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6
나름대로 치장을 한다곤 했지만 모든 것이 워낙 낡아서 그런지 시골 여인숙에 들어온 기분이다.
“워싱! 클린! 워싱! 클린!”
먼지와 찌든 때를 제거하는 사이 벽 틈에 있던 벌레들이 튀어나온다. 상당히 많다. 노래기, 거미, 지네 등등이다.
“끄응!”
지구인인 현수는 이런 곤충들과 같은 방을 쓰고 싶은 마음이 없다. 하여 창틈과 문틈을 메우고 연막탄을 터뜨렸다.
두 시간은 기다려야 하기에 바깥으로 나왔다. 싸미라는 어디에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다행한 일이다.
저택을 나와 시가지로 향했다. 드마인 백작으로부터 들은 터번스 백작에 관해 알아볼 요량이다.
‘칼날 끝의 인생 Tavern’
현수의 눈에 뜨인 간판이다. 펍과 여관을 같이 운영한다는 뜻일 것이다.
삐이꺽―!
“와글와글, 와글와글, 왁자지껄, 구시렁구시렁…….”
제법 넓은 실내엔 약 30개의 테이블이 있다. 그런데 전 좌석 만원이다.
딱 하나 빈 게 있는데 정중앙에 있으며 다른 테이블과 달리 레이스 달린 보로 덮여 있고 꽃을 꽂은 화병도 있다.
그러고 보니 이런 테이블은 두 개나 더 있고, 손님들이 차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빈 테이블로 향했다.
“어서 옵셔! 근데 자리가……. 아, 저기 앉으시려구요? 귀족이시군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요.”
다소 경망스런 안내를 받으며 테이블로 향했다.
“헤헤! 뭘 드릴깝쇼?”
“글쎄? 이 집은 뭘 잘하지? 제일 잘하는 걸로 가져오게. 라덴주라고 혹시 있나?”
“아이고, 그럼요. 당연히 있습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휑하니 다녀오겠습니다요.”
상당히 유쾌해 보이는 청년이다.
이때 문득 주변의 대화가 들린다.
“캬아! 그때 그걸 봤어야 하는데, 아깝다 아까워!”
“그래, 이제 세상은 둘로 나뉘게 될 거야.”
“둘? 황태자님의 눈에 든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아니. 그 대결을 본 사람과 못 본 사람으로.”
“뭔 소리야, 그게?”
누군가 고함을 지르자 주변 테이블이 잠시 조용해진다.
“핫산 브리프 공작님께서 9서클 마스터인 에단 듀크 제국 특수첩보단장님과 붙었던 경기 말이네.”
“아, 그거?”
“그럼, 그럼! 정말 대단하셨지. 내 생전에 겨우 블링크와 아공간 마법으로 9서클 마법사를 그렇게 단숨에 제압하는 건 처음이었네.”
“쩝! 난 그때 20골드나 잃었어.”
“나는 30골드. 그래서 마누라한테서 쫓겨났잖아.”
“끄응! 그건 나도 그래. 이제 집에 오지 말래.”
주객들은 금방 또 소란스러워진다. 그런 사이에 제법 먹음직한 오리구이와 라렌주가 세팅되었다.
근데 거의 칠면조만 한 오리이다.
“수고했다.”
현수가 1골드짜리 지폐를 주자 청년의 눈은 대번에 커진다. 서빙 한 번 하고 100만 원을 팁으로 받았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어차피 이곳을 뜨면 쓸 일이 없으니 잡히는 대로 준 게 1골드인 것이다.
“고맙습니다요. 정말 고맙습니다요.”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굽실거리곤 후다닥 물러난다. 혹여 잘못 주었다면서 되돌려 달라고 할까 두려운 모양이다.
“근데 핫산 브리프 공작님은…….”
“내가 말이야, 그때 핫산 공작님을 봤는데…….”
“핫산 공작님이 미녀들을 고를 때…….”
귀에 들리는 소리 모두 자신에 관한 것이라 쓴웃음이 나온다. 침소봉대되어 마법의 신이 될 판이기 때문이다.
“근데 말이야, 다프네라고, 맨 마지막에 나온 미녀 있잖아. 정말 끝내주지 않냐?”
“아! 그녀가 한 번만이라도 날 바라봐 줬으면…….”
