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7
1장 할 말 있습니다
“그래? 그대의 이름은 뭔가?”
황태자의 시선을 받은 현수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핫산 브리프라 합니다.”
“그래, 할 말이란 무엇인가?”
모든 관중의 시선이 황태자에서 현수에게로 옮겨간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늘같은 황태자에게 물을 것이 있다고 했는지 이야기해 보라는 표정이다.
“남작위를 받게 되면 자작위에 도전 못하는 겁니까?”
“…무슨 소린가, 그게?”
“대결을 통해 승자가 되면 작위를 얻는 게 영주 선발대회가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
모든 이의 시선이 현수에게서 황태자에게, 황태자로부터 다시 현수에게로 옮겨간다.
“제가 알기론 작위를 얻으려면 최하 조건을 갖춰야…….”
현수가 말한 요지는 다음과 같다.
서클 수는 중요하지 않다.
이기는 자가 작위를 얻으니 대결에 임할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더라도 자작위에 도전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황태자는 현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7서클이군. 그런데 아직 마스터는 아니네.’
황태자는 올해 156세이다. 그리고 9서클 마스터이기도 하다. 그러니 현수의 화후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는 현수가 그렇게 느끼도록 조절한 결과이다.
황태자가 자신의 마나 링을 살필 때 일곱 개의 링이 있는 것처럼 조절했다.
이 순간 맞은편의 이마르 이사틴은 현수로부터 뿜어지는 마나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제기랄! 확실하군. 에이! 하필이면 이런 상대를 만나냐? 어이구, 이놈의 손모가지! 다른 놈도 많은데 하필이면 왜 이놈을 뽑았냐. 제기랄!’
현수가 아닌 다른 상대였다면 여유 있게 승리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에구!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어쩐지 1차와 2차 모두 이기더라. 차라리 1차에서 졌으면 덜 억울할 텐데.’
이마르는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기분이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산준령이다. 하여 한발 물러서려는데 황태자가 입을 연다.
“허락해 주면 자작위에 도전할 것인가?”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황태자는 새파랗게 젊은 현수를 보고 피식 웃었다.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7서클에 오르면서 바디 체인지를 한 모양이다.
아직 마스터에 이르지는 못했으니 백작위에 도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자작위를 선택했어야 하는데 완전히 하향 지원하여 남작위에 도전했다.
현수의 맞은편에 있는 이마르 이사틴을 살펴보니 6서클 마법사이다. 현수가 7서클이니 쉽게 이길 것이다.
‘웃기는 놈이군.’
대결에서 이기고 나면 남작위를 얻게 된다. 그런데 그것으로 만족을 못하는 모양이다.
“허락하면 도전하겠는가?”
“그래주시면 저야 고맙지요.”
“조건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자작위에 도전했다가 패하면 남작위도 잃게 되네.”
“……!”
현수는 황태자의 말을 금방 이해하지 못했다. 하여 잠시 머뭇거릴 때 황태자가 다시 입을 연다.
“자작위에 도전했다가 패하면 자네의 맞은편에 있는 자에게 자네가 받을 남작령이 가게 될 것이다. 그래도 좋은가?”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또 하나의 조건이 있네.”
“말씀하시지요.”
현수는 황태자와 시선을 맞췄다.
“이제 내가 내는 문제를 그 자리에 서서 맞혀야 하네. 어떠한 도구도 없이 오로지 두뇌로만 말이네. 하겠는가?”
“말씀하십시오.”
“좋아. 잘 들어보게. 한 여인이 있었네. 그녀는…….”
황태자가 낸 문제는 나이를 맞히는 문제이다.
이 여인은 인생의 6분의 1을 소녀로 지냈다.
그리고 인생의 12분이 1이 더 지난 후에 남자 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다시 7분의 1이 더 지나고 나서 결혼을 했다.
결혼 후 5년 만에 예쁜 딸을 낳았는데 그 아이는 어미 인생의 절반을 살았다. 딸이 죽자 슬픔에 잠긴 이 여인은 4년간 시름에 잠겨 있다 세상을 떠났다.
