠어요.”

“목숨을 끊지는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건…….”

말라크가 이곳의 율법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현수는 헥사곤에서도 율법 때문에 곤란을 겪었는데 이곳마저 그렇다 하니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 사람들의 심리 상태가 지구인과 다르다는 것은 알지만 너무나 고루하고 괴팍하다 생각한 때문이다.

현수는 말라크를 보내 요슈프와 수아드를 불러왔다.

둘에게 이실리프 왕국법 때문에 씨를 뿌려줄 수 없음을 설명하여 양해를 구했다.

국왕은 오로지 다섯 명의 처만 거느려야 하며 국왕의 씨를 받은 여인은 무조건 왕비로,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기는 공주, 또는 왕자에 봉해야 하는 법이 있음을 알렸다.

원래는 거절당하면 몹시 화를 내야 한다.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최고의 호의를 무시당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나 요슈프는 그러지 않았다. 국왕으로서 솔선수범하려는 모습을 높이 사며 오히려 감복했다.

한편, 수아드는 말라크가 걸친 의복을 보며 감탄하기에 바빴다. 너무도 고운 색상이며 흠집 없는 재봉이다.

게다가 펑퍼짐한 옷만 보다가 몸매에 딱 맞는 것을 보니 눈알이 핑핑 돈다.

현수가 말라크에게 준 것은 약 20여 벌이다.

현수가 보기엔 촌스런 디자인이지만 이곳에선 상당히 괜찮아 보일 듯한 것만 골라서 주었다.

팬티와 스포츠 브라도 많이 주었다.

수아드는 수건을 보고도 많이 놀랐다. 너무도 귀한 천이라 여긴 때문이다. 비누와 중성세제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눈빛을 반짝인다. 어서 사용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튼 무사히 밤을 보냈다. 현수는 요슈프로부터 많은 정보를 습득했다.

“그럼 안녕히…….”

“네, 언제든 또 찾아주십시오.”

요슈프를 비롯한 지도부는 정중히 고개 숙여 현수를 배웅했다. 수아드와 말라크도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현수는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하곤 등을 돌렸다.

그런데 의복이 약간 달라져 있다. 검은색 로브인데 가슴에 붉은 꽃 한 송이가 수놓아진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서 멀어지자 오토바이를 꺼냈다. 그리곤 거침없는 질주를 시작했다.

가끔 잠시 멈춰 지도를 보곤 길을 잡았다.

반 로렌카 전선이 제작한 지도인지라 제국의 눈길이 덜 미치는 길이 표시되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달린 것이다.

‘이게 없었으면 되게 번거로웠을 거야.’

현수는 베푼 만큼 돌아온다는 말을 다시 한 번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누와 수건, 그리고 여러 종류의 의복과 중성세제 등을 넉넉하게 주지 않았다면 이런 지도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출발하기 직전 말라크가 말하여 지도를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말라크는 현수가 준 옷을 걸친 채 묘한 눈빛으로 배웅했다.

평생 마음속 연인으로 삼기 위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뇌에 새기려 그토록 빤히 바라본 것이다.

부우우웅! 촤라라라락―!

흙먼지를 뒤로하며 거침없이 숲길을 전진하던 현수는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붉은 절벽을 바라보고 멈춰 섰다.

‘흐음! 드디어 테라카에 당도했군.’

이곳은 수도 맥마흔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산맥의 한 부분이다.

요슈프가 준 정보에 의하면 이곳에도 반 로렌카 전선의 세력이 은신해 있다. 맥마흔으로 들어가기 전에 꼭 들러서 각종 정보를 얻으라고 조언해 주었다.

요슈프 일행이 머무는 그곳처럼 이곳도 절벽의 동굴을 은신처로 삼았다.

절벽 가운데 뚫려 있는 동굴의 입구는 찾기 어렵다.

바위로 둘러싸인 안쪽에 입구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고구려 성곽의 특징인 옹성(甕城) 같은 모양이다.

옹성이란 말 그대로 항아리 모양의 성(城)을 뜻한다. 성의 가장 취약 지점인 성문을 둘러싸는 형태의 작은 성이다.

옹성의 장점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문에 대한 직접적인 공략이 불가능하다.

둘째는 성문을 공략하러 들어온 적들을 삼면에서 포위하여 공격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절벽의 중턱까지 직접 올라가서 수색하지 않으면 입구를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옹성처럼 침입자를 삼면에서 둘러싼 채 공격할 수 있으므로 천혜의 요새라 부를 만하다.

그래서 이 요새를 ‘테라카’라 한다. 마인트 공용어로 ‘천험의 절지’라는 의미이다.

올라가 보면 알겠지만 동굴의 입구엔 육중한 문이 설치되어 있다. 혹시 있을지 모를 로렌카 제국군의 공격을 대비한 것이다.

옹성에 해당하는 부위엔 적의 침입을 저지한 각종 병장기가 설치되어 있다. 누구나 사용 가능한 노(弩)와 트레뷰셋(Trebuchet), 발리스타(Ballista) 등이다.

절벽 위에 위치해 있기에 적의 접근을 쉽게 식별해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방어도 용이하다.

현수는 오토바이를 몰아 테라카가 있는 절벽 아래로 향했다. 그곳에 당도하자마자 활을 꺼내 위쪽으로 쏘아 올렸다.

화살 끝엔 요슈프가 써준 소개장이 묶여 있다.

쐐에에에엑―!

쏘아져 올라간 화살은 의도한 곳에 박힌다.

퍽―! 부르르르―!

경계근무 중이던 사내는 대경실색했다.

저 멀리로부터 현수가 곧장 다가올 때까지만 해도 우연히 오는 것으로 알았다. 가끔 약초를 캐러 사람들이 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청나게 빠르다. 하여 뭔가 싶어 안력을 돋웠다. 뭔지 모르지만 탈것을 타고 온다.

말보다 빠른지라 상당히 놀랐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화살을 쏘아 올리는데 바위에 박힌 채 깃 부분이 떨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테라카의 입구는 아래로부터 약 100여 m나 떨어져 있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 높이까지 화살을 쏘아 올리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 그런데 바위에 박히기까지 하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라렌, 가서 화살 뽑아와.”

“네, 대장.”

라렌이라 불린 사내는 바위에 박힌 화살을 낑낑대며 뽑았다. 생각보다 깊숙이 박힌 때문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