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1
“네, 감사합니다, 전하! 그리고 정비마마, 차비마마.”
“호호! 축하해요.
“저도요. 멋졌어요.”
정비와 차비까지 환히 웃으며 대꾸해 주자 황태자가 다시 입을 연다.
“정말 절묘했어. 내가 자네에게 정말 감탄했네. 블링크에 이은 아공간이라니……. 그건 정말 신의 한 수였네. 우리 모두의 의표를 찌른.”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현수는 짐짓 겸양을 떨었다.
“아냐, 아냐. 그건 운이 아니지. 탁월한 전략이었네. 참, 에단 듀크 후작의 목숨을 거두지 않은 건 잘한 일이네.”
“……?”
황태자의 말에 현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눈만 크게 떴을 뿐이다. 그럼 무슨 뜻인지 설명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후작을 따르는 세력이 적지 않네. 장차 자네의 운신에 큰 도움을 줄 것이야.”
“아, 네에.”
정치 이야기였다. 현수는 동의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최종 대결이 남았지?”
“네.”
“상대가 누구이든 최선을 다해주게. 내가 자네를 주시하고 있음을 잊지 말고.”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하하하!”
황태자는 현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파안대소를 터뜨린다.
현수 덕분에 사람 보는 눈이 탁월하다는 평가가 추가되어 기분이 좋은 것이다.
“참, 싸미라.”
“네, 전하.”
“너에게 주기로 한 지참금 중 일부인 저택이 정해졌다. 윈스톰 공작가와 사리젠 공작가 사이의 것이다.”
“네? 거기라면…….”
싸미라가 이토록 놀란 표정을 짓는 이유는 황태자가 말한 것이 정복자의 길 좌우의 저택 중 가장 큰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작이 아니라면 건사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규모가 크며 호화롭다.
원 주인은 10년 전 세수 6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전임 재상 알폰소 공작이다. 참고로 약 400년을 로렌카 제국의 재상직에 머물렀던 인물이다.
초대 황제의 동료이자 친구이기도 한데 평생 황제의 뜻을 거역하고 동정의 몸을 간직한 인물이다.
다시 말해 여자의 알몸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본 적이 없는 보건복지부가 보증하는 총각이다.
아무런 후사 없이 세상을 떴기에 알폰소 공작의 모든 재산은 국고에 귀속되었다. 그것 중 일부인 수도의 저택을 주겠다는 것이다.
“정말이십니까?”
“싸미라, 황태자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 않는다.”
“아! 죄송합니다.”
싸미라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조아린다. 이런 모습이 귀엽고 신선하게 보인 듯하다.
“그래, 부군인 핫산 브리프와는 합방을 했느냐?”
“네? 아, 아직……. 죄송합니다.”
“하하! 죄송은 무슨. 잘했다, 잘했어. 내일 대결이 끝날 때까진 뭐든 미뤄다오. 자칫 내가 아끼는 핫산의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으니.”
“저, 전하……!”
싸미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처녀의 몸이다. 그러니 감당하기 힘든 농담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린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황태자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이때 대결 진행자의 수신호에 따라 검은 깃발이 내려간다.
알몬 만스크 후작과 케리 브랜들린 후작은 신호와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이 대결은 무려 두 시간이나 걸렸다.
케리 브랜들린 후작이 알몬 만스크 후작보다 마나 보유량이 조금 더 많아서 이긴 경기이다.
다시 말해 둘은 실력이 비슷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케리 브랜들린 후작이 이긴 건 알몬 만스크 후작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헐떡이면서 기권했기 때문이다.
“케리 브랜들린 후작님 승!”
기권을 선언했기에 대결 진행자는 재빨리 대결장 위로 올라가 승패가 겨루어졌음을 선언한다.
“헉헉! 헉헉헉!”
“허억! 흐어억! 허헉!”
둘은 한참 동안 숨을 골라야 했다. 진이 빠질 정도로 모든 기력을 쏟아낸 때문이다.
