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6
다프네와 비견될 정도로 몹시 아름다운 여인인 것만은 분명하다. 몰락했지만 백작가의 영애이고 매우 순수하고 선량한 듯 여겨진다.
이런 여인이 진심을 다해 수발을 들겠다는 표정으로 졸졸 따라다니니 마음이 불편하다.
“대결을 위해 마법 수련에 몰두하면 내일 오전까지 안 나올 확률이 매우 높아. 그러니 저녁 식사나 내일 아침 식사는 걱정하지 마.”
“네? 어떻게 두 끼나 굶어요?”
건강상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다.
“내일 대결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두 끼쯤 굶는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 그러니 이 문이 닫히면 내일 아침까지 아무도 오지 않도록 해주는 게 날 돕는 거야.”
“…그래도…….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출출할 때 요기하실 약간의 음식과 물이라도 가져다 놓을게요.”
싸미라는 남편의 건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여기기에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후다닥 달려간다.
“흐으음!”
현수는 마음이 불편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곳은 싸미라의 집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저런 일로 다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내일 대결 또한 7서클 이내의 마법만으로 9서클 마법사를 꺾어야 하기 때문이다.
싸미라가 오기 전에는 결계를 치고 들어갈 수가 없어 연공실을 살펴보았다.
7서클 마법서까지 서가에 꽂혀 있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꺼내 보지 않았는지 먼지가 수북하다.
“클린!”
먼지를 청소하고 한 권을 뽑아서 살펴보았다.
황태자의 서고에 있던 것과 별반 다름없는데 룬어의 배열이 조금 더 복잡하다. 내친김에 다른 것들도 꺼내 보았다. 그것 역시 복잡하다. 덜 정제된 느낌이 강하다.
‘이건 천재들이나 익히겠군.’
드마인 백작가가 쇠락한 이유는 마법서가 너무 난해한 때문이다. 자세히 설명해야 할 부분은 훌쩍 뛰어넘었고, 술술 넘어가도 될 부분은 필요 이상으로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 정도면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쉽게 서클 수를 늘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흑마법서들을 줄 수는 없지.’
흑마법을 없애야 하는 입장인지라 마법서들을 도로 꽂아놓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1∼3서클 마법서들을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저서클 마법은 백마법과 별 차이가 없다. 어떤 건 이실리프 마법서의 것과 유사했다.
“흐음! 이렇단 말이지.”
황태자의 서고에서 본 마법서들도 이러했다. 3서클 이내의 마법들은 백마법과 크게 궤를 달리하지 않는다. 어떤 건 흑마법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광명정대하기도 하다.
고개를 끄덕인 현수는 연공실 바닥에 고효율 마나집적진을 그렸다. 당연히 마무리는 인비저빌러티이다.
중력조절진도 곁들어 4G가 되도록 했다.
안에서 수련을 하다 바깥으로 나가면 육중한 갑옷을 입고 있다 벗은 것처럼 몸이 가뿐해질 것이다.
벽에는 실내 기온을 25℃를 유지케 하는 항온마법진을 부착시켰다. 아울러 디휴미디피케이션(Dehumidification) 제습마법진도 그려 넣었다. 지하라 습기가 많이 찬 때문이다.
“흐음! 이 정도면……. 환기구가 없는 게 아쉽네.”
사방이 꽉 막혀 있어 조용하기는 하지만 연공실 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공기순환이 어려운 구조이다.
“뭐, 뭐든지 일장일단이 있으니까.”
일련의 작업을 마쳤을 때 싸미라가 들어온다. 하녀 셀마와 함께이다. 50살은 되었을 다소 통통한 여인이다.
“백작님을 뵈옵니다.”
“……!”
현수는 가볍게 고개만 까딱거렸다.
차원이동을 할 때마다 느끼는 불편 중 하나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하대를 해야 하는 것이다.
지구인의 관점에서 보면 싸가지 없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곳은 철저한 신분 사회이다. 그렇기에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귀족과 평민, 그리고 노예의 차이가 분명했다.
본인은 이실리프 왕국의 국왕이며 이실리프 마탑주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 하대해도 되는 위치에 있으니 웬만하면 반말을 해야 하는데 내키지 않는다.