“내 눈엔 여신으로 보였다, 여신으로!”
“그녀를 마음대로 끌어안고 살 수 있는 핫산 공작님이 너무나 부럽다. 안 그러냐?”
“하나뿐이냐? 네 명이나 더 있잖아. 핫산 공작님은 전생에 신이었나 봐. 안 그러면 어떻게 그런 미녀를 다섯씩이나 차지해? 안 그래?”
“맞다, 맞아.”
잠시 다프네로 옮겨간 화제가 다시 핫산에게로 되돌아온다. 선술집에서 정보를 얻으려던 계획은 실패인 듯하다.
하여 대강 먹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다가서는 사내가 있다.
11장 빌어먹을 놈이네
“저… 제가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시선을 들던 현수는 화들짝 놀랐다.
“아! 그럼요. 앉아요.”
현수의 맞은편에 앉은 이는 라트보라 남작이다. 그런데 평상시 모습이 아니라 몹시 늙은 노인으로 변장하고 있다.
하나 눈매가 익어 알아본 것이다.
처음엔 라트보라 남작의 부친으로 착각했다. 그렇기에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이다. 남작 본인이라 확인한 것은 목과 손의 주름이 적음을 보고 나서이다.
“먼저 감축드립니다.”
“감축은 무슨, 그럴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도요. 대결을 보면서 전 정말 크게 감탄했습니다. 정말 정말 대단하십니다.”
라트보라 남작의 이 말은 진심이다.
대결을 시작하기 전부터 손에 땀을 쥐었다. 현수가 이기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이다.
그런데 연달아 최고위 마법사들로부터 승리를 쟁취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마법의 조합이었기에 같은 마법사로서 진심으로 존경하게 된 것이다.
“공작위를 받으면 어쩌시려구요?”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공작위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걸 해야지요.”
“그리곤요?”
“일단은 그게 전부입니다.”
“혹여 저희를 도와주실 수는 없는지요?”
아주 민감한 이야기이기에 현수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건 생각해 볼 일입니다. 하지만 내 생각과 접점이 있으니 제가 도울 수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라트보라 남작은 현수는 보며 진심으로 탄복의 빛을 떠올린다. 젊어 보이지만 존경스러운 것이다.
“참, 뭣 좀 묻고 싶은데, 어디 조용한 곳 없을까요?”
“나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라트보라 남작이 현수를 데리고 간 곳은 특수첩보단원들이 에워싸고 있던 바로 그곳 인근이다.
길 건너 뒷집이니 상대의 허를 찌른 셈이다.
“아까도 여기에 있었습니까?”
“네, 짐을 풀고 있었지요. 그러다 공작님을 뵈었습니다.”
“그렇군요.”
현수와 라트보라 남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우선 두 가지가 궁금합니다. 첫째는 로렌카 제국 건국 초기에 존재하던 알리 공작에 대한 것을 알고 싶습니다.”
영광의 마탑주를 살해하고 마법서를 훔쳐 간 놈이니 그 후손이라도 족치려는 의도이다.
라트보라 남작은 서가에 꽂혀 있는 책 한 권을 뽑아온다.
“알리 공작은 황제를 도와 건국의 기틀을 잡은 인물입니다. 그 공을 인정받아 나중엔 재상을 역임했지요. 이건 알리 공작의 자서전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잠시…….”
“네, 저도 짐을 풀다 말았으니 조금 있다 오겠습니다.”
마음 편하게 자서전을 읽으라는 뜻이다.
현수는 첫 페이지를 넘겼다.
로렌카 제국력 31년 7월!
나는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였다.
아르센이라 불리는 그곳은 우리 마인트 대륙과는 많은 면에서 달랐다. 나는 그곳을 10여 년간… .
제국은 이제 내가 바라던 흑마법사의 나라가 되었다. 나는 그간의 삶을 정리하며 이 자서전을 쓴다.
제국력 127년 8월의 마지막 날
알리 브앙카 공작
“알리 브앙카? 흐음! 죽일 놈이군.”
남긴 자서선을 보면 영광의 마탑주를 죽이는 일만 한 게 아니다. 용병으로 신분을 위장하곤 약 10년간 아르센 대륙을 횡행했는데 그러는 동안 많은 만행을 저질렀다.
