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4
진행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수가 입을 연다.
“미녀 선택권을 양보받았으니 영지 선택권은 제가 양보하지요. 라인리히 후마네 공작님이 먼저 뽑으십시오.”
다프네는 반드시 얻어야 할 여인이지만 로렌카 제국의 영지는 관심 없다. 그렇기에 짐짓 양보한 것이다.
“허험, 그럼 내가 먼저 뽑지.”
말을 마친 라인리히 후마네 공작은 두 개의 황금 막대 중 하나를 뽑아 들었다.
* * *
“엥? 이건 또 뭐야?”
황궁 예복부에서 온 시녀가 치수를 재고 돌아가자마자 현수는 라트보라 남작의 저택을 찾았다.
그런데 가던 걸음을 멈춰야 했다. 제국의 특수첩보단 소속 마법사들이 저택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무슨 상황인가 싶어 바라보고 있는데 후미에 있던 마법사가 예리한 눈빛을 빛내며 다가온다.
“멈춰라! 너는 누구냐?”
“……!”
현수가 대꾸를 하지 않자 이내 싸늘한 표정을 짓는다.
“수상하군. 신분증 제시! 나는 특수첩보단 소속이다.”
곧이어 다른 단원들까지 현수를 에워싼다. 아주 날랜 몸놀림이다. 마법사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못 들었는가? 신분증을 제시히라! 우린 제국의 특수첩보단원들이다!”
“……!”
현수는 잠시 지구를 떠올렸다.
쥐꼬리만 한 권력이 허가되었음에도 그것이 마치 무소불위인 양 거들먹거리는 자들이 있다. 경찰, 검찰, 법원, 국정원, 헌병대, 기무사 등등에 소속된 자 가운데 일부이다.
권력에 빌붙어 사는 하이에나 같은 녀석들은 뇌물과 부당한 억압, 부정부패 등과 연관이 있다.
2013년에 개봉된 영화 ‘변호인’에 등장하는 경감 차동영, 검사 강형철, 판사 이석주 같은 놈들이다.
아울러 차 경감의 지시를 받아 박진우를 무자비하게 고문한 형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자들은 새치 뽑듯 뽑아 제거하는 것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첩경이다. 그리고 뽑은 새치는 그냥 버릴 것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불속에 넣는 것이 좋다.
잠깐 찌지직거리는 소리와 단백질 타는 냄새야 나겠지만 확실하게 제거되어 다시는 사회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제국 특수첩보단원들도 그들과 유사한 듯싶다.
권력이 조금 있다 하여 아무나 불심검문을 하는데 너무도 위압적이다.
“이 자식은 뭐야? 귓구멍이 막혔어?”
“그러게. 신분증 제시하라 했다. 어서!”
“야야, 놔두고 그냥 제압해. 저런 놈은 끌려가서 치도곤을 당해봐야 정신을 하려.”
현수는 자신을 에워싸는 특수첩보단원들의 면면을 살폈다. 드마인 백작을 대할 때완 달리 위화감이 느껴진 때문이다.
‘뭐지? 아!’
특수첩보단원들의 몸에선 흑마법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 심장의 서클 수를 확인해 보니 다들 4서클, 혹은 5서클 마법사이다.
‘흐음! 4서클 이상이면 흑마법의 기운이 강해지는 모양이군. 근데 왜 그러지?’
특수첩보단원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거수자를 찾아내고 제거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시신을 이용한 비밀병기의 관리이다.
모종의 장소에서 제작되고 있는 말해 구울, 좀비, 스켈레톤, 데스 나이트 등과 관련이 있다.
이 과정에서 사악함에 물들게 된다.
갓 죽은 시신의 살을 이용해 요리를 만들어 먹거나 집단 시간 등을 행하면서 자연스레 몸에 밴다.
그렇기에 이처럼 죽음의 기운이 넘실대는 것이다.
“이놈 봐라? 신분증 내놓으라는 말 못 들었냐?”
“야, 묻지 말고 그냥 체포해! 끌고 가서 두들겨 패면 다 불게 되어 있잖아!”
“크흐흐! 오랜만에 고문의 향기를 느끼게 되는 건가?”