털썩―!
급기야 승자인 케리 브랜들린 후작마저 주저앉았다.
9서클 마스터라 할지라도 모든 마나를 소진하고 나면 기진맥진한다는 걸 보여주었다.
* * *
“정말 수고하셨어요.”
싸미라는 존경과 흠모, 그리고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현수를 바라보고 있다. 이때 드마인 후작이 입을 연다.
“그래, 정말 큰일을 이루셨네. 감축하네.”
드마인 백작은 감히 현수에게 하대를 할 수가 없었다.
후작위는 확정되었고, 이제 한 번만 더 승리하면 공작이 된다. 몰락한 백작 따위는 우러러보는 것조차 벅찰 정도로 잘나가는 실세 공작이 될 것이 뻔하다.
조만간 황태자가 양위를 받아 황제가 될 것이다. 이는 황제가 어전회의 때 직접 언급한 말이니 곧 이루어질 일이다.
자고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모든 관직은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황태자의 지극한 관심을 받는 핫산 브리프 공작이 실권을 쥘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기에 사위이지만 감히 말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현수는 담담한 표정이다. 꾀로써 취한 승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7서클이라고 사기까지 쳤다.
그렇기에 마냥 좋다고 웃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야, 아니야. 모두가 자넬 칭찬하네. 그건 운이 아니라 실력이네. 다들 전략이 기막혔다고 감탄하고 있지.”
오늘 드마인 백작가엔 평소엔 발걸음이 없던 여러 백작과 후작들이 몰려왔다. 핫산 브리프가 싸미르의 남편이라는 소문이 난 때문이다.
이 자리에선 현수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그중 블링크와 아공간 마법으로 9서클 마스터를 곤경에 처하게 한 기막힌 수법은 당연히 화제의 중심이었다.
이번 대결만 끝나면 핫산 아카데미를 개설하라는 의견이 있었다. 저서클 마법사들로 하여금 여러 마법을 조화시켜 강자를 이길 수 있는 비법을 만들자는 것이다.
물론 10년 후를 내다본 포석이다. 다시 말해 차기 영주 선발대회에 나가려는 욕심으로 온 것이다.
같은 시간, 현수는 황태자와 함께하고 있다.
원래는 황태자 전용 연공실에 머물려 했다. 내일 있을 대결에서 또 한 번 기막힌 수법을 만들어내려는 의도이다.
그런데 거절되었다.
공작위 결정 1차 대결에서 승리한 세 명의 공작이 연명으로 특혜 시비를 걸어온 때문이다.
황태자는 일리 있다 판단하여 연공실 사용을 허가하지 않았다. 하여 연공실 서고까지 들어가 있던 현수를 불러냈다.
대신 자신이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마법들에 대한 의견을 말해주었다.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은 것이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척했다.
중학생이 초등학생으로부터 사칙연산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꽤 오랜 시간 황태자궁에 머물렀다. 그리고 드마인 백작가로 왔다. 대결장 인근의 여관을 물색했는데 빈 곳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출전 선수들을 위한 숙소가 있기는 한데 가보니 있을 수가 없었다. 바로 옆 여관이 너무나 떠들썩했기 때문이다.
주정뱅이들의 고성방가와 남녀가 내는 격정적인 소음인지라 깨끗이 포기하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매형, 감축드려요.”
“……!”
싸미라의 남동생 무하드는 완전 존경한다는 표정이다. 현수는 매형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다.
지현, 연희, 이리냐 모두 남동생이 없다. 따라서 지구에선 한 번도 못 들어본 말이다.
카이로시아는 막내이고 로잘린의 남동생은 아직 못 보았다. 스테이시와 케이트에게도 남동생이 없다.
다만 다프네에겐 남동생이 있다.
하지만 드래고니안 마을에 떨어져 살며 왕래가 전혀 없으므로 매형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라이세뮤리안이 친구로 삼았으므로 그 자식이라 할지라도 가까이 대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구와 아르센 대륙 양쪽에서 매형이라는 말을 듣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런데 이곳 마인트 대륙에는 너무도 자연스레 매형이라 부르는 녀석이 있다.