황태자는 한번 맞혀보라는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보았다. 황궁에서도 몇 명밖에 맞히지 못한 난제이다.
이 문제를 냈을 때 모두들 종이를 찾아 끄적거리기에 바빴다. 그리고 30분이 가장 짧은 시간에 맞힌 것이다.
마법에 사용되는 수학과 궤를 달리하는 문제이기에 지구에서라면 중학생도 맞힐 수 있는 문제를 소위 천재라 불리는 고위마법사들이 많은 시간을 소모한 것이다.
황태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중석이 술렁인다. 그리곤 저마다 뭔가를 꺼내 계산하기에 바빴다.
마법사 특유의 경쟁심과 탐구심의 발로이다.
하지만 현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문제를 다 듣고 머릿속으로 방정식을 만들어 푸는 중이기 때문이다.
황태자는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 보자는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약 1분이 지났다.
“황태자 전하, 답을 말해도 됩니까?”
“호오! 벌써 답을 구했다고?”
황태자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힐만 공작을 바라본다. 그가 30분 만에 이 문제를 맞힌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네, 답을 구했습니다.”
“좋아, 말해보게. 틀려도 한 번은 더 풀 기회를 주지.”
현수는 그럴 필요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답은 84세입니다.”
“으음!”
황태자와 힐만 공작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불과 1분 만에 이 문제를 맞힐 것이라곤 생각지 못한 때문이다.
현수가 세운 식은 두 가지이다.
이 분수식을 통분하여 계산하면 이다.
분모를 이항하면 9x = 9·84니까 84세가 답인 것이다.
또 다른 식은 다음과 같다.
이를 계산해도 x의 값은 84가 나온다. 불과 1분 만에 두 개의 방정식을 세워 계산과 검산까지 마친 것이다.
관중석의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현수를 마주하고 있는 이마르 이사틴 역시 입을 딱 벌리고 있다.
자신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벌써 다 풀어버렸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제 답이 틀렸습니까?”
“아니다. 맞았다. 생각보다 뛰어나군. 좋다. 자네만 특별히 서클 수에 관계없이 상위 작위에 도전할 기회를 주지.”
“감사합니다.”
현수가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여주자 황태자는 핫산의 욕심이 어디에서 끝날지 문득 궁금해졌다.
하여 한마디 더 보탰다.
“자작위를 얻으면 백작위에도 도전하겠는가?”
“…그것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황태자가 보기에 핫산 브리프는 참으로 맹랑한 녀석이다.
“좋아. 황태자의 권한으로 그대에게만 특별히 허락하지. 기왕이면 공작위까지 도전하게. 대신…….”
황태자가 잠시 말을 끊자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남작, 자작, 백작, 후작위를 순서대로 얻어야 공작위에 도전할 수 있네. 알겠는가?”
“…좋습니다.”
“와아아아! 핫산! 핫산! 핫산! 핫산!”
관중석에서 열화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온다.
황태자는 흡족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자신의 의도대로 마법사들의 의지가 활활 타오르고 있음이 느껴진 때문이다.
“힐만 공작, 핫산의 대결이 결정되면 내게 보고하게.”
황태자의 시선을 받은 공작은 허리를 직각으로 꺾는다.
“네, 황태자 전하. 그렇게 하지요.”
“오랜만에 흥미롭군. 안 그런가?”
“그러합니다. 근데 7서클이라 운이 좋으면 백작까지는 어떻게 되겠지만 그 위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후작에 도전하는 자들 가운데는 9서클 마스터급도 끼어 있더군요.”
황태자는 잘 알고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저자에게 내 연공실을 개방해 주게.”
“네? 전하의 전용 연공실을요?”
“그래, 내 연공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줘. 그래야 조금 더 버티지 않겠나?”
“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힐만 공작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황태자 전용 연공실은 특별하다. 그곳엔 1서클부터 9서클까지 모든 마법서가 완비되어 있다. 무려 2,000여 권이다. 마인트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이 총망라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고효율 마나집적진이 그려져 있어 다른 곳보다 훨씬 더 진하고 많은 마나가 모여든다.
이외에도 중력장조절진도 그려져 있다.
