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8
현수와 맞붙게 된 8서클 마스터는 불안한 표정이다. 내일은 목숨을 잃는 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8서클 마스터가 7서클 유저와의 대결에 겁을 먹는 모습은 아마 유사 이래 처음일 것이다.
내일 대결 일정이 결정되자 황태자는 다시 한 번 미녀들을 등장시켰다.
164명이 모두 나오는 동안 관중석은 또 한 번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10년 후엔 본인도 저런 미녀를 품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자, 마지막 미녀입니다. 지난번에 아주 폭발적인 반응이 있었지요. 소개합니다. 아르센 대륙 라수스 협곡 출신 다프네 양입니다.”
“와아아아아! 다프네! 다프네! 다프네! 와아아아!”
관중들이 어서 나오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나옵니다! 요정 중의 요정! 다프네!”
“다프네! 다프네! 다프네! 다프네! 와아아아아!”
“와아아아! 와아아아아!”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하늘하늘한 옷을 걸친 다프네에게 시선을 집중시킨다.
딱 한 번 등장했지만 다프네는 ‘베누스(Venus)’라는 별명이 생겼다. ‘꽃의 여신’이라는 뜻의 마인트 어이다.
다프네는 연한 베이지색 원피스를 걸쳤다. 허리엔 그리스 산토리니 마을에서 사용하는 파란색 요대가 걸려 있다.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 그리고 섹시한 둔부에 얼굴까지 받쳐준다. 과연 꽃의 여신이라는 애칭에 걸맞다.
현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프네를 보았다. 당장에라도 구해줘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후작위를 위한 대결부터는 황태자를 비롯한 황족 모두가 참관한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공작이 배석해 있다.
며칠 전엔 공작 30명에 후작 60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공작 50명에 후작 100여 명이 모여 있다.
엄두도 못 낼 상황이다.
‘끄응!’
나직한 침음을 낸 현수는 다프네가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러지 않는다.
다프네는 입장할 때부터 지금까지 펄펄 뛰는 반대쪽 관중들에게 시선을 주고 있다. 너무 멀어서 얼굴조차 식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바라보는 것이다.
‘날 봐, 다프네. 널 구하려 내가 왔어.’
현수의 바람은 무산되었다. 잠시 후, 164명의 미녀가 모두 퇴장했다.
“부군의 승리를 감축드려요.”
싸미라는 양손으로 치마의 양쪽을 잡고 살짝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인다.
“배당금은 받았어?”
“호호! 네. 우리 이제 큰 부자예요.”
오늘 아침, 대결에 임하기 전에 현수는 싸미라를 불렀다. 그리곤 시내의 상단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금괴를 팔아 10만 골드짜리 전표를 지급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대결에 걸라고 지시했다.
물론 본인의 승리이다.
조금 전 싸미라를 대신한 토른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330만 골드에 해당하는 전표를 받아왔다. 원금 10만 골드와 배당금 320만 골드이다.
방금 싸미라는 토른을 아침에 들렀던 상단으로 보냈다. 수수료를 내고 아침에 팔았던 금괴를 되돌려 받기 위함이다.
1골드가 100만 원인 세상이다. 따라서 배당금으로 받은 320만 골드는 한화로 3조 2,000억 원이나 된다.
이 돈은 전액 드마인 백작가에 기증하기로 했다.
배당이 32배나 되어 액수가 엄청 커졌지만 몰락한 가문을 되살리라는 의미로 주었다.
싸미라는 부군이 된 현수가 돈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가문을 위해 어쩌면 잃을 수도 있는 10만 골드를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놓을 때 알아본 것이다.
사실은 100% 이길 것을 확신하기에 내놓았다. 그런데 이런 속사정을 모르니 오해한 것이다.
“부군, 오늘은 소녀가 부군께 식사 대접을 하고 싶어요.”
“싸미라가?”
“네, 부군을 맥마흔 최고의 식당으로 모시려고요.”
맥마흔 도심 한복판엔 초호화판인 ‘헐떡거리는 늑대의 발톱’이란 괴상한 이름의 식당이 있다.
보기 드문 7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는데 음식 맛이 좋아 늘 줄을 서서 대기해야 입장 가능한 식당이다.
