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8
“너무 양이 많은데 제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응? 그, 그러게. 그래주면 우리야 고맙지.”
드마인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수는 많은 가주일기 중 하나를 뽑아 들었다.
현 가주의 8대 조상이 남긴 것인데 가주가 된 이후의 삶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만 해도 상당히 부유한 영지를 가진 영주였기에 지금처럼 팍팍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일기엔 거의 두 달에 한 번 성대한 파티를 열어 인근 영지의 영주들과 친분을 나눈 이야기가 쓰여 있다.
현수는 계속해서 여러 일기를 살폈다. 그러다 아주 낡은 것을 보게 되었다.
초대 가주가 남긴 것이다. 다음은 그중 일부이다.
로렌카력 2년 7월 3일.
알리 브앙카 공작이 가문의 저택을 짓는 데 보태 쓰라며 10,000골드를 보내주었다. 나는 케리 본이치 공작 사람인데 이상한 일이다.
로렌카력 2년 8월 6일.
드디어 주춧돌을 놓았다. 이제 우리 가문의 시작이다. 정말 기념할 만한 날이다.
로렌카력 4년 11월 26일.
저택이 곧 완공될 것 같다. 후손 100대까지 지금의 영광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로렌카력 4년 12월 5일.
드디어 저택이 완공되었다. 이제 외부에 담장을 두르고 정원만 조성하면 된다.
로렌카력 4년 12월 7일.
알리 브앙카 공작이 저택 완공 소식을 듣고 구경하려 오셨다. 잘 지어진 건물이라며 칭찬하셨다.
저녁 식사를 할 때 우리 가문에 대한 알리 브앙카 공작가의 호의라며 정원을 조성해 주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고마운 일이다. 요즘 케리 본이치 공작과 약간 소원해졌는데 나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는 의도인 듯싶다.
그래도 나는 케리 본이치 공작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로렌카력 5년 7월 11일.
정원 조성공사와 외곽 담장공사를 모두 마쳤다. 이것으로 우리 가문의 100대를 지탱해 줄 저택 신축 공사가 끝났다.
내일은 황궁 어전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심히 긴장된다.
“알리 브앙카 공작! 대체 왜……?”
현수는 초대 가주가 남긴 가주일기를 계속해서 읽었다. 그러던 중 눈에 띄는 구절이 있다.
12장 오래된 음모
로렌카력 22년 6월 3일.
알리 브앙카 공작의 술수에 휘말려 하마터면 작위를 잃을 뻔했다. 내가 지엄하신 황제폐하의 3비 마마와 사통을 했다는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우다니…….
알리바이가 없었다면 꼼짝없이 유배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알리 브앙카 공작! 치사한 인물이다. 케리 본이치 공작의 오른팔인 나를 치기 위한 음모였을 것이다.
후손들이여! 알리 브앙카 공작가의 인물들과는 영원히 상종치 말 것을 초대 가주로서 명한다.
얼마나 분노했는지 곳곳에 잉크가 튀어 있다. 300년이 넘게 흘렀지만 눌러쓴 자국이 느껴질 정도이다.
“그만 찾으세요. 이유를 알았으니.”
현수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빠르고 간결한 설명이 필요한 때다.
“정원 조성자는 300년 전 알리 브앙카 공작입니다. 앙숙 관계인 케리 본이치 공작의 오른팔인 초대 가주님의 가문에 해를 끼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네에?”
모두들 놀란 표정이다. 현수는 대답 대신 가주일기를 펼쳐서 보여주었다.
“끄응! 이런 것도 모르고…….”
가문에서는 초대 가주가 남긴 것들은 모두 소중하다며 변경과 훼손을 극도로 자제해 왔다.
귀족들은 정원에 대해 별반 신경을 쓰지 않는다. 주로 실내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정원 때문에 마나가 덜 모였다. 그 결과 현 가주 드마인 백작이 겨우 3서클인 것이다.
“토른! 토른!”
대기하고 있던 토른이 얼른 들어와 고개를 조아린다.
“네, 백작님!”
“지금 당장 사람을 사서 정원의 모든 나무를 뽑아버리게. 알겠나?”
“네? 정원의 나무를 모두 뽑아요?”