중력을 2∼10배 정도 강하게 해주어 그 안에서 수련할 경우 보다 민첩한 움직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아울러 또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 이건 가봐야 안다.
“자, 그럼 남작위를 결정하는 마지막 대결을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 준비되셨지요?”
대결 진행자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이마르 이사틴은 대답 대신 한 발짝 물러난다.
“저는 이 대결, 기권합니다.”
“네? 뭐라고요?”
“저는 핫산 브리프 님께서 자작에 이어 백작과 후작, 그리고 공작까지 올라가실 수 있도록 기권하겠습니다.”
“와아아! 이마르 용자다!”
“그래, 이마르! 잘했다, 잘했어!”
“좋아, 핫산이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두고 보자.”
관중들의 환호 속에 이마르는 물러섰다.
‘자작위? 7서클이라도 마스터급이 아니면 힘들지. 크흐흐! 자작위에 도전했다가 지면 그때는 내가…….’
현수가 자작위 도전에 실패하면 남작령은 이마르의 것이 된다. 황태자가 만인환시 중에 내뱉은 말이다.
그러니 핫산이 한 번이라도 지면 자신은 당당한 남작이 된다. 사람들은 최종 대결을 포기한 자신에게 손가락질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멋지게 퇴장하기 때문이다.
“이마르 이사틴 님께서 대결을 포기하셨으므로 남작위 결정전 마지막 대결은 핫산 브리프 님의 승리입니다.”
관중들은 대결 진행자의 다음 멘트를 기다렸다.
“이로써 88명의 남작위를 받으실 분이 결정되었습니다. 오늘의 대결은 이로써 끝입니다. 내일부터는 자작위 결정전이 시작됩니다.”
“와아아아아!”
관중들은 내일부터 보다 수준 높은 대결을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환호성을 터뜨린다.
“일동 기립!”
대결 진행자가 소리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선다.
모든 이의 시선은 황태자에게 향해 있다. 예상대로 퇴장하려 자리에서 일어난 상태이다.
사람들의 눈을 호강시켜 준 미녀들도 모두 일어서 있다.
그렇기에 멋있게 퇴장하려는 이마르에게 시선을 준 이는 아무도 없다.
“황태자 전하께서 퇴장하십니다.”
로렌카력 330년에 벌어진 영주 선발대회 남작위 결정전은 이로써 끝이 났다.
* * *
“여러분, 오늘의 첫 대결은 핫산 브리프와 브라만 헤리온 남작님이십니다.”
“와와와와! 핫산! 핫산! 핫산!”
“브라만! 브라만! 브라만! 브라만!”
대결 진행자의 발언에 관중석이 들썩인다.
황태자에게 당돌한 제안을 한 핫산 브리프는 단 하루 만에 로렌카 제국의 수도 맥마흔의 최고 스타가 되었다.
서클 수에 관계없이 승리하면 계속해서 올라가도 좋다는 황태자의 특별 허락을 받은 것이 입소문을 탄 것이다.
하여 어제는 시내의 모든 주점에서 핫산 브리프라는 이름이 오르내렸다.
오늘 아침, 자작위에 도전한 64명과 특별히 추가된 현수가 모여 제비뽑기를 하였다. 그 결과 현수는 첫 번째 대결자로 결정되었다. 상대는 7서클 마스터급인 남작이다.
“자, 두 분, 입장해 주십시오.”
진행자의 발언에 따라 둘은 통로를 따라 대결장으로 올라갔다. 거의 동시에 햇살에 노출되자 환호성이 울려 퍼진다.
“핫산! 핫산! 핫산! 핫산!”
사람들은 일제히 핫산을 연호한다.
현수가 7서클 마법사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황태자의 측근이 소문을 흘린 때문이다.
“내 연공실은 쓰지도 못했군.”
“그렇습니다. 하필이면 제1대결의 심지를 뽑아…….”
힐만 공작은 약간 비스듬하게 앉은 황태자에게 시선을 주고 있다. 같은 9서클 마스터이지만 본인보다 더 실력 있는 마법사이다. 그리고 차기 황제가 될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