특수첩보단원들은 현수를 둥글게 포위했다. 그리곤 서서히 포위망을 좁힌다. 희번덕거리는 눈빛을 보니 광기마저 느껴진다. 곧 있을 고문을 생각하면 희열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덮쳐!”
“윈드 커터! 윈드 스피어! 록 버스터! 인페르노!”
저마다 자신 있는 마법을 구현시키는 데 조금의 인정도 없다. 다시 말해 무자비함이 느껴진다.
이때 현수의 입술이 달싹인다.
“멀티 스토리지!”
“헛! 허헉! 크윽! 아악! 이건 뭐야? 으윽! 커헉!”
삽시간에 주위 20m가 텅 비어버린다. 바닥의 돌까지 모두 아공간으로 빨려들었기 때문이다.
“앗! 뭐야?”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자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온다. 약 30명의 동료가 순식간에 사라진 때문이다.
우르르르―!
라트보라 남작의 저택을 에워싸고 있던 특수첩보단원 중 일부가 몰려와 재차 포위망을 구축한다.
현수를 적이라 판단한 것이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신분증! 신분증을 제시해!”
방금 전 아공간에 넣은 녀석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현수는 잠시 묵묵부답하며 서 있다. 잠시 후 다시 30명이 공격을 퍼붓는다. 그 순간 그들 역시 아공간에 담아버렸다.
“허억!”
뒤쪽에 있던 자들은 보았다. 정체불명인 자의 주변에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동료 전부가 시커먼 아공간으로 빨려드는 것을.
“누, 누구십니까?”
4∼5서클 동료 마법사들을 한꺼번에 30명이나 아공간에 담을 실력을 가졌다면 최하가 7서클이다.
그렇기에 조금 전과 달리 존댓말을 쓴다. 마법의 제국답게 서클 수가 곧 계급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현수는 다시금 자신을 에워싸는 특수첩보단원들의 면면을 살폈다. 이들마저 아공간에 넣으면 저택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 거의 전부를 제거하게 된다.
10장 이러지 말라니까
라트보라 남작이 저택 내부에 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을 제거하면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시비가 벌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인이 아닌 특수첩보단원이라는 신분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자칫 수사를 방해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곧 떠나야 하는데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는 것은 좋지 않았다.
“말씀해 주십시오. 누구십니까?”
“자네들 소속은?”
“제국 특수첩보단 소속 제7연대입니다.”
“자네들의 지휘관은?”
“하빈 시베른 백작이십니다.”
특수첩보단원들은 대답을 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으로 현수의 위아래를 살핀다. 겉보기엔 너무도 평범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수가 기세를 모두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빈 백작이 특수첩보단을 총괄하나?”
갑자기 현수의 몸으로부터 카리스마가 뿜어지자 단원들의 표정이 급변한다. 만만히 대할 상대가 아님을 느낀 것이다.
“…그건 아닙니다. 7연대 연대장님이십니다.”
“그럼 특수첩보단은 누가 총괄하지?”
“에, 에단 듀크 후작님이십니다.”
“죽음의 신이라 불리는 그 에단 듀크 후작?”
“네!”
특수첩보단은 에단 듀크 후작님을 호칭하면서도 끝에 님 자를 붙이지 않자 긴장했다. 잘못 건드린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가서 하빈 백작더러 이곳으로 오라 하라. 나는 핫산 브리프 공작이다.”
“허억―!”
“네에?”
모두들 대경실색하며 물러선다. 영주 선발대회가 탄생시킨 최고의 영웅을 포위하고 공격한 때문이다.
특수첩보단원들은 하빈 시베른 백작의 명을 받아 대회 기간 동안 졸린 조랑말의 발굽에서 일어난 붕괴를 조사했다.
하여 한 명도 영주 선발대회를 구경하지 못했다. 그래서 모두들 입이 댓 발씩은 튀어나와 있었다. 그 좋은 광경을 갑자기 생긴 임무 때문에 구경조차 못한 때문이다.
하긴 30년에 한 번 있는 대축제에서 본인들만 빠졌을 뿐만 아니라 무너져 내린 통로로 내려가 삽질하며 보냈다.
그 결과 라트보라 남작의 저택까지 조사하게 되었다. 대회 구경을 못한 분노를 담아 체포만 하면 무자비한 고문을 가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수상한 자가 나타났다.
