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0
현수가 쏘아 올린 서찰을 확인한 대장이라는 자는 내용을 훑어보다 화들짝 놀라며 안으로 튀어 들어간다.
잠시 후, 일단의 무리가 나와 절벽 아래를 바라본다.
“손님, 바구니를 내려드리겠습니다!”
“괜찮소. 올라가도 되겠소?”
“…네!”
사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수의 신형이 위로 솟구친다. 플라이 마법이 시전된 것이다.
“헉! 세상에!”
“반갑소.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이라 하오.”
“어, 어서 오십시오. 테라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잠시 후 현수는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요슈프가 머무는 곳과 비슷하다. 다만 이곳은 정상적인 온도가 유지되고 있는 게 다를 뿐이다.
“반갑습니다. 마일티 왕국 공작가의 후손인 헤럴드 폰 하시에라라 합니다.”
최종적으로 현수를 맞이한 사내는 육십 정도 된 체격이 큰 사내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검을 다룬다는 게 느껴진다.
“반갑습니다.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입니다.”
“이렇듯 이실리프 왕국의 국왕 전하를 알현하게 되어 무상의 영광이옵니다.”
헤럴드는 본인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예를 갖췄다.
요슈프가 보낸 서찰에 현수의 신분과 목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본인이 신분을 보증한다 하였기 때문이다.
요슈프 역시 본인처럼 반 로렌카 전선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책임자이다.
각 세력의 책임자들은 연대 작전을 위해 가끔 모임을 갖는다. 마지막 모임은 8년 전에 있었다.
그때 요슈프가 천근보다도 무거운 행보를 보임을 알았기에 무조건 믿는 것이다.
“이처럼 불쑥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환대해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닙니다. 어찌 전하의 방문을 저희가 마다하겠습니까? 부디 불편함이 적기를 바랄 뿐입니다.”
대화가 시작되었고, 현수는 헤럴드로부터 상당한 정보를 습득했다. 헤럴드는 맥마흔에 비선을 깔아두었다.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비선으로부터 각종 정보 및 첩보가 수집되기에 그쪽 사정에 정통하다 할 수 있다.
현수는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세 끼 식사를 접대 받으면서 많은 정보를 습득했기에 그에 상응하는 물품들을 꺼내 주었다.
무엇이 부족하냐고 물으니 의복과 식량을 꼽았다. 하여 헤럴드가 너무나 귀한 물건을 이토록 많이 주어도 되겠느냐며 걱정할 정도로 푸짐하게 꺼내 주었다.
그만큼 귀중한 정보를 얻은 때문이다.
다행히도 말라크처럼 한밤중에 침소로 스며드는 여인이 없어서 좋았다.
요슈프가 이런 내용까지 서찰에 적어서 보낸 모양이다.
하긴 말라크는 거절했는데 이곳에서 다른 여인을 안아준다면 배가 아플 것이다.
“헤럴드, 잘 쉬었다 갑니다.”
“네, 전하께 신의 가호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 봅시다.”
“그럼요. 또 뵈어야죠.”
요새를 떠난 현수는 곧장 맥마흔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번에도 숲길이다. 굳이 매복이 준비되어 있는 큰길로 가서 번거로움을 겪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반 로렌카 전선만 이용하는 통로였기에 매복을 만나는 등의 일은 없었다. 덕분에 몇 날 며칠 동안 매복해 있던 로렌카 제국군만 고생했다.
“흐음! 과연 수도라 할 만하군.”
맥마흔은 높이 15m짜리 성벽으로 완벽하게 둘러싸인 거대한 도시이다.
위를 올려다보니 성벽 위에는 순찰을 도는 병사들이 있다. 걸음을 딱딱 맞춰 걷는 걸 보니 군기가 엄정한 듯싶다.
이곳의 규모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보다도 크다. 서울시는 605.18㎢인데 이곳은 약 700㎢이다.
가로 20㎞, 세로 35㎞짜리 계획도시인 이것의 성벽 총연장은 110㎞나 된다. 만리장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엄청난 거리이다.
이토록 긴 성벽을 견고하게 조성하기 위해 일일이 돌을 쌓았을 노예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거중기나 리어카 같은 것이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맥마흔엔 여섯 개의 문이 있다.
