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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1124화 (1,123/1,307)

# 1124

로렌카 제국엔 장례식이라는 것이 없다. 죽은 자의 몸은 제국이 소유하기 때문이다.

“와아아아! 핫산! 핫산! 핫산!”

“나는 니 편이다! 랜돌! 랜돌! 랜돌!”

“둘 중 하나는 죽어라! 와아아아아!”

흥분한 관중들은 더 많은 피를 요구하고 있다.

‘흐음, 6서클이군.’

남작위를 차지하기 위한 대결이다.

5서클 마스터 이상 참가가 가능한데 지금껏 5서클 마법사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나왔다면 모두 죽었거나 패했을 것이다.

현재까지 진행된 대결은 약 20여 회이다. 모두가 6서클 마법사가 참가한 대결이었다.

“핫산! 랜돌! 두 분은 경기 규칙을 아십니까?”

“네, 압니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신호가 떨어지면 대결을 시작하십시오. 부디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사회자는 의례적인 말을 하곤 물러선다.

그런데 곧장 깃발이 내려지지 않는다.

사회자가 물러선 후 약 5분 정도 시간이 지체된다. 관중석에서 내기 돈을 걸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수는 무심한 시선으로 랜돌을 바라보았다.

음침한 인상이다. 아울러 ‘나는 흑마법사입니다’라는 포스를 물씬 풍기고 있다.

“자, 그럼 지금부터 핫산 대 랜돌, 랜돌 대 핫산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준비이∼ 시작!”

제국의 문양이 그려진 검은 깃발이 내려가자 랜돌은 재빨리 아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저건……?”

랜돌이 꺼낸 건 키메라이다. 샤벨타이거의 몸에 맨티코어의 날개를 달았다.

“크흐흐흐! 가랏!”

랜돌의 명령이 떨어지자 키메라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현수에게 쏘아져 오며 날갯짓을 한다.

대결장의 크기는 축구장 넓이 정도 된다.

현수는 날개 달린 샤벨타이거가 다가오자 입술을 달싹였다. 멀리서 보면 룬어를 영창하는 듯한 모습이다.

“파이어 레인!”

슈아아아아아악―!

하늘에서 시뻘건 화염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키메라는 황급히 달려들던 방향을 바꾼다. 짐승이라 불을 꺼리는 것이다.

“뭐 해? 어서 달려들어! 놈을 잡아먹으란 말이야!”

고함을 지른 랜돌이 현수를 째려본다.

“아이스 캔논!”

쌔에에에엑―!

무엇이든 얼려 버릴 차가운 기운이 쇄도한다. 현수는 달려드는 키메라를 보며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파이어 월!”

화륵! 화르르륵―!

바닥으로부터 시뻘건 화염이 솟구쳐 오르자 키메라는 얼른 물러선다. 이때 랜돌의 아공간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온다.

이번엔 와이번의 날개를 단 오우거이다.

쿠와아앙∼!

포효를 터뜨린 오우거의 거대한 동체가 하늘로 떠오른다. 날갯짓을 할 때마다 바닥의 먼지가 휘말려 올라간다.

그러던 어느 순간 곧장 현수를 향해 쇄도하며 커다란 몽둥이를 휘두른다.

쒸잉! 쒸이이잉―!

“윈드 캐논! 윈드 필드! 매스 윈드 커터!”

연달아 세 개의 마법이 구현되자 관중석의 마법사들이 감탄사를 터뜨린다.

사전에 메모리를 해두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연달아 세 개의 마법을 구현시키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윈드 캐논은 날개 달린 오우거에게 향했다.

윈드 필드는 랜돌이 서 있는 부위에서 발생되었는데 그와 동시에 여러 개의 윈드 커터가 섞여들었다.

같은 성질을 가진 것이라 구별해 내는 것이 쉽지 않다.

위이잉! 위이잉! 쐐에엥! 슈아앙!

“아앗! 쉬, 쉴드! 배리어! 큭! 아악! 케에엑!”

화들짝 놀라 쉴드를 치려 했으나 강력한 바람에 휘말려 마나가 흩어진다. 하여 얼른 배리어를 구현시키려 했다.

쉴드보다 월등하게 강력한 방어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윈드 커터가 더 빨랐다.

