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5
“가는 동안 드마인 백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해줄 수 있겠어?”
“네, 당연히 말씀드려야지요. 저희 드마인 백작가는…….”
마차가 달리는 동안 싸미라의 설명이 이어진다.
드마인 백작가는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 중 하나이다. 건국 당시 공을 세워 초대 가주가 백작위를 하사받았다.
이후로 계속해서 후대를 이어 현재에 이르렀다.
현 가주는 초대 가주의 13대손이다. 그리고 3서클 마법사이다. 정상적으로 대를 이어왔기에 거의 초보 마법사 수준임에도 백작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 가주 때는 괜찮았는데 차츰 가세가 기울어 현재는 백작과 싸미라, 그리고 남동생 무하드만 남았다. 그리고 마부 겸 하인인 토른과 유모 겸 시녀인 셀마가 있다.
“근데 싸미라는 마법을 안 익혔나?”
“네, 저는 마나친화력이 없어서 못 익혔사옵니다.”
“흐음, 그래?”
싸미라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빛을 반짝인다.
“부군, 혹시 무하드가 마법을 익힐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실 수 있는지요?”
“무하드도 마나친화력이 없어?”
“네, 그래서 걱정이에요. 가문의 대를 이을 녀석인데 할 줄 아는 게 너무 없어요.”
싸미라는 얕은 한숨을 쉰다. 가문의 미래를 생각하면 너무나 막막하기 때문이다.
본인이야 타고난 미모가 있으니 귀족가로 시집을 가면 그만이다. 아마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 것이다.
문제는 허약한 부친과 무능력한 동생이다. 쇠락해 가는 가문이라 다른 귀족들과의 교류도 예전 같지 않다.
아버지가 황궁에서 행정 업무를 보고 있느니 녹을 받아 먹고사는 건 어떻게 해결되는데 저축할 수준은 아니다.
동생은 할 줄 아는 게 없어 매일 빈둥거린다.
여유가 있다면 행정학을 가르치는 아카데미라도 보낼 텐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라 야단을 칠 수도 없다.
다가닥다가닥! 다가닥다가닥!
두 마리 말이 달리기 시작한다. 복잡한 도심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그렇게 10여 분을 달렸다.
“워, 워! 그래, 그래! 옳지, 착하다! 워, 워!”
어느 정도 달린 후 익숙한 솜씨로 마차를 세운 토른은 얼른 발판을 챙겨놓는다.
“아가씨, 그리고 백작님, 당도하였습니다요.”
“알았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약간 침울해 있던 싸미라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씩씩하게 대답한다.
벌컥―!
현수가 먼저 문을 열고 내려섰다. 고풍스런 저택이 눈에 보인다. 글자 그대로 고풍이다.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눈앞의 저택은 지어진 지 330년가량 된 노후 대형 주택이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삭은 부분이 보인다.
“겨울엔 춥겠군.”
“어머! 어떻게 딱 보자마자 아셨어요? 겨울엔 진짜 추워요. 너무 추워서 밤에 잘 때도 두꺼운 옷을 입고 자요.”
맥마흔 최고의 미녀가 너무도 불쌍하게 살고 있다.
예전엔 남들이 있을 때는 일부러 도도한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본의가 아니다. 그래야 더 높은 귀족가에서 데려가려 줄 설 것이기 때문에 취한 행동이다.
그러다 포기했다. 황태자가 눈독 들인다는 소문이 번진 직후의 일이다.
그런데 자신과 황태자는 맺어질 수 없다. 정비와 차비가 단단히 방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싸미라는 지금 현수를 부군이라 생각하고 있다.
결혼식을 올린 것도 아니고 첫날밤을 치른 것도 아니며 둘 사이에 아이를 출산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처럼 순종적으로 대하는 것은 황태자의 말이 곧 법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현수는 이제 자신의 부군이다. 따라서 그간 가식적으로 행동하던 것들을 모두 걷어냈다.
평생 진심으로 대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신뢰는 당연하다. 존경하고 흠모까지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서 시작된다고 배웠기에 더없이 공손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지구의 장가 못 간 총각들이 보면 몹시 부러워할 일이다. 절세미녀가 알아서 받들어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게다가 아무런 요구 조건도 없다.