“그래! 단 한 그루도 남기지 말고 모두 뽑게! 이건 가주로서의 명이네!”
“네,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토른은 백작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물러났다. 현수는 외부인이니 끼어들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
백작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된 때문이다.
무하드와 싸미라는 가주일기를 읽으면서 계속 중얼거린다.
“어머! 어쩜 이러니? 대체 왜 이랬지?”
“그러게. 너무한 거 아냐? 우리 가문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치, 누나?”
“응. 나는 여태 알리 브앙카 공작님이 대단한 분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아니냐. 참 나쁜 사람이었어.”
이런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데 백작의 명을 받아 바깥으로 나갔던 토른이 되돌아왔다.
“저… 공작님.”
“흠! 왜 그러나?”
“문 앞에서 어떤 사람이 이 서찰을 주면서 공작님께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요.”
토른이 내민 서찰의 봉투를 보니 초록색 꽃이 그려져 있다. 누가 보낸 건지 한 번에 알 수 있는 그림이다.
“그래? 이리 주게.”
현수는 창가로 가 받은 서찰을 펼쳐보았다. 예상대로 라트보라 남작이 보낸 것이다.
《윈스턴 브앙카 공작에 관한 보고》
특기 사항 : 알리 브앙카 공작의 직계 3대손
현 직위 : 황궁 내무대신
나이 : 311세
성취 : 9서클 마스터(수계마법 정통자)
영지 위치 : 수도 맥마흔 인근
수도 거주지 : 정복자의 길 13번지
휘하 마법사 : 9서클 3명, 8서클 11명, 7서클…….
《터번스 토리안 백작에 관한 보고》
특기 사항 : 윈스턴 브앙카 공작의 사위
알리 브앙카 공작가 여식의 후손
윈스턴 브앙카 공작의 제자
나이 : 189세
성취 : 8서클 유저(수계마법 정통자)
영지 위치 : 핫산 브리프 공작령 우측
수도 거주지 : 정복자의 길 81번지
휘하 마법사 : 7서클 4명, 6서클 22명, 5서클…….
“흐으음!”
참 공교로운 일이다.
아르센 대륙에 큰 해를 끼친 인물이라 현수가 반드시 대를 끊어놓겠다 생각한 인물과 드마인 백작가의 원수가 동일하다. 그래서 싸미라를 만난 모양이다.
“왜 그러시는가?”
가주일기를 읽고 분노하고 있던 드마인 백작은 현수가 창가에서 서찰을 읽는 모습을 보고 무언가를 느낀 모양이다.
“어제 말씀하신 터번스 토리안 백작 말입니다.”
“아, 그래. 근데 무슨 문제가 있나?”
“그자가 윈스턴 브앙카 공작의 사위라는 건 아시죠?”
“윈스턴 공작님의 사위 맞지? 아마 셋째 딸의 남편일 거야. 아! 근데 윈스턴 브앙카? 브앙카? 헉! 그럼……?”
이름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는가 보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계셨는지 모르지만 윈스턴 브앙카 공작은 알리 브앙카 공작의 직계 3대손입니다. 다들 9서클 마스터인지라 오래 산 모양입니다.”
알리 브앙카 공작가는 330년 동안 세 명의 가주만 존재했다. 그런데 드마인 백작가는 16대를 이어왔다. 수명의 차이가 빚어낸 결과이다.
“허어, 세상에……!”
“보아하니 그쪽에서도 드마인 백작가의 몰락을 가주가 유시로 남긴 모양입니다.”
현수의 이런 추측은 정확하다.
알리 브앙카 공작은 드마인 백작가의 완전 소멸을 원했다. 감히 자신이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는 괘씸죄 때문이다.
하지만 당대엔 드마인 백작가의 몰락을 볼 수 없었다.
드마인 백작이 자신과 쌍벽을 이루는 권력자 케리 본이치 공작의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드마인 백작이 알리 공작의 손을 잡았다면 모든 기밀을 털린 케리 공작은 권력에서 멀어졌을 것이다. 그걸 가지고 온갖 술수를 다 부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 수백 년을 떵떵거리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 케리 공작과 권력을 반분해야 했던 것이다.
욕심 많은 알리 브앙카 공작은 그 모든 것이 초대 드마인 백작이 자신의 말을 안 들은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여 후손들에게 치밀하면서도 잔인한 명령을 남겼다.