회전하는 둥근 톱날처럼 생긴 윈드 커터는 윈드 필드에 섞여 있어 형체가 분명하지 않다. 하여 순식간에 손목이 베었다. 그리곤 머리가 동체로부터 분리되었다.

털썩―! 쿵! 툭, 떼구르르! 슈악―!

스르르 무릎을 꿇더니 동체가 엎어진다.

이 순간 잘린 머리가 등 위에 떨어지더니 옆으로 굴러떨어진다. 곧이어 잘린 목으로부터 선혈이 뿜어진다.

“……!”

관중들은 잠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대부분 한 사람이 대결 중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라 생각할 것이다.

“와아아아아―!”

“핫산! 핫산! 핫산!”

움츠렸다 튀어 오르는 것처럼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핫산의 이름을 연호했다.

윈드 필드에 윈드 커터를 섞으면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를 볼 수 있었기에 환호하는 것이다.

“핫산! 수고했습니다! 덕분에 수법 하나를 알았습니다!”

“핫산! 정말 교묘한 수법이었다! 잘했다, 잘했어!”

마법사들은 새로운 조합의 마법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듯 계속해서 핫산을 연호했다.

“이 대결의 승자는 핫산 브리프임을 선언합니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

관중들은 환호성과 더불어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었다.

현수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대결장 밖에 있는 승자들의 대기소로 들어갔다.

“……!”

기 진행된 대결에서 승리를 취한 20여 명의 마법사가 현수를 바라본다. 승자끼리 대결이 있을 예정이므로 누구와 맞붙을지는 알 수 없다. 승자가 모두 가려지면 제비를 뽑아 상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번 영주 선발대회에서 새롭게 남작령을 차지할 인물은 88명이다. 이 자리를 얻기 위해 무려 1,408명의 마법사가 참가 신청을 했다.

숫자만으로 따지면 16 : 1의 경쟁률이다. 하지만 이 숫자는 의미가 없다.

실제론 1,321 : 1이기 때문이다.

87명의 최강자가 남작위를 받고, 나머지 한 자리를 놓고 전 인원이 대결을 벌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1차는 1,408명이 704명으로 줄 때까지 대결한다. 다시 말해 704번의 대결이 진행되어야 1차 선발이 끝난다.

2차는 이 인원이 352명으로 줄어들 때까지 대결한다. 1차에 선발된 승자끼리의 대결이다.

3차는 176번의 대결을 벌인다. 이 대결에서 승리한 88명은 남작위를 받게 된다.

물론 작위를 내리기 전에 신분조회가 이루어진다. 혹시라도 반 로렌카 전선의 마법사가 끼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충성 맹세를 한다. 공작과 후작은 황제가 직접 작위를 하사하지만 백작은 제국의 실세 공작인 내무대신이 작위식을 거행한다.

자작은 후작이 작위식을 거행하며, 가장 낮은 남작은 내무부 실무 책임자인 백작이 작위를 내린다.

지난 며칠간 계속해서 대결이 이어졌다. 아침 일찍 시작된 대회는 하루에 약 50여 번의 대결이 이루어진다.

1차만 704번의 대결이 이루어져야 하니 약 14일이 걸린다. 2차는 7일, 3차는 4일이 걸린다.

이렇게 하여 모두 25일이 소요된다.

남작 선발대회가 끝나면 잠시의 휴식기가 주어진다. 이 기간 동안 새로 작위를 받는 자들은 예복을 맞춰 입는다.

아울러 제국의 귀족으로서 가져야 할 품위나 예법 등에 대한 교육이 실시된다. 물론 가족 관계 등도 철저히 조사한다.

작위를 받는 본인은 물론이고 배우자와 직계 자식 또한 제국의 귀족 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올해 새롭게 선발되는 21명의 자작과 16명의 백작, 그리고 5명의 후작과 2명의 공작을 선발하는 대회는 신임 남작들이 예법 등을 교육받는 동안 이루어진다.

21명을 뽑는 자작은 84명이 신청했다.

첫날 1차 선발이 끝나고 이튿날 모든 과정이 끝난다.

16명의 신임 백작 자리를 노리는 자는 64명이다.

백작위 역시 2일 만에 대상자가 결정된다.

