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1
“7서클인데도 트리플 캐스팅이 너무나 능란해요. 엄청난 수련을 한 모양입니다.”
“하하! 정비와 차비 또한 그렇게 보았소?”
“네, 전하.”
둘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며 살짝 고개를 숙이자 황태자는 기분이 좋아졌다.
“저자에게 상을 내려야겠소. 정비와 차비는 어떤 것이 좋다 생각하오?”
“전하께오서 관심을 가지시는 자이니 싸미라를 하사한 건 어떨까 싶사옵니다.”
“아! 좋은 생각이십니다. 저도 적극 동의합니다.”
“싸미라를?”
금은보화나 마나석, 또는 마법서를 주라고 할 줄 짐작하고 있던 황태자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린다.
싸미라는 올해 스무 살이 된 아름다운 여인으로 백작가의 여식이다. 너무도 아름다워 수도의 모든 귀족가에서 군침을 흘리고 있다.
그럼에도 직접적으로 청혼을 한다는 등의 행동을 한 귀족가는 없다. 장차 제국의 하늘이 될 황태자가 눈여겨본다는 풍문이 나돈 때문이다.
괜히 황태자가 노리고 있는 여인을 차지했다가 멸문지화까지는 아니지만 영원히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는 불상사를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힐만 공작도 그러하오?”
“그건… 네. 싸미라 정도면 아주 흡족한 상이 될 겁니다.”
3장 백작, 후작, 공작!
힐만 공작이 잠시 말을 끊은 건 정비와 차비의 시선을 받은 때문이다. 정치란 남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장차 제1황후와 제2황후가 될 여인들에게 밉보여 좋을 게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마음에도 없지만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 것이다.
황태자는 힐만 공작의 이런 상황을 모른다. 하여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때 정비가 나선다.
“전하, 세상에는 많은 미녀가 있사옵니다. 이번 영주 선발대회 통과자에게 하사하기로 결정된 여인 중에도 참으로 아름다운 미녀들이 있지요.”
“네, 제가 보았을 때 아르센 대륙 라수스 협곡 출신 다프네는 싸미라보다도 월등한 미녀이옵니다.”
황태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황궁 행정처로부터 출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번 영주 선발대회의 승자에게 하사될 여인들에 대해 점고를 해달라는 것이다.
점고는 황태자만 하는 것이 아닌지라 황태자 집무실이 아닌 황궁 로비에서 진행되었다.
30명의 실세 공작이 참여한 점고에서 만장일치로 아름다움을 인정받은 존재가 바로 다프네이다.
사람들의 시각은 각각 다르다.
누군가에겐 좋지만 내겐 별로일 수 있고, 내 눈엔 좋아 보이지만 타인에겐 그저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만장일치였다.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기에 소문이 번졌고, 결국 정비와 차비가 다프네를 처소로 불러들여 확인했다.
둘 다 한때 세상을 풍미한 절세미녀이다.
그럼에도 다프네를 보는 순간 왠지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잡을 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황태자의 첩실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출신이다. 다프네는 아르센 대륙에서 사온 노예이다.
타 대륙 여인을 황태자의 측실로 삼아선 안 된다. 자칫 황실의 혈통을 더럽히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한 노예 출신인 것도 문제이다. 하늘과 땅만큼 신분의 차이가 있어 결코 맺어질 수 없는 것이다.
황태자에겐 억울한 일이고, 다프네에겐 다행한 일이다. 그렇기에 승자에게 주어지는 상품이 된 것이다.
당시 힐만 공작은 몹시 아쉬워하는 황태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전하,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 할지라도 세월이 흐르면 그 아름다움이 흐려지는 법이옵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말이 있으니 아쉽겠지만 마음을 접으시옵소서.”
“그런가?”
“네, 전하께서 품으시기에 너무나 천합니다. 옥체에 흠이 될 듯하오니 마음을 거두시지요. 돌밭에는 씨를 뿌리지 않는 게 좋다 하지 않습니까.”
“알았다. 충언을 받아들이지.”
당시 힐만 공작은 정비와 차비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자칫 황태자의 총애가 다프네에게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하, 싸미라를 준비시킬까요?”