당연히 엄청 비싸다. 1인당 한 끼에 10골드이다. 무려 1천만 원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늘 만원이다. 돈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고위 귀족들이 단골이기 때문이다.
싸미라도 이곳을 알고 있다.
소문이 무성하니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은 없다. 그곳을 드나들 만한 돈이 없기 때문이다.
황태자가 싸미라에게 눈독을 들이지 않았다면 골빈 사내들이 거의 매일 그곳으로 초대했을 것이다. 불행히도 소문이 먼저 번져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돈이 생겼다. 그것도 엄청난 돈이.
사치를 부리거나 낭비하는 성품이 아니지만 오늘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가고 싶다. 부군과의 첫 외식이니 최고급으로 모시려는 것이다.
“최고의 식당이라고?”
“네, 헐떡거리는 늑대의 발톱이란…….”
싸미라는 재잘대는 종달새처럼 속삭인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설명하는 것이다.
문득 귀엽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듣고 보니 그 식당의 메인 메뉴가 퓨전 요리인 듯싶다.
“흐음!”
현수는 이곳에 와서 맛본 음식들을 떠올려 보았다.
나름 맛은 있었지만 최고라는 느낌은 없었다. 차라리 본인이 만든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싸미라, 거기 사람이 많다며?”
“네, 요즘은 더 많을 거예요. 지방에서 온 마법사님이 많이 찾으니까요. 그래도 맛은 최고래요.”
“그래? 그럼 아버지는?”
“아버진 그런 데 싫어하셔요. 번거롭고 시끄럽다고.”
싸미라의 말은 반만 참이다.
드마인 백작이 헐떡거리는 늑대의 발톱이란 초호화 식당을 안 가는 이유는 100% 돈이 없어서이다.
10골드는 드마인 백작가의 석 달 생활비이다. 그걸 고작 한 끼 해결하자고 쓸 성품이 아닌 것이다.
“싸미라, 내가 한 요리 하는데 차라리 집에 가서 먹는 게 낫지 않을까? 오붓하게.”
“…네, 그래요. 그게 좋겠어요.”
싸미라는 오붓하게라는 말에 뿅 간 듯한 표정이다.
“아! 어서 오시게. 오늘도 승리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네. 감축하네. 정말 대단하네. 9서클 마법사를 이기다니…….”
드마인 백작 역시 마법사이다. 비록 3서클 유저 수준이지만 명색이 마법사인지라 늘 높은 곳을 꿈꿨다.
그런데 4서클의 벽이 너무 높아 아예 포기했다. 그러면서도 요즘은 가끔 연공실에서 밤을 새웠다.
황궁에서 일을 하다 보면 울화통이 치밀곤 한다. 나이도 어리고 작위도 낮은 자작 하나가 가끔 들이받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작위를 존중해 주는 듯하지만 뒤에선 겨우 3서클 초보 마법사에 영지도 잃어버린 쓰레기 같은 백작이라며 구시렁거린다.
이 소리를 못 들었다면 괜찮겠지만 우연히 들었다. 그것도 여러 번 들었다. 불러서 야단을 치고 싶지만 그래 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귀족 특유의 오만함과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 그리고 완전히 사라져 버린 싸가지를 보면 그러하다.
하여 가끔은 심상 대결을 한다. 물론 100전 100패이다. 자신은 3서클 유저이고 상대는 6서클 유저이다.
무려 3서클이나 차이가 나기에 번번이 깨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위가 될 핫산 브리프는 자신보다 훨씬 높은 화후의 마법사들을 통쾌하게 깨고 있다.
대리만족이 느껴진다.
오늘은 지난 수년간 꼴 보기 싫을 정도로 오만하게 굴던 자작 놈이 식사를 같이하자고 청했다.
웬일인가 싶어 생각해 보니 인기 절정인 핫산 브리프가 사위가 된다는 소문이 돌아서인 듯하다.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핫산은 백작위가 확실하다.
그리고 황태자가 눈여겨보고 있으니 작위를 얻으면 황궁에서 근무할 확률이 매우 높다.
자작 놈은 자신의 상사로 현수가 부임하게 될 경우 지금껏 깔보던 드마인 백작이 문제라 생각했다. 둘은 장인과 사위 관계이기 때문이다.
