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3
관중석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관중들로 그득하다.
12 대 1로 가엘라 키피터 자작에게 돈을 건 사람이 월등히 많지만 잃은 것은 잊기로 했는지 같이 소리를 지른다.
“핫산! 핫산! 핫산! 핫산! 핫산!”
승자 대기실에 있던 15명의 백작위 취득 예정자는 관중석의 고함에 놀라 모두가 대결장으로 나왔다.
당연히 이길 것이라 예상한 가엘라 키피터 자작은 죽었는지 들것에 실려 나가고 있다.
“세상에, 7서클 유저가 8서클 마스터급을 이겼어.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승자 중에는 가엘라 키피터 자작과 대결하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 자들도 있다.
8서클 유저들이다.
7서클 유저인 핫산을 뽑으면 아주 간단하게 작위를 얻을 것이라 생각하고 현수가 상대가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멍한 시선으로 현수를 바라보고 있다.
자신들조차 감당하기 버거운 8서클 마스터급 대마법사를 골로 보냈다. 어찌 믿어지겠는가! 하여 백작위 예정자 모두가 멍한 시선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함성은 관중석을 열두 바퀴나 돌았다. 그리고 숨이 찬지 잦아들었다. 이때 누군가 마나 실린 음성을 토한다.
“모두 조용!”
“……!”
힐만 공작의 한마디에 모두가 입을 다문 채 귀빈석으로 시선을 집중시킨다. 이때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늘의 승자 핫산 브리프 백작 예정자는 즉시 이 앞으로 오라!”
황태자의 시선을 받은 현수는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한다.
“…네, 알겠습니다.”
현수가 다가서자 귀빈석까지 이르는 통로가 저절로 열린다. 곧 백작이 되실 몸이다. 어쩌면 후작위를 차지할 수도 있고, 더 높이 올라가 하늘같은 공작님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하위 마법사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준 장본인이다. 하여 자발적으로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10만 명이 넘는 관중이 있지만 현수의 걸음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하나같이 현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척―!
황태자가 있는 귀빈석에 당도하자 힐만 공작이 설 자리를 지정해 준다. 그 자리에 멈춰 서자 황태자가 입을 연다.
“나 로렌카 제국의 황태자 슐레이만 로렌카는 오늘 참으로 대단한 대결을 목격했다. 서클 수를 초월한 값진 승리를 거둔 그대를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또 한 번 정중히 고개를 숙여주었다. 고개 따윈 백 번이라도 숙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주 선발대회 신청서의 기록을 보면 그대는 아직 미혼이다. 실로 그러한가?”
“…네, 그러합니다.”
이곳은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아르센에서도 아직 혼례를 올리지 않았으니 미혼인 것이 맞아 그렇게 썼다.
안 그러면 배우자의 성명, 그리고 자식이 있다면 그 성명까지 모두 기록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실종된 핫산 브리프 역시 미혼이다.
“좋아. 나는 축하의 의미로 그대에게 아내를 주지.”
“네? 그게 무슨……?”
현수의 멍한 표정을 바라본 황태자는 싱긋 미소 짓는다. 좋은 일이니 그냥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드마인 백작의 여식이자 ‘맥마흔의 요정’이라 불리는 싸미라, 그대는 이 사내의 아내가 되겠는가?”
지금껏 황태자의 곁에 앉아 있던 절세미녀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다.
“네, 전하.”
“하하! 하하하! 참으로 기쁘도다. 이로써 싸미라는 핫산 브리프 백작 예정자의 아내가 되었다. 황태자의 권한으로 둘의 혼인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바이다.”
“와아아아! 와아아아!”
관중석에서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린다.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이곳 사람들은 싸미라가 맥마흔의 요정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하여 드마인 백작의 저택 앞에는 늘 사내들이 득실거렸다. 싸미라의 자태를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 것이다.
물론 황태자가 싸미라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청혼을 하는 등의 일은 없었다.
