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9
“반갑습니다, 터번스 토리안 백작.”
작위의 차이가 있지만 완전히 말을 내리기엔 아직 균형추가 저쪽에 있다. 현수는 이곳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몰락해 버린 드마인 백작가 하나뿐이지만 저쪽은 윈스턴 공작가가 있기 때문이다.
황태자가 관심을 가져주곤 있지만 그건 언제든지 거둬질 수 있는 것인지라 계산에 넣어선 안 된다.
“먼저 공작이 되셨음을 감축드립니다. 저도 대결장에서 공작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터번스 백작의 이 말은 진심이다. 아직 8서클 유저인지라 후작위에 도전할 자격이 없어 이번엔 참관만 했다.
그리고 핫산 브리프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덕분에 돈도 땄다. 무스타 하로겐 백작을 3서클 에어로 붐 마법으로 제압했을 땐 전율을 느꼈다.
겨우 7서클 유저가 현혹 계열 마법의 대가인지라 9서클 마스터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을 제압했다. 마치 자신이 그 일을 이루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흥분했던 것이다.
“다행히 운이 좋았던 겁니다. 과찬이십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날 정말 감명받았습니다. 하여 그날 이후 쭉 저서클 마법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작은 성취를 얻었습니다.”
터번스 백작은 자신의 기분을 알아달라는 표정이다.
“저야말로 감축을 드려야겠군요.”
“하하! 네. 그게 이렇게 되는군요. 하하하!”
화기애애한 분위기이다. 현수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슬쩍슬쩍 백작의 집무실을 살폈다.
초호화판 집무실이다. 뭐 하나 평범해 보이는 게 없다. 하다못해 백작의 책상과 의자조차 명품으로 보인다.
현수는 아르센 대륙의 여러 곳을 두루 돌아다녔다. 라이셔 제국의 황궁과 아드리안 왕국의 왕궁 또한 구경한 바 있다.
이 밖에 많은 귀족가를 두루 방문했다.
그런데 이처럼 호화롭고 사치스러우며 고상하고 우아한 집무실은 본 적이 없다.
“저택이 정말 대단하군요.”
“하하! 네, 칭찬 고맙습니다.”
사실 이곳은 터번스 백작가가 누대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꾸민 공간이다.
드마인 백작가의 영지를 헐값이 집어삼킨 결과 그렇지 않아도 부자이던 터번스 백작가는 더할 수 없이 부유한 가문이 되었다.
가문의 부는 엄청난 속도로 쌓여만 갔다. 흥청망청 써도 쌓일 정도인지라 그 돈으로 이 저택을 꾸몄다.
프랑스의 루이14세는 바로크 양식의 궁전을 지었다. 전체 길이가 680m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이다.
이를 베르사유 궁전[Chateau de Versailles]라 일컫는다.
‘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선언할 만큼 대단한 권력과 금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건축물이다.
이 궁전의 왕실 예배당은 완성도와 화려함을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이다. 천장의 프레스코화와 견고한 대리석 기둥, 그리고 황금으로 치장된 장식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거울의 방이라 불리는 곳도 있다.
길이 75m, 높이 13m짜리 방이다.
이걸 건축하는 데만 8년이 소요됐으니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지 충분히 짐작된다.
이 방의 아래에 있는 물의 화단과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담은 조각 분수는 궁전과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호화로운 궁전의 정원 넓이는 100만㎡나 된다. 약 30만 평 규모이다.
현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정교하게 조각된 기둥이며 기타 등등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욕심 많은 놈이긴 하지만 예술이 뭔지를 아는 자 같다. 그리고 그걸 수집하기 위해 대단한 공을 들였을 것도 충분히 짐작되었다.
“그나저나 공작님께서 단순한 일로 예방하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제게 바라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이거 오자마자 차 한 잔도 안 주시고 용무를 털어놓으라는 말씀이신군요.”
“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실례를 범했습니다. 너무 대단하신 분을 모시게 되어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을 마친 터번스 백작은 시종을 부르는 초인종을 누르려 했다. 그런데 현수가 먼저 나섰다.
“아닙니다. 나야말로 첫 방문을 하면서 빈손으로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실례를 범했으니 차는 제가 준비하죠.”
“네?”
터번스 백작이 뭔가를 이야기하려 할 때 현수가 먼저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곤 맥심 커피믹스와 행남자기에서 만든 꽃무늬가 정교하게 그려진 커피잔을 꺼냈다.