그렇기에 셀마의 인사를 대꾸 없이 받은 것이다.
“이건 출출할 때 드셔요. 여기에 놓고 나갈게요.”
싸미라는 셀마가 들고 온 소반을 연공실 한편에 얌전히 내려놓는다. 작은 항아리가 보이는데 물을 담아온 듯하다.
“싸미라, 내일 오전까지는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
“네, 책임지고 개미 한 마리도 오지 못하도록 할게요. 마음 편히 머무셔요. 셀마, 이만 가요.”
“네, 아가씨. 백작님, 이만 물러가옵니다.”
셀마는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뒷걸음질로 물러선다. 싸미라 역시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는 바깥으로 나간다.
“셀마에게 존댓말을 쓰네.”
문이 닫히자 현수가 중얼거린 말이다. 귀족이 하녀에게 말을 높이는 경우는 거의 없기에 다소 신선했다.
사실 셀마는 싸미라에게 엄마 같은 존재이다.
어려서 모친을 잃은 싸미라를 기르다시피 했다. 그렇기에 존중의 의미로 존댓말을 썼는데 그게 습관이 된 것이다.
“싸미라는 괜찮은 여인이군.”
고개를 끄덕인 현수는 이내 앱솔루트 배리어를 쳤다. 그리곤 안에 들어가 타임딜레이 마법을 구현시켰다.
다시 180일간의 고련이 시작된 것이다.
“흐음! 누가 봐도 7서클 이내인 마법만으로 9서클을 이겨야 하는 상황이군. 재미있겠어.”
10서클이니 9서클 마스터와의 대결이 겁나지 않는다.
여차하면 같은 9서클 마법으로 조져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한번 찾아보지.”
아공간 속의 현수는 편안한 얼굴로 이실리프 마법서를 뒤적였다. 힌트를 찾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실마리를 찾으면 풀어내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마법을 창안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마법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 * *
“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관중석의 함성이 대기석까지 뒤흔든다. 잠시 후에 벌어질 대결에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는 반증이다.
황태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 덕분에 현수는 후작 선발 1차 대결 최종 경기에 참가한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줄 테니 마법을 연마하고 나오라는 배려이다.
“자네가 상대할 자는 무스타 하로겐 백작일세. 9서클 유저이지. 현혹 계열 마법의 대가이네. 적에게 환상을 보여주고 목을 취하네.”
“……!”
현수의 곁에선 힐만 공작이 연신 입을 놀리고 있다.
힐만 공작은 황태자로부터 명을 받아 현수에게 고급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지만 현수의 입장에선 왠지 아랫사람으로부터 보고받는 기분이다.
“저 친구의 마법은 아주 자연스러우면서 지독하네. 자네가 대결장 한복판에 있다는 것을 아주 잠시라도 잊으면 끝장이네. 그러니 정신 바싹 차려야 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기대해도 되겠는가?”
황태자는 핫산 브리프가 이기길 바란다. 그래야 제국의 마법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나태하던 마법사들이 정신을 차리면 제국은 일신 우일신 하게 된다. 본인이 치세할 세상이 보다 좋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핫산이 7서클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오늘 상대할 무스타 하로겐 백작은 9서클 유저이지만 거의 마스터급이다. 다른 마법도 시전할 줄 알지만 현혹계열 마법에 특화되어 남다르기 때문이다.
이래서 뭐든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황태자는 현수가 이기길 바란다.
요 대목에서 맥없이 져버리면 활활 타오르던 불에 냉수를 끼얹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심히 걱정되기에 힐만 공작으로 하여금 어떤지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자, 다음은 오늘의 최종 대결입니다. 파란의 연속인 핫산 브리프 백작 예정자님과 무스타 하로겐 백작님 간의 대결입니다. 여러분, 흥미롭지요?”
“네!”
관중들이 일제히 대답하자 진행자는 관중들의 시선을 끈 것이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오늘의 대결! 세간의 이목이 초집중된 이 대결의 승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진행자는 다시 한 번 관중들을 휘둘러보곤 서쪽 통로를 손으로 가리킨다.