“…그러게. 드마인 백작에게 내 뜻을 전하게. 핫산은 한 번 더 이겨야 백작이 되지만 패해도 자작위는 받을 것이니 그리 큰 손해는 아닐 것이라 하고.”
“네, 전하. 드마인 백작은 기꺼운 마음일 겁니다. 핫산은 전하께오서 관심을 갖는 자이니 말입니다.”
힐만 공작의 말은 사실이다.
황태자가 눈여겨보는 인물은 출세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오늘 보여준 것은 황태자뿐만 아니라 모든 마법사가 눈여겨볼 만한 것이다. 현수가 로렌카 제국의 마법사라면 지금 출셋길이 열린 것이다.
그런 핫산에게 딸을 내어주는 드마인 백작가 또한 혜택을 입는다. 차기 황제가 콕 집어서 중매를 섰으니 분명히 후사를 책임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내 연공실을 핫산에게 개방하게.”
“물론입니다.”
황태자와 정비, 그리고 차비가 퇴장할 때까지 관중들은 예를 갖추느라 모두 일어서 있다.
황태자 퇴장 후 현수는 힐만 공작을 따라 다시 연공실로 되돌아갔다. 가는 동안 힐만 공작이 한마디 한다.
“늘 겸손하라. 그리고 충심을 잃지 마라. 전하께서 너를 눈여겨보고 계신다. 그리고 곧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싸미라라는 미녀를 안겨주겠다는 뜻이다. 물론 현수는 전혀 짐작도 못할 일이다.
“감사합니다.”
“내게 감사할 일이 아니라 전하께 감사해야지. 그분께 충성하는 것이 은총에 대한 보답이다.”
“알겠습니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힐만 공작은 흡족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공작이 물러간 뒤 현수는 서가의 마법서들을 읽기 시작했다. 또 하루의 여유가 주어졌으니 나머지도 읽어둘 생각이다.
“흐음! 이건 괜찮군.”
아르센 대륙의 아이스 포그와 비슷한 마법이 있다.
스무디 포그라는 이름의 마법이다. 흑마법사의 마법답게 희뿌연 색깔의 운무가 피어오른다.
그런데 독을 품고 있다.
느닷없이 번개가 치기 때문이다. 문제는 랜덤이라는 것이다. 번개가 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하나일 수도 있고 여러 개일 수도 있다.
스무디 포그 안에 들어 있는 자는 어둠 속에서 번개를 맞이하게 된다. 감전되면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게 된다.
요행히 번개를 피했다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 잠깐이지만 시력을 잃게 된다.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것이다.
“흐음! 이건 연구해 볼 만하네.”
현수는 침식을 잊고 마법 연구에 몰두했다. 모처럼 흥미 있는 소재를 찾은 과학자 같은 기분이 된 것이다.
그렇게 180일 정도가 흘렀다.
미완성이던 스무디 마법은 가칭 썬더 인 클라우드(Thunder in cloud)라는 새로운 마법으로 탈바꿈했다.
흑마법에서 착안은 했지만 월등하게 개선시키고 안정시킨 것인지라 이실리프 마법서를 꺼내 거기에 기록했다.
이 마법 수식의 아래엔 제2대 마탑주인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이 마인트 대륙의 마법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해 두었다.
그러고 나니 괜스레 기분이 좋다. 뿌듯한 성취감이 느껴진 것이다.
“후후! 이 정도면 괜찮은 거 하나 건진 셈이네.”
현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때였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힐만 공작의 얼굴이 보인다.
“가세. 이제 곧 대결이네. 한데 성과가 있었나 보군.”
힐만 공작은 하루 만에 얼굴빛이 바뀐 현수를 보고 웃음 짓는다.
“네, 가죠. 제 상대는 누구입니까?”
가는 동안 상대에 대한 정보를 얻어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이니 당연한 일이다.
적이 어느 정도이고 내가 어느 정도인지를 명확히 알면 백 번 싸워도 한 번도 위태롭지 않다는 듯이다.
상대가 강하면 피하면 되고, 상대가 약하면 마음 놓고 공격을 퍼부을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번 상대는 가엘라 키피터 자작이네. 8서클 유저지만 마스터급이니 조심해야 하네. 특기는 화염계 마법이지. 특히 6서클 파이어 레인은 헬 파이어급이네.”
“그 밖에 조심할 점은요?”