신분증을 요구했지만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공격했고, 그 결과 단원 60명이 아공간 속으로 빨려들었다.
보아하니 살려줄 마음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감히 항의할 수는 없다. 하늘보다도 높은 공작님이기 때문이다.
“어서!”
“조, 존명!”
단원 중 하나가 후다닥 튀어간다. 현수는 라트보라 남작의 저택을 스캔해 보았다.
‘흐음! 개미 한 마리 없군. 그럼 여기선 못 머물겠네. 주인도 없고 특수첩보단원들이 주시하고 있으니. 끄응!’
무려 700㎢나 되는 드넓은 수도에 머물 곳이라곤 드마인 백작가뿐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결도 끝났으니 지하 연공실을 쓴다는 명분도 없다. 꼼짝없이 백작가의 어느 침실로 안내될 것이다.
그리고 깊은 밤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 야시시한 의복만 걸친 싸미라가 육탄 공세를 벌일 것이다. 황태자가 하사한 미녀 넷 때문이다.
먼저 일을 벌이지 않으면 자칫 정실 자리를 잃을 수도 있음에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10분이 넘었으니 아공간의 녀석들은 모조리 숨이 끊어지고도 남을 시간이다.
멀리서 뚱뚱한 인물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온다. 그리곤 당도하자마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차렷 자세를 취한다.
“헉헉! 헉헉헉! 하빈 시베른 백작, 공작님의 부르심을 받아 왔습니다.”
“일단 호흡부터 고르게.”
“네, 공작님의 배려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빈 시베른 백작은 영주 선발대회를 참관했다. 부하들에게 임무를 하달하고 본인은 한가롭게 구경한 것이다.
그렇다 하여 모든 대결을 본 것은 아니다. 백작위를 결정하는 대결 이상만 본 것이다.
당연히 핫산 브리프의 대결도 모두 보았다.
그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돈을 잃었다. 번번이 다른 상대에게 걸었다가 모조리 날려 버린 것이다.
특수첩보단 제7연대장의 자리에 8년간 앉아 있으면서 받아 챙긴 뇌물 액수 전부를 잃은 것이다.
속이 쓰렸지만 어디다 대고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 끙끙대고 있었다.
그 분풀이는 모조리 부하들에게 향했다. 하여 하루 종일 라트보라 남작의 저택을 포위하고 있도록 했다.
자신이 당도할 때까지 경거망동하지 말 것이며, 포위망 또한 풀지 말라고 했다. 자신이 현장에 당도하면 그때 지시하여 간세 일당을 체포하겠다는 것이다.
그래 놓고는 애첩과 질펀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느긋하게 식사까지 하고 쉬고 있는데 부하 가운데 하나가 후다닥 달려와 보고했다.
라트보라 남작의 저택 인근에서 시비가 벌어졌는데 단원 60명이 사라졌다는 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뭐라고 그랬어?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 그게… 신분증을 요구해도 내놓지 않아 또 다른 거수자인 줄 알고 동료들이 공격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작자는 잡았어?”
백작은 나른하던 기분이 확 틀어지는 느낌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럼 뭐야?”
“그, 그분께서 연대장님을 오라고 하셨습니다.”
“뭐, 그분? 그리고 나더러 오라고? 어떤 시러배 잡놈이 감히 백작인 내게 오라 가라 하는 거야?”
“그, 그게… 핫산 브리프 공작님이십니다.”
“뭐, 뭐라고? 하, 핫산 브리프 공작님?”
백작의 눈에선 눈알이 튀어나오려 한다. 그리고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을 딱 벌린다. 너무도 놀란 탓이다.
“저, 저희가 공작님인 걸 모르고 실수했습니다.”
“실수? 끄응! 이런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백작은 나직한 침음을 토했다.
자신이 부리는 부하들이 곧 권력의 실세가 될 하늘같은 공작님을 불쾌하게 했다.
이는 본인의 출셋길에 엄청난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두말 않고 헐레벌떡 달려온 것이다.
“하빈 시베른 백작, 백작은 부하들을 어떻게 가르치기에 이토록 무례한가?”
“죄, 죄송합니다.”
하빈 시베른 백작은 7서클 마스터를 넘어선 8서클 유저이다. 반면 핫산 브리프는 7서클 유저로 소문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