오늘 황태자는 점찍어둔 절세미녀를 핫산 브리프 백작 예정자에게 하사했다. 이것의 의미는 참으로 중차대하다.
핫산 브리프가 황태자의 마음에 쏙 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장차 그가 권력의 실세가 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제 핫산 브리프의 세상이 열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오늘 이 자리를 빌려 우리 로렌카 제국의 마법사들에게 말한다.”
“……!”
황태자의 마나 섞인 위엄 넘치는 소리에 관중들은 또 한 번 시선을 집중시킨다. 또 무슨 말을 할까 싶은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황태자는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나는 핫산 브리프 백작 예정자에게 내가 아끼던 싸미라를 아내로 하사했다.”
황태자는 본인이 싸미라를 어찌하고 싶었음을 감추지 않는다. 이런 속내를 만인환시 중에 드러내는 것은 황제와 황태자는 법적으로 무치(無恥)인 때문이다.
무치란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으로, 무엇을 하든 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황제와 황태자는 주신의 가호 아래 놓인 성역이기 때문이다.
관중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황태자의 말이 구구절절 모두 사실이기 때문이다.
“핫산 브리프 백작 예정자가 더 이상의 도전을 멈춘다면 추가로 두 명의 미녀를 상으로 받게 될 것이고, 공작위까지 오른다면 네 명의 미녀를 고를 수 있는 특전을 얻게 된다.”
현수는 모르지만 로렌카 제국의 백작에 봉해지면 약 40만㎢짜리 영지를 하사받는다.
참고로 지구엔 252개 국가가 있다.
이 중 국토 면적 60위인 파라과이는 40만 6,752㎢이다. 61위는 짐바브웨로 39만 757㎢에 달한다.
백작이 되면 이 정도 면적을 다스린다. 가히 일국의 국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는 것이다.
참고로 일본은 62위로 37만 7,915㎢이고, 109위인 대한민국은 9만 9,720㎢이다.
자작이 딱 대한민국만 한 영지를 운영한다.
어쨌거나 후작령은 백작의 영지보다 세 배가량 넓다. 그리고 공작령은 후작령의 세 배 규모이다.
만일 현수가 공작위까지 얻게 된다면 황제로부터 무려 360만㎢짜리 영지를 하사받게 된다.
참고로 지구 7위 국가인 인도의 영토는 328만 7,263㎢이다. 인도의 현재 인구는 12억 3,634만 명으로 지나에 이어 세계 2위이다.
이러니 영지를 차지하려고 기를 쓰는 것이다.
물론 인구수는 지구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적다.
굳이 따져보자면 100분의 1 수준이다. 하여 공작이 되면 약 1,200만 명이나 되는 영지민을 다스리게 된다.
“어쩌겠는가? 그대는 후작위에도 도전을 하겠는가?”
황태자는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현재 후작위를 노리는 사람 대부분이 9서클 마법사이다. 유저도 있지만 마스터급도 있다.
마스터가 된 지 오래지 않아 노련한 선배 마법사들을 감당할 수 없음을 자인하고 하향 안정 지원한 자들이다.
현수는 7서클 유저로 소문나 있다. 9서클 마스터인 황태자와 힐만 공작도 그렇게 파악하고 있다.
오늘 7서클이지만 8서클 마스터급 마법사를 이겼다.
하지만 상대가 9서클이라면 조금 어렵지 않겠나 싶어 물은 것이다.
오늘 사용한 마법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스무디 포그라는 불안정한 마법과 비슷하긴 한데 그보다는 훨씬 더 운무가 짙었다. 그리고 매번 벼락이 생성되었다.
따라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마법이라 생각하는 중이다.
그게 무언지는 나중에 물을 예정이다.
어쨌거나 황태자가 보기에 핫산 브리프는 장래가 촉망되는 마법사이다. 후작위나 공작위에 도전했다가 조금 전 목숨을 잃은 가엘라 키피터 자작 같은 꼴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맥마흔의 요정이라는 싸미라를 아내로 하사했다.