비싼 브랜드 가방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외제 수입차를 타고 싶다고 하지도 않는다.
호화스런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번쩍이는 보석 반지를 받고 싶다며 칭얼거리지도 않는다.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 생각한다. 그러니 노총각들이 부러워할 만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현수는 모른다.
그저 하룻밤 유숙할 집에 온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가는 적당히 치르면 된다. 하여 이것저것 살피는 중이다.
“저 마차는 자주 이용해?”
“네, 저거 하나밖에 없어서 외출할 땐 꼭 쓰지요.”
“그래? 그렇군.”
보통 여자 같으면 요 대목에서 ‘왜요?’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싸미라는 그러지 않는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아버지께서 기다리실 겁니다.”
“그러지.”
싸미라의 뒤를 따르는 동안 현수는 하룻밤 숙박의 대가로 무엇을 주면 좋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정말 가세가 많이 기운 듯하다. 누군가 잘 관리하여 정갈하기는 하지만 낡았음이 한눈에 들어온다.
‘흐음! 돈을 준다면 얼마를 주지? 참, 황태자가 10만 골드를 지참금으로 하사한다고 했으니 돈은 괜찮겠군.’
한화로 1,000억 원을 받을 예정이다. 그 정도면 이 집을 다 부수고 새로 지어도 될 거금이다.
그리고 아껴 쓰기만 하면 적어도 몇 대는 귀족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종자돈이 될 것이다.
“흐음, 돈은 되었고, 그럼 무엇을 주지?”
두리번거리는 동안 고풍스런 문 앞에 당도했다.
똑, 똑, 똑―!
“아버지, 저 싸미라예요.”
“오, 그래! 어서 들어오너라!”
삐이꺽―!
이 동네는 모든 경첩이 다 녹슨 모양이다. 마찰음이 귀에 거슬린다.
‘재봉틀 기름이나 줄까?’
집에서도 쓰고 내다 팔면 돈이 될 것이다. 이곳엔 윤활유라는 개념이 없으니 취급만 하면 잘 팔릴 것이다.
‘근데 양이 얼마 없잖아. 쩝! 안 되겠네.’
마트에서 재봉틀을 팔지 않으니 당연히 기름 또한 조금밖에 없다.
마트에서 바지 기장 등을 조절해 주는 곳에서 쓰던 것과 라면 공장에서 생산 라인 관리에 쓰려던 것뿐이다.
“아버지, 핫산 브리프 백작 예정자님과 함께 왔어요.”
“누구?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그 기적의 사나이?”
현수의 이름을 단번에 알아차리는 걸 보면 소문이 나기는 확실히 난 모양이다.
“네,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혼인을 권하셨어요.”
“황태자님께서 뭐를 권해?”
“저와 핫산 브리프 백작 예정자님과의 혼례요. 정복자의 거리에 있는 저택 한 채와 10만 골드를 지참금으로 하사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뭐? 정말?”
드마인 백작은 자리에 앉아 옛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그걸 받았는지 기억나지 않아 차용증을 찾던 중이다.
그게 있다면 몇 푼이라도 회수하여 살림에 보탤 수 있기에 아침부터 지금까지 먼지 풀풀 날리는 서류들과 씨름했다.
물론 아직 찾지 못한 상태이다. 찾아도 소용없다. 이미 상환된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돈을 받았는데 주머니 속에서 푼돈처럼 녹아나가 기억을 못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차용증을 찾는 동안 빌려준 돈의 액수가 기억났다. 10골드이다. 한화로 약 1,000만 원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빌려줬는지는 영 생각나지 않아 고심하던 중이다.
자신은 10골드 때문에 하루 종일 서류와 씨름했는데 외출했다 돌아온 딸은 결혼을 하게 되었으며, 10만 골드를 하사받을 예정이라고 한다.
당연히 대경실색할 일이다.
하여 눈을 크게 뜨고 그 말이 사실이냐는 표정으로 딸을 바라본다. 이때 현수가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드마인 백작님? 핫산 브리프라 합니다.”