20명이 신청한 후작 선발대회 역시 이틀이 걸린다. 고서클인지라 쉽게 승자가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8명이 신청한 신임 공작 자리 역시 이틀에 걸쳐 선발이 끝난다.

이렇게 8일간의 대결이 이루어지는 동안 신임 남작에 대한 교육과 가족 관계 조사 등이 진행된다.

하여 행정을 담당하는 자들은 그야말로 사타구니에서 방울 소리가 들릴 정도로 바쁘게 뛰어다녀야 한다.

자작 이상은 이미 작위를 가진 자가 참여하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따로 예절 교육 등을 하지는 않는다.

황제를 대신하여 황태자가 친림하는 것은 후작과 공작이 결정되는 날이다. 이날은 황태자비들은 물론이고 다른 황족들 모두 관람한다.

그리고 이날 승자들에게 주어질 미녀들이 공개된다.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순으로 미녀들을 고르게 된다. 각각은 제비뽑기를 하여 순번을 정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습이다.

미녀들을 보기 위해 관중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리기에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지지만 지금껏 불미스런 사고는 단 한 번도 빚어지지 않았다.

33일간의 잔치가 끝나 대상자가 결정되면 2일간의 말미를 두고 36일째 되는 날 공작과 후작에 대한 작위식이 거행된다. 신임 공작과 후작은 이날 다시 한 번 제비뽑기를 하여 영지를 선택하게 된다.

37일째 되는 날엔 백작과 자작에 대한 작위식이 치러진다. 이들 역시 제비뽑기로 영지를 갖게 된다.

38일째 되는 날엔 남작들에 대한 작위식을 하고, 영지 선택을 위한 제비뽑기를 한다.

그리고 이틀간 대대적인 잔치를 벌인다.

새로 영주가 된 사람들을 축하하는 시간이며, 신임 영주들은 입맛에 맞는 행정관을 채용하는 시간이다.

축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40일간의 영주 선발대회는 30년이 흐른 뒤에 다시 개최될 것이다.

현수는 승자 대기실에 들어가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탁자 위엔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술과 음식 등이 놓여 있다.

모두의 시선을 받고 있지만 당당하게 걸어가 음식을 덜어왔다. 그리곤 그것을 먹으려는데 누군가 말을 건다.

“이봐, 자네 상대는 누구였나?”

“어떤 마법으로 이겼지?”

“상대는 어찌 되었나?”

굳이 대꾸하지 않아도 된다. 다 경쟁자인 때문이다. 하지만 현수는 그러지 않았다.

“내 상대는 랜돌 프아킨이었소.”

“아, 랜돌? 그 친구 6서클 유저인데, 키메라 전문이라 상대하기에 까다로웠겠네.”

누군가 랜돌을 아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어찌 되었나?”

“윈드 커터에 목이 잘려서 죽었소.”

“……!”

사람의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흑마법사들이지만 동료의 죽음은 마음에 걸리는지 잠시 아무런 말도 없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허어! 겨우 윈드 커터에?”

“그러게. 천하의 랜돌 프아킨이 겨우 2서클 마법에 목숨을 잃었군.”

몇몇은 랜돌에 대해 아는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덜어온 것을 다 먹고 한 번 더 먹을 즈음 문이 열린다.

삐이꺽―!

“오오, 라만세! 이겼군!”

“후우, 이겼지. 근데… 이렇게 되었네.”

이번 대결에서 손목이 절단된 모양이다. 포션을 부어 상처는 치료했지만 통증이 느껴지는 듯 이맛살을 찌푸린다.

“상대는?”

“익스플로전으로 머리를 터뜨려 버렸네. 감히 내 손목을 이렇게 했으니 용서할 수가 없었지.”

“그래, 그랬군. 그나저나 손이 그래서 2차에 나서긴 힘들 것 같은데, 포기할 건가?”

“…승자 대기소가 어떤지 보고 싶어서 왔네. 2차는 포기하고 고향으로 가야지.”

“이런! 고생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안되었네. 곧장 낙향할 건가?”

라만세라 불린 마법사는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아니. 볼 게 많을 것 같아 관중석에 있을 예정이네.”

“그래, 그게 좋겠지. 배울 바가 많을 거야.”

“그렇길 바라네.”

둘의 대화가 끝나도록 다른 마법사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대결에서 패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평생을 병신으로 살아가게 될 수도 있음을 상기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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