핫산은 작위도 높고 서클 수도 많기에 대들 수도 없다.
그랬다간 하극상으로 처벌을 받거나 심한 응징을 당할 것이다. 하여 먼저 드마인 백작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런 걸 보면 완전 제 편할 대로 사는 놈이다.
깔보고 씹다가도 자신에게 불리해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안면을 바꾸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이다.
드마인 백작은 속내를 짐작하고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그놈 쌍판을 앞에 두고 식사를 했다간 체할 것 같아서이다.
어쨌거나 사위 덕을 보았다. 그리고 본인이 자작 놈을 작살 내놓은 듯한 쾌감을 느꼈다.
저서클 마법사라도 마법을 효율적으로 섞을 경우 고위마법사를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렇기에 이토록 환대하는 것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아닐세, 아니야.”
드마인 백작은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나 딸의 부군이 된 핫산 브리프가 너무도 마음에 든다.
“오늘 같은 날 술 한잔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지요?”
“네, 오늘은 한잔하세요. 다만 내일 2차 결전이 있으니 조금만 마시세요.”
“그럼, 그럼. 백작과 후작은 하늘과 땅의 차이라네.”
백작은 40만㎢ 영지를 다스리고, 후작은 120만㎢를 다스리게 된다. 당연히 엄청난 차이이다.
드마인 백작의 말이 끝날 때 누군가 들어선다.
“다녀왔습니다.”
18세쯤 된 잘생긴 청년이다.
“아, 무하드! 매형이시다. 어서 인사드려라.”
“아, 그래요? 안녕하세요? 무하드라 합니다.”
외출했다 돌아온 무하드는 현수를 보자마자 눈빛을 빛낸다. 황태자께서 직접 지목해 준 매형이기 때문이다.
7장 공작위 결정전
오늘 아주 오랜만에 어린 시절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사교 모임이 있는데 나오라는 것이다.
가문이 쇠락한 후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녀석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못 보았기에 기쁜 마음으로 연회장엘 갔다.
그곳엔 장성하여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 친구들이 있었다.
아울러 코흘리개 찌질이던 친구의 여동생들도 다 큰 숙녀가 되어 있었다. 무려 8년 만의 만남이다.
무하드는 몇 잔의 술을 마셨다. 이곳에선 열여섯 살만 넘으면 성인 대접을 해주니 문제가 없다.
그러다 우연히 왜 자신을 초대했는지 알게 되었다.
핫산 브리프!
황태자가 직접 누나와 맺어준 촉망받는 매형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이 자리에 초대받은 것이다.
개중엔 누나가 받게 될 지참금 10만 골드 중 일부를 어째 보려는 반쯤 사기꾼인 녀석도 있었다.
가슴만 클 뿐 머릿속에 든 게 적은 여자애들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은밀히 유혹했다. 권력 실세와 가까이 있어야 콩고물이라도 묻기 때문이다.
전후를 파악한 무하드는 부드럽게 상황을 마무리하고 귀가했다.
귀가하며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무위도식하는 삶을 살았다. 앞으로는 스스로 개척하는 삶을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매형이 될 핫산 브리프가 끼친 영향이다.
도착 즉시 연공실로 내려가 그간 내려놓고 있던 마법서를 다시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매형이 와 있다.
하여 상기된 표정으로 인사를 올린 것이다.
“핫산 브리프라 하네. 무하드라고?”
“네, 앞으로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그래, 도울 수 있으면 돕지.”
무하드와 인사를 나눈 현수는 싸미라의 안내를 받아 주방으로 내려갔다.
“셀마, 백작님께서 손수 요리를 하시겠대요.”
“어머, 정말요?”
사내가 주방엘 드나들면 불알이 떨어진다는 속담을 있는 나라이다. 그런데 고위 귀족 본인이 직접 요리를 한다니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일단 라이트!”
파앗―!
하얀 광구가 허공에 생성되자 어둠이 확 밀려난다.
“끄응! 워싱, 클린! 워싱, 클린! 워싱, 클린!”
어두컴컴한 주방은 곳곳이 묵은 때로 오염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