그중 하나는 여러 왕국의 왕비와 왕자비들을 겁탈한 것이다. 그 나라의 국왕, 또는 왕세자의 얼굴로 변장한 뒤 저지른 일이다. 자서전엔 장차 자신의 후손들이 아르센에서 두루 번성하길 바라는 뜻에서 그랬다고 기록했다.
두 번째 만행은 아르센 대륙의 여러 마탑에 잠입하여 마법서들을 변조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아르센 대륙의 마법은 더 이상 진보를 할 수 없었다.
알리 공작이 방문할 수 없던 이실리프 마탑만이 놈의 마수에서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그때 이실리프 마탑의 멀린과 조우했다면 알리 공작은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멀린이 더 강했고 흑마법사라면 이를 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로렌카 제국은 지금처럼 번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직적인 반발에 직면해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프네가 이곳까지 끌려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르센 대륙의 존재를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만행은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여 키메라로 만들려 했다는 것이다. 아르센 대륙에서만 약 30,000여 명의 사람을 희생시켰다.
그러고도 일체의 반성하는 마음이 없는 개 같은 놈이다.
“진짜 빌어먹을 놈이었군.”
알리 브앙카 공작의 자서전을 모두 읽은 현수는 몇몇 빌어먹을 놈을 상기해 보았다.
자원외교 한다며 엄청난 액수의 국고를 손실시키면서도 무려 300억 원이나 되는 정부 보조금을 횡령하는 데 가담한 놈들이 있다.
가난을 증명하면 무상으로 급식을 준다는 놈도 있고, 나라 빚을 엄청나게 늘려놓고도 본인은 잘한 것만 있다고 우기는 개만도 못한 놈도 있다.
즉시 잡아서 개 패듯 패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이는 후안무치한 인간들이다.
알리 브앙카 공작도 그중 하나이다. 그런데 뒈진 지 오래되었다. 무덤을 파서 해골을 부수는 건 보복도 아니다.
하여 현수는 후손들을 찾아 대가 끊기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짓을 보니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흐음! 알리 브앙카 이 개 같은 놈의 후손들은 대체 어떤 놈들일까?”
현수가 나직이 중얼거릴 때 라트보라 남작이 들어선다.
“감축의 의미로 주안을 준비했습니다. 한잔하시지요.”
“좋지요.”
기분이 상한 것은 상한 것이고, 둘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잔을 비웠다. 이내 술이 떨어지자 아공간에서 맥주를 꺼냈다.
파스타치오와 마카다미아, 그리고 쥐치포이다.
라트보라 남작은 쥐치포에 꽂힌 듯 쉬지 않고 먹어댄다.
바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수도지만 소금이 귀한 때문이다.
“라트보라 남작님.”
“아이고, 말씀 낮추십시오. 공작님이시잖습니까.”
반 로렌카 전선 소속이면서도 원수 같은 제국의 작위를 이야기하니 아이러니하지만 그러려니 했다. 거의 30년간 끊은 술을 마시기에 금방 취기가 오른 탓이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알리 브앙카 공작의 후손들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알리 브앙카 공작이요? 그럼요!”
아직까지 대를 이어오는 모양이다.
“직계는 물론이고 방계까지 모두 알려주십시오.”
“네, 내일 아침까지 서류로 작성하여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라트보라 남작은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고 있다.
“알리 브앙카 공작이 저지른 일이 너무나 괘씸해서 그렇습니다. 하여 대를 끊어놓을 생각입니다.”
“아, 그거 좋은 생각이십니다.”
반 로렌카 전선 소속이기에 제국 귀족의 씨를 말리겠다는 말에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나저나 술 더하시겠습니까?”
둘이 비운 12도짜리 라덴주 두 병과 3홉들이 맥주 여덟 병이다. 이 정도면 상당량이기에 물은 말이다.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술을 마시니 긴장이 풀리는군요. 결코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조심하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밴 듯 약간 취했음에도 라트보라 남작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
“그럽시다.”
“보고서는 내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명백한 축객령이기에 현수는 저택을 떠났다. 특수첩보단의 이목이 근처에 깔려 있는 상황이다.
핫산 브리프 공작이 곧 실세가 될 것이긴 하지만 반 로렌카 전선은 철저한 점조직을 원칙으로 한다. 그렇기에 무례인 줄 알면서도 가달라는 뜻을 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