드마인 백작가를 단번에 없애지 말고 서서히 말라붙게 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권력에서 밀려나고 가난에 처해 근근한 삶을 살다 구걸하는 모습까지 보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았다. 부유한 영지가 있으니 요구한 만큼 나빠질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드마인 백작의 6대 조상에게 수작을 부렸다.
사기도박단을 접근시켜 전 재산을 잃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돈을 구할 방도를 모두 차단하여 영지를 헐값에 넘기도록 했다. 조상의 유시를 반쯤은 성공시킨 것이다.
그 후로 서서히 말라붙도록 온갖 술수를 부렸다. 유력 가문과의 혼사가 이루어질 수 없도록 방해했고, 유능한 인물이 가신으로 흘러들지 못하도록 막거나 죽였다.
이제 거의 다 되었다.
드마인 백작가의 가주는 겨우 3서클 유저이고, 하나뿐인 아들 무하드는 마나 감응이 지극히 낮아 마법사가 될 확률이 거의 없다.
싸미라가 경국지색을 타고나 황태자의 눈에 들었을 때 잠깐 긴장했다. 하나 정비와 차비로 하여금 선수 치게 하여 그 뜻을 잠재웠다.
황태자가 싸미라를 웬 듣보잡에게 주겠다고 했을 때 다들 찬성한 이유는 핫산 브리프에게 아무런 배경도 없다는 조사 결과를 받은 때문이다.
그런데 핫산 브리프는 공작위를 따냈다. 제국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황태자의 눈에 든 인물이다.
싸미라가 핫산 브리프와 맺어지는 건 불가분의 일이다. 황태자가 직접 맺어준 사이이기 때문이다.
윈스턴 브앙카 공작 입장에선 정말 못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예전에 팔았던 영지를 되찾겠다고 나서자 터무니없는 금액을 부른 것이다.
“정말 지독하군요.”
알리 브앙카가 내린 유시 때문에 가문이 몰락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싸미라가 한 말이다.
“일단 정원을 정리하십시오. 이 기회에 저택을 새로 짓는 것도 한 방법이겠습니다.”
“영지부터 찾아야 하네.”
“네, 그렇죠. 700만 골드에 거래가 되도록 제가 힘을 한번 써보지요. 힐만 공작님과 친분이 있으니 부탁을 드려볼 생각입니다.”
힐만 공작은 황태자의 측근 중에서도 측근이다. 그리고 현재 제국의 대소사는 모두 황태자가 직접 처결한다.
다시 말해 힐만 공작은 권력의 핵심이다. 그런 그에게 부탁한다니 믿음이 간다는 표정을 짓는다.
“잘 부탁하네.”
“네, 나머지 52만 4,000골드만 있어도 저택을 재건축하는 비용으로 충분할 겁니다.”
한화로 5,240억 원이나 되는 거금이다.
이곳은 건축재료 및 인건비가 저렴하니 충분히 재건축을 하고도 남을 금액이다.
“그건 그러네만, 과연 700만 골드에 거래가 되겠는가?”
심히 우려된다는 표정이다.
“안 되면 되게 해야지요. 참, 700만 골드에 해당하는 전표를 제게 주십시오. 아울러 가주 인장도 부탁드립니다.”
“그, 그러세. 잠시만 기다리게.”
돈도 돈이지만 가주의 인장은 매우 중요한 물건이다. 전 재산에 대한 처분권을 넘기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주의 인장은 함부로 빌려주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드마인 백작이 고개를 끄덕인 건 몰락한 가문이라 재산이랄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위로 점지된 핫산 브리프 공작에 대한 신뢰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 * *
“어서 오십시오. 핫산 브리프 공작님!”
현수를 반긴 건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이다. 겉보기엔 이래도 이자의 실제 나이는 무려 189세이다. 한국식 나이로 따지면 190살이나 된 늙은이다.
터번스 토리안 백작.
윈스턴 브앙카 공작의 셋째 사위이며 8서클 유저이다.
신임 공작인 핫산 브리프가 방문해도 좋으냐는 전갈을 보냈을 때 터번스 백작은 실세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는 자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렇기에 이처럼 환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