현수는 잠시 무하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절세미녀를 누나로 둔 녀석답게 잘생긴 얼굴이다.
2014년에 방영된 미드 화이트 컬러(White collar)6에서 주연을 맡은 맷 보머(Matt Bomer)와 아주 비슷하다. 이런 녀석이 친근감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고맙다.”
“매형, 나중에 저에게도 마법을 가르쳐 주실 수 있어요?”
“그래, 시간이 되면 그래 보자.”
“앗싸! 신 난다!”
무하드는 펄쩍 뛰어오르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몰락한 가문의 별 볼 일 없는 존재인지라 귀족가의 자제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질 것이다. 매형이 맥마흔 최고의 인기 남이자 공작이 될 확률이 높은 핫산 브리프이기 때문이다.
저서클 마법만으로 고서클 마법사들을 농락한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현수에게 마법을 배우면 상위 마법사들도 쩔쩔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무하드는 그간 알게 모르게 무시하던 녀석들을 혼내줄 마음에 들떠 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드마인 백작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려 있다.
무기력하기만 했던 하나뿐인 아들이 모처럼 뭔가를 해보겠다는 의욕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드마인 백작은 현수가 오기 직전에 토른으로부터 어제와 오늘의 내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제는 10만 골드를 326만 7,000골드로 불려왔다. 총 수령 금액의 1%를 수수료로 지불한 것이다.
오늘도 10만 골드를 걸었는데 무려 425만 7,000골드를 받아왔다. 원금 10만 골드를 제하고 나면 이틀 사이에 752만 4,000골드를 번 셈이다.
무려 7조 5,240억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당연히 대경실색했다. 평생 생각해 보지도 못한 거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위라 생각하고 있는 핫산 브리프는 이 돈 전부를 드마인 백작가에 주겠다고 한다.
물론 펄쩍 뛰며 그게 무슨 소리냐며 거절했다.
흑마법을 3서클까지 익혔지만 악인은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현수는 다프네를 되찾으면 곧 마인트 대륙을 떠날 사람이다. 그렇기에 마인트 대륙의 화폐가 필요 없다.
이곳은 금화로 만든 걸 쓰지 않고 지구처럼 마법 처리된 지폐를 쓰기 때문이다. 하여 싸미라를 위해 주는 것이라 둘러댔다.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예물비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당연히 또 펄쩍 뛴다. 예물비가 무려 7조 5,240억 원이라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떠안겼다. 그 돈으로 죽을 쒀도 좋다고 했다.
결국 받기는 받았지만 싸미라를 통해 되돌려 줄 생각이다.
드마인 백작은 비록 곤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경우 없이 남의 것을 탐하는 성품이 아닌 것이다.
“오늘도 연공실을 쓰시려는가?”
“네, 내일 대결이 있으니 그랬으면 합니다.”
“쓰시게. 얼마든지. 이제 이 집의 모든 것은 자네 마음대로 해도 되네.”
“감사합니다.”
현수는 곧장 연공실로 내려갔다. 싸미라가 따라왔지만 혼자 있고 싶다는 말에 토 달지 않고 물러났다.
‘부군의 말에 순종하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흐음!”
연공실 문이 닫히자 현수는 턱을 괴었다.
내일은 또 어떤 기발한 방법을 써야 승리를 취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시간이 된 때문이다.
오늘의 승리는 라트보라 남작이 보낸 서찰의 내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에단 듀크 후작은 한때 라트보라 남작의 직속상관이었다.
그렇기에 평소의 습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것들을 아주 자세히 메모하여 현수에게 보냈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혹시라도 무시할까 싶어 겉봉에 ‘필승 비결’이라 쓴 것이다.
그중 하나는 에단 듀크 후작은 선공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상대의 움직임을 살펴 허점이 발견되면 그때야 핵심을 찔러 제압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