“자, 이제 곧 저곳에서 9서클 마스터급이라는 평을 받는 무스타 하로센 백작님께서 등장하실 겁니다.”
잠시 말을 끊고는 반대편 통로를 가리킨다.
“저곳에선 7서클 유저이지만 8서클 마스터급을 패퇴시키고 당당하게 후작위에 도전하는 핫산 브리프 백작님이 나올 예정입니다.”
진행자는 모든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자 우쭐한 기분이 든다. 하여 저도 모르게 귀빈석을 바라본다.
“이 대목에서 이번 대결의 진행자인 제가 위대하신 황태자님께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으잉? 나?’
황태자는 이런 표정으로 진행자를 바라본다. 시선을 받은 진행자는 주제 넘는 질문을 했다.
“에… 황태자님께서는 오늘의 대결에서 누가 이길 거라 예상하십니까? 심히 궁금합니다.”
“……!”
황태자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곁으로 온 힐만 공작에게 시선을 준다.
“힐만 공작, 저놈 어디 소속인지 알아봐서 오늘 대결이 끝나는 즉시 대륙 끝으로 보내 버려.”
“…네, 전하.”
힐만 공작은 찍소리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황태자가 핫산 브리프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9서클 마스터급 대마법사 무스타 하로겐 백작은 변경백이다.
둘 중 누가 이기겠느냐는 물음은 우문이다.
그리고 감히 하늘같은 황태자에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한 괘씸죄의 대가는 귀양살이이다. 그렇기에 즉시 치부책을 꺼내 ‘진행자 귀양’이라고 기록한다.
그러는 동안 황태자는 본래의 신색으로 관중석을 일람하고는 진행자를 바라본다.
“방금 누가 이길 것이냐고 물었느냐?”
“그, 그러하옵니다, 전하.”
물어놓고 생각해 보니 이건 반쯤 죽을죄다. 하여 벌벌 떨며 고개를 조아린다. 내뱉은 말을 부인할 수 없어서이다.
“더 강한 자가 이긴다. 이게 내 대답이다.”
“와아아아! 와아아아! 핫산! 핫산! 핫산!”
관중들이 또다시 고함을 지른다. 9서클 마스터급 대마법사를 꺾어 강함을 증명하라는 의도이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인 대결을 시작하기 위해 두 분을 이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둘 다 백작급 이상인지라 진행자는 극존칭을 쓴다.
“먼저 핫산 브리프 백작님 나오십시오. 그리고 무스타 하로겐 백작님도 나와주십시오.”
둥둥둥둥! 두둥, 두둥! 두두둥! 두두두둥! 둥둥!
큰 북이 울리며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이때 현수와 무스타 하로겐 백작이 대결장에 나타났다.
“와아아아아! 핫산! 핫산! 핫산!”
“무스타! 무스타! 무스타! 와아아아아아!”
6장 꽃의 여신 베누스
마치 중립국에서 치러지는 한일전에서 한국과 일본의 축구 팬들이 고함을 지르는 듯 서로 다른 이름을 연호하며 환호성을 지른다.
이러는 사이에 둘은 대결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진행자는 절차에 따라 주의 사항을 일러주곤 즉시 물러난다.
현수와 무스타 하로겐 백작은 상대를 빤히 바라본다. 그러는 사이에 엄청난 액수의 돈이 걸리기 시작한다.
가엘라 키피터 자작과 핫산 브리프의 대결 때엔 2,300만 골드의 내기 돈이 걸렸다. 역대 최고 금액이다.
그런데 지금 그 기록이 깨지고 있다.
관중석 한복판에서 집계하고 있는 사내가 커다란 흑판 같은 것에 석필로 내기에 걸린 금액을 기록하고 있다.
핫산 브리프 백작이 승리할 것이라는 데 걸린 금액은 약 80만 골드이다.
무스타 하로겐 백작 쪽엔 2,560만 골드가 걸렸다.
1 대 32로 원―사이드한 비율이다.
핫산 브리프가 비록 승승장구했지만 압도적으로 무스타 하로겐 백작이 유리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