정중앙에 있는 황궁을 중심으로 다윗의 별 문양을 그려보면 그 꼭짓점마다 대문이 있다.
문의 크기는 조금씩 다른데 대부분 높이 12m, 폭 30m 정도이다. 두께는 30㎝를 넘는 듯하다.
제법 두툼한 철판이 덧대어져 있으니 공성장비를 이용한 공격이나 화공으로부터 안전할 듯싶다.
문 앞엔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모두가 화려하게 장식된 것이다. 헤럴드의 말처럼 엄청난 수의 귀족이 수도로 집결하는 모양이다. 영주 선발대회에 참가하려는 귀족과 이를 구경하려는 이들일 것이다.
현수는 성 밖 시가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월이 흐르면서 수도로 인구가 집중되는 동안 자연스레 조성된 것이다.
이보다 더 떨어진 곳엔 빈민촌이 자리 잡고 있다. 확실한 통계는 없지만 대략 2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현수는 헤럴드가 이야기한 간판을 찾았다. 지구의 그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판자에 칼로 새긴 것이다.
“흐음! 어디 보자. ‘졸린 조랑말의 발굽’은 대체 어디에 있지? 근데 대체 뭘 취급하기에 상호가 이런 거야?”
현수가 이곳에 와서 본 상점의 이름은 발정 난 고양이의 콧구멍이나 훔친 밀 포대에 핀 꽃 한 송이, 그리고 뿔난 양의 엉덩이이다. 그런데 이번엔 졸린 조랑말의 발굽이다.
현수는 두리번거리며 간판들을 살폈다.
그런데 너무 많아서 찾기가 쉽지 않다. 크기도 제각각인데다 글씨도 엉망이라 읽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낡디낡은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어 더욱 찾기 어려웠다.
하여 한참을 두리번거려야 했다.
“아! 저기에 있군. 저러니 못 찾지.”
졸린 조랑말의 발굽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간판은 크기가 매우 작았다. 가로 60㎝, 세로 30㎝이다.
다른 것들은 아무리 작아도 이것의 두 배는 된다. 이러니 찾기 쉽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삐이꺽―!
잔뜩 녹슨 경첩에서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이 들린다.
“누구슈?”
슬쩍 실내를 살펴보니 쇠락해 가는 주점인 듯하다. 손님이라곤 귀퉁이에 엎드려 있는 주정뱅이 하나가 전부이다.
“어서 오슈. 한잔하시려고? 뭐로 드릴까?”
탁―!
카운터 안쪽의 사내는 술잔을 꺼내놓고 어떤 술을 원하느냐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검은 고블린의 혓바닥을 뽑고 싶은데, 있소?”
“…검은 뭐라고 했소?”
“검은 고블린의 혓바닥을 뽑고 싶다고 했소이다.”
“으음! 이쪽으로 오슈.”
사내는 카운터에서 나오더니 뒷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간다. 현수는 반쯤 기절해 있는 주정뱅이를 힐끔 바라보곤 사내의 뒤를 따랐다.
둘이 사라지자 지금껏 엎어져 있던 주정뱅이가 고개를 든다. 너저분하게 자란 머리카락 사이로 형형한 안광이 엿보인다. 결코 술 취한 자의 눈빛이 아니다.
‘드디어 걸려들었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선 주정뱅이는 창문을 열고 뭔가를 던졌다. 그리곤 현수가 들어간 뒷문으로 접근한다.
조심스레 사방을 살핀 사내는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으읏! 이게 왜 이래? 왜 안 열리지? 아! 당기는 것이 아니라 미는 건가?”
밀어도 보고 당겨도 보지만 문은 꼼짝도 않는다. 주정뱅이는 당황한 듯 주위를 둘러본다.
같은 시각, 주인의 뒤를 따라 들어간 현수는 몇 개의 어두컴컴한 통로를 지났다.
매번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발을 들여놓으면 자동으로 닫히는 듯 소음이 들린다.
철컥―! 촤르르르륵!
여섯 번째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인이 멈춰 선다.
“관에 핀 꽃은 무슨 색이었소?”
“초록색이오. 156송이였다오.”
“…따라오시오.”
이번에 들어선 방은 정사각형 모양이다. 사방에 똑같은 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인은 그중 하나를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현수는 말없이 뒤를 따랐다.
방금 전 두 번째 암구호를 확인한 것이다. 맞지 않았다면 그곳은 절지로 바뀌었을 것이다.