아름다운 여인을 맞이하며 뼈와 살이 타는 밤을 보내라는 의미이다. 그러려면 이제 대결을 멈춰야 한다.
그렇기에 은근슬쩍 압력을 넣은 것이다.
그런데 현수는 예서 멈출 수 없다. 얻으려는 여인이 싸미라가 아닌 다프네이기 때문이다.
“어쩌겠는가, 핫산 브리프? 자네는 내일부터 시작될 후작위 결정전에 도전하겠는가?”
“…황태자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후작위를 노리는 사람들은 9서클 마스터급도 있네.”
“…그래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현수는 일부러 시간을 끈 뒤 대답했다. 망설이는 기색으로 여기라는 의도이다.
“흐음! 정녕 그러한가?”
“네, 제가 후작위를 얻는 것이 황태자 전하께 입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합니다. 도전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 핫산! 핫산! 핫산!”
관중석이 또 한 번 들썩인다. 어쩌면 내일 또 기적 같은 역전승이 빚어질지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오늘 내기에서 큰돈을 벌거나 잃은 사람들 모두 안색이 밝아진다. 내일 더 큰돈을 벌게 되거나 잃은 본전을 되찾을 기회가 생긴 때문이다.
“좋아. 본인의 뜻이 그러하다면 허락하지.”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관중들은 또 한 번 환호성을 터뜨린다.
“와와와와와와와와와!”
잠시 시간이 흐른 후 황태자가 손을 들자 모두가 입을 다문다. 아직 얘기가 안 끝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시금 고요해지자 황태자가 입을 연다.
“지금껏 매 30년마다 영주 선발대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 기간이 너무 길다. 하여 앞으로는 매 10년에 한 번씩 영주 선발대회를 개최할 것이다.”
“우와와와와와와와와!”
관중석의 환호성이 엄청나게 크다. 전혀 기대치 않은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황태자가 다시 손을 들자 또 고요해진다.
“핫산 브리프 백작 예정자는 7서클 마법사이다. 그럼에도 8서클 마스터 이상이 되어야 참가할 자격을 얻는 후작위 결정 대결에 임하게 되었다.”
“……!”
“나는 핫산 브리프 백작 예정자가 또 한 번의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7서클이 9서클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다는 발언이다.
이 말이 평범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당장 면박을 당했을 것이다. 서클 수가 두 개나 차이나기 때문이다. 이는 유치원생과 격투기 선수의 대결에 비교될 만한 차이이다.
그런데 발언한 장본인이 황태자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9서클 마스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진짜 기적이 또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여 모두들 진지한 표정으로 시선을 집중한다.
“하여 다음 대회부터는 서클 수의 제한을 없애기로 한다. 누구든 쟁취하고 싶은 작위에 도전하라. 승자는 권력과 미인을 얻을 것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황태자 전하 만세! 만세! 만세!”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엄청나다. 마치 본인이 작위를 얻은 것 같은 심정인 모양이다.
하긴 10년만 죽어라고 한 우물을 파면 뭔가를 이루어도 이룰 것이다. 서클 수가 늘어날 수도 있고 마법적 경지가 한결 깊어질 수도 있다.
10년 후엔 본인이 대결장에 승리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상상하는 모양이다. 하면 환호함이 마땅하다.
현수는 강한 카리스마로 관중을 사로잡고 탁월한 언변으로 그들의 심사를 쥐고 흔드는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본인에게 해되는 일을 한 바 없다. 오히려 혜택을 주어 좋기만 하다. 그렇기에 정중하게 예까지 갖추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흑마법사들의 수장이 될 인물이다.
조금 더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사악한 일을 자행하고 있다면 의당 목숨을 끊어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아 다프네만 데리고 가더라도 반드시 주지시킬 것들이 있다.
첫째, 더 이상 아르센 대륙의 여인들을 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타향에 끌려와 알지도 못하는 사내들을 위한 상이 되는 건 바라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