들어서면서 살펴보니 싸미라의 부친 드마인 백작은 40대 초반이다. 약간 말랐는데 신경질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흑마법을 3서클이 되도록 익혔다고 하는데 서클 수가 낮아서 그런지 사악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아, 네. 어, 어서 오십시오.”
핫산 브리프는 황태자가 깊은 관심을 보이는 존재이다. 방금 들은 딸의 말에 의하면 백작 예정자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대결에서도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아무런 실권도 없이 귀족 명부에 이름만 올라가 있는 자신과 비교했을 때 반딧불과 태양 정도의 차이이다.
6대 조상이 노름빚에 몰리지만 않았다면 파라과이와 짐바브웨의 중간 정도 되는 크기의 영지에서 나오는 소출만으로도 충분히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빚쟁이들의 협박을 못 이겨 영지를 넘긴 것은 가문의 수치가 되었다.
당시의 가주는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스스로 목숨을 끓어 조상들에게 죄를 빌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드마인 백작가의 사람들은 노름하는 자와는 상종도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드마인 백작은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 현수를 맞이했다.
“아버지, 내일 후작위 1차 대결이 있어요. 그래서 연공실이 필요해요.”
“네? 후작위에도 도전하십니까? 7서클이라 들었는데 후작위 하면 거의 다 9서클 마법사님들이…….”
“오늘 대결하신 분은 가엘라 키피터 자작님이셨어요.”
“뭐? 가엘라 키피터 자작? 거의 8서클 마스터급인데?”
“네, 그럼에도 우리 핫산 브리프 님에게 지셨어요.”
“허어! 어떻게 그런 일이? 정녕 서클의 벽을 넘었다는 말이냐?”
드마인 백작은 대경실색할 일이라는 표정이다. 이에 싸미라는 자랑스럽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핫산 브리프 님은 3서클도 안 되는 마법만으로 가엘라 키피터 자작님의 목숨을 취하셨지요.”
“죽었어? 가엘라 키피터 자작이? 정말?”
심히 놀랍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8서클 마스터가 천수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네, 대결에서 패하면서 돌아가셨어요.”
“허어!”
드마인 백작은 입을 딱 벌린다. 할 말 없음이다.
“아무튼 내일 대결을 위해 연공실이 필요하시대요. 아버지의 연공실을 써도 되죠?”
“그럼, 그럼! 얼마든지 쓰셔도 된다. 어, 어서 안내해 드리거라.”
드마인 백작은 크게 고개를 끄덕여 강한 찬성의 뜻을 표한다. 이때 싸미라가 다시 입을 연다.
“아버지, 핫산 브리프 님은 이제 아버지의 사위가 될 사람이에요. 어쩌면 후작님이나 공작님이 되실지 모르지만 그래도 사윈데… 존대는 좀 그래요.”
“그, 그러하냐? 아, 알았다. 하여간 어서 연공실로……. 내일의 대결이 훨씬 중요하니 어서…….”
드마인 백작은 존대를 하기에도 그렇고 하대를 하자니 껄끄럽기에 말끝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있다.
“네, 아무튼 연공실로 모실게요.”
“시, 식사는?”
“제가 알아서 챙겨드릴 거예요, 아버지.”
핫산 브리프는 이제 평생을 모시고 살 부군이다.
아내로서 당연히 극진히 대접해야 하기에 싸미라는 기꺼운 마음으로 미소 짓고 있다. 마음을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부군이 생긴 게 너무도 즐거운 때문이다.
잠시 후, 현수는 드마인 백작의 연공실로 들어섰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흔적이 역력하다.
뭔가가 썩는 냄새도 난다. 보아하니 환기구가 없다.
“클린! 클린! 에어 퓨리파잉!”
두어 번의 마법만으로도 금방 정갈해지고 탁한 공기도 정화된다.
“죄송해요. 이렇게 오실 줄 몰라서……. 계시는 동안엔 매일매일 청소하도록 할게요.”
“……!”
현수는 뭐라 이야기해야 할지 난감하다.
자신은 이곳에 하룻밤만 머물 생각으로 왔다.
황태자가 혼인을 하라고 했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오로지 다프네를 구해서 이곳을 떠날 생각뿐이다.
그런데 싸미라는 자신을 정말 부군으로 대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