반 로렌카 전선이 사용하는 암구호에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검은 고블린의 혀를 뽑겠다는 것은 검은색 로브를 즐겨 걸치는 로렌카 제국의 마법사들을 죽이겠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156은 로렌카 제국 이전에 존재한 공국과 왕국, 그리고 제국의 수효이다.
12개의 제국과 116개의 왕국, 그리고 28개의 공국이다.
관(棺)은 이들의 멸망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상엔 수없이 많은 종류의 꽃이 있다. 빨강, 노랑, 파랑도 있고 자주, 보라색 꽃도 있다.
당연히 흰색과 검은색 꽃도 있다. 이처럼 별의별 색깔의 꽃이 있지만 마인트 대륙에 초록색 꽃은 없다.
그럼에도 암구호에 초록색 꽃이란 말을 넣은 이유는 불가능하지만 희망을 잃지 말자는 의미이다.
어쨌거나 현수는 주점 사내의 뒤를 따라 몇 백 m는 됨직한 긴 복도를 걸었다. 그러다 계단을 딛고 올라갔다.
삐이꺽―! 쿠웅―!
덮개를 열고 올라가니 어느 귀족가의 방인 듯싶다.
대체 어딘가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지금껏 안내하던 주점 주인이 입을 연다.
“어서 오십시오. 라트보라 남작입니다.”
“네?”
“황궁에서 행정서기를 맡고 있습니다.”
“아!”
반 로렌카 전선에서 파견한 간세가 귀족 행세를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 현수는 나직한 탄성을 냈다.
그러다 서클 수를 확인해 보았다.
“어라, 5서클 마스터이군요.”
“그렇습니다. 마나 각인을 통해 간신히 이룬 경지지요.”
마나 각인은 마법적 재능이 없는 사람도 마법을 익힐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편법이다.
강제로 마나 친밀도를 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급 마나석 여섯 개와 3서클 이상인 마법사 넷이 있어야 강제로 마나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딱히 대법이라고 할 것은 못 되지만 이를 할 때 여러 조건을 갖춰야 한다. 그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못하면 불상사가 발생한다. 대상자가 죽거나 미치는 것이다.
통계적으로 마나 각인의 성공 확률은 5% 남짓이다.
20명을 대상으로 했을 때 한 사람 정도만 괜찮고 나머지는 죽거나 미치는 것이다. 정립되지 않은 불안한 이론이 바탕인 때문이다.
아무튼 라트보라 남작은 이 시험을 통과했기에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그 후 열심히 수련하여 5서클에 이른 것이다.
낮에는 황궁에서 행정서기 일을 보고, 저녁이 되면 ‘졸린 조랑말의 발굽’이라는 괴상한 이름의 주점의 바텐더가 되어 취객들을 상대로 정보를 수집한다.
또한 반 로렌카 전선에서 보낸 첩보원들과 접선을 했다.
고귀한 귀족이 하찮은 평민 복장을 하고 있을 것이라곤 아무도 생각지 않기에 지난 30년간 별 탈 없이 꾸준히 이어져 온 일이다.
라트보라 남작이 있었기에 반 로렌카 전선은 별 탈 없이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전에 첩보가 입수되기에 제국의 소탕 작전을 피해 다른 곳에 은신하거나 아예 성동격서의 전법에 따라 게릴라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국의 중추는 두뇌가 뛰어난 마법사들로 이루어 있다. 그렇기에 번번이 소탕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대적인 색출 작업을 진행했다.
간세가 침투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여 대대적인 조사가 실시되었다.
1차 조사대상은 황궁 내에 머무는 모든 귀족과 시종, 그리고 시녀와 병사들이었다.
즉각 개인별 조사가 실시되었다. 멀든 가깝든 고향에 사람을 보내 일일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5년에 걸친 치밀한 조사 끝에 간세들이 색출되었고, 황궁 앞 광장에서 오마분시되는 최후가 공개되었다.
다음은 황성 내에 기거하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였다. 상당히 많은 인원이었지만 이 또한 모두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도 상당히 많은 반 로렌카 전선 소속 간세들이 색출되었다.
이들은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는 동안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토해놔야 했다. 그 탓에 몇몇 세력이 급습당해 전멸하는 불상사가 빚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