“키메라를 아주 잘 부리네. 그리고 고블린의 몸에 하피의 날개를 단 것들을 주의하게. 하급 몬스터라 쉽게 생각했다간 큰코다치네.”
“숫자가 많은가 봅니다.”
“그렇지. 그보다는 놈들의 혈액이 트롤의 것이라는 거야. 상처를 입어도 즉시 재생되네. 어설프게 공격했다간 죽은 줄 알았던 놈들이 발목을 노리지.”
말이 된다. 웬만해선 죽은 시체가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에 방심하다 당할 수 있는 것이다.
힐만 공작은 가엘라 키피터 자작과 철천지원수라도 되는지 미주알고주알 말해주었다.
이런 마법으로 공격할 땐 이렇게 막으면 되고, 상대가 어떤 제스처를 취하고 있으면 룬어를 영창하는 중이니 기회를 놓치지 말고 공격을 퍼부으라는 조언도 해주었다.
덕분에 현수는 귀한 정보를 습득했다.
* * *
“와아아아! 와아아아! 핫산! 핫산! 핫산!”
현수가 대결장에 등장하자 관중들의 환호성이 엄청나게 커진다. 화제의 중심에 선 인물, 황태자가 각별히 아끼는 인물, 7서클이지만 8서클을 이긴 인물이다.
열화와 같은 응원을 보내는 관중을 살핀 현수는 귀빈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태자와 한 여인이 앉아 있다.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니 황태자는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든다. 그리곤 입모양으로 ‘이기게’라고 뜻을 전한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곤 상대편이 등장할 통로를 바라보았다. 이때 서른쯤으로 보이는 덩치 큰 사내가 들어선다.
가엘라 키피터 자작이다.
환호성의 중심이 자신이 아니라 핫산이라는 듣보잡에게 쏟아지는 것이 마뜩치 않다.
하여 가능하면 목숨을 끊어버릴 생각이다.
자신은 8서클 마스터에 가깝고 상대는 7서클 유저이다.
둘 사이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으니 승리는 어린아이 팔목 비틀기보다 쉬울 것이다.
지난 대결에서 8서클 마법사를 이겼다곤 하지만 상대의 의표를 찌른 공격에 당황한 나머지 반격할 타이밍을 놓쳐 패배한 것이다.
자신은 그따위 저급한 공격엔 당하지 않는다. 앱솔루트 배리어는 신체 전부를 막아주기 때문이다.
‘속전속결이야. 헬 파이어는 범위가 크고 타격도 크지만 마나 소모량이 너무 많으니 가급적 파이어 레인으로 기선을 제압해야 해.’
가엘라 키피터 자작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듯한 현수를 바라보고 비릿한 조소를 베어 문다. 잠시 후 시체가 될 놈이다. 그리고 나면 한 구의 구울, 또는 좀비가 될 것이다.
놈에게 영원한 안식이란 없다.
‘지금이 마지막으로 듣는 환호성일 거다.’
자작은 대결 진행자에게 시선을 준다. 어서 나와서 주의 사항을 전달하고 들어가라는 뜻이다. 그런데 나오질 않는다.
“이봐, 진행자. 어서 나오지 않고 뭐 하는가?”
“…죄송합니다, 자작님. 지금 내기 돈이 너무 크게 걸려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대회 진행자는 내기 돈을 관리하는 사내들에게 시선을 준다. 워낙 인원이 많고 액수도 많기에 내기 돈은 맥마흔의 밤을 지배하는 조직에서 관리한다.
조직이라 하여 조폭 같은 개념이 아니다.
맥마흔엔 상당히 많은 주민이 거주한다. 당연히 도둑, 강도, 소매치기, 사기꾼, 협잡꾼 등도 많다.
이들을 잡아 관에 압송하는 것이 조직이다. 그럼 정해진 상금이 수여된다. 일종의 자발적 야경단이다.
그렇기에 관중들이 기꺼이 내기 돈을 맡기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걸렸기에 그런 거야?”
자작의 물음에 진행자가 표 비슷한 것을 보더니 대꾸한다.
“현재까지 1,870만 골드가 걸렸습니다.”
“뭐? 얼마?”
자작이 놀란 듯한 표정을 짓는다. 한화로 18조 7,000억 원이다. 당연히 대경실색할 금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