“어라? 이건…….”
온갖 진귀한 예술품을 접한 바 있음에도 100% 완벽하게 일치하는 두 개의 커피잔 세트를 본 백작의 눈이 커져 있다.
드워프도 이렇게는 못 만들기 때문이다. 하여 탐욕의 눈빛으로 이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뜨거운 물을 만들어 달달한 커피 두 잔을 만들어냈다.
“자, 제가 개발한 특별한 차입니다. 맛을 보시죠.”
후륵, 후르륵―!
현수가 직접 독이 들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자 그제야 커피잔을 든다. 크기와 모양을 살피고 무늬 또한 유심히 본다.
그리곤 커피 향을 맡아본다.
“……!”
달달한 커피 향에 눈을 크게 뜬 백작은 살짝 맛을 본다. 그리곤 계속해서 빨아들인다.
후륵! 후르륵! 후륵! 후르르르륵―!
“흐음, 흐으음! 세상에 이런 맛이……!”
대한민국의 발명품은 이계에서도 먹히는 것이 분명하다. 터번스 백작은 감탄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떫디떫은 것이 차(茶)이다. 향은 나지만 그게 연하면 연할수록 비싼 값에 팔린다. 단맛은 거의 없다.
그런데 핫산 브리프 공작이 준 차는 향도 그윽할 뿐만 아니라 쌉쌀하면서도 달콤하다.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것이다.
“이건 대체……!”
“괜찮죠? 이곳을 방문한 기념으로 한 박스 드리죠.”
현수는 아공간에 있던 160개 들이 노란 박스를 꺼내 건넸다. 백작은 엄청난 보물을 받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물건은 로렌카 제국에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정말 귀한 차를 마셨습니다. 공작님의 후의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커피믹스 하나가 백작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나저나 저를 찾으신 이유를 들었으면 합니다.”
“뜸 들이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드마인 백작가의 옛 영지를 팔아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거절의 뜻을 밝히려 했지만 현수가 먼저 입을 연다.
“이번 영주 선발대회 때 황태자님께서 많은 배려를 해주셨습니다. 그때 힐만 공작님을 자주 뵈었습니다.”
황태자가 눈여겨보고 있으니 심복인 힐만 공작이 움직이는 건 당연하다. 그렇기에 터번스 백작은 고개를 끄덕인다.
“작위가 결정되자 가장 먼저 힐만 공작가로 찾아주길 원한다 하셨습니다.”
“그러셨겠지요.”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핫산 브리프는 곧 권력의 중심부에 설 인물이다. 따라서 자신의 계파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터번스 백작 본인이라도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 지금 이곳에 와 있습니다.”
“아……!”
터번스 백작은 나직한 탄성을 낸다.
국어 수업시간에 흔히 듣는 말 가운데 ‘행간의 의미’이다.
굳이 문자로 표현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속뜻이라는 뜻이다.
현수는 자신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하나 터번스 백작은 노회한 정치가답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았다.
하여 짧은 감탄사를 터뜨린 것이다.
현수는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다. 이심전심이면 어서 대답해 달라는 뜻이다.
“좋습니다. 드마인 백작께서 제안하신 대로 700만 골드에 예전 드마인 백작가의 영지를 그대로 반환해 드리지요.”
“화끈하시군요. 매우 흡족합니다.”
“하하! 하하하! 흡족해하시니 저도 좋군요.”
“쇠뿔은 단김에 베라고 했습니다. 계약서 작성할까요?”
“……!”
핫산 브리프 공작은 드마인 백자가의 사위이기는 하지만 계약권자가 될 수 없다. 직계자손이 아닌 때문이다. 하여 그래도 되느냐는 표정이다.
“백작께서 가문의 인장을 주시더군요.”
“아!”
터번스 백작은 또 한 번 나직한 탄성을 낸다.
* * *
“여기 있습니다.”
현수가 계약서를 내밀자 드마인 백작의 눈이 커진다. 700만 골드면 7조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그런 금액이 오가는 계약이다. 그런데 나간 지 두 시간도 안 되어 체결했다니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벌써… 벌써……? 허어, 이런, 이런! 이런……!”
백작은 계약서에 적힌 계약 내용을 눈여겨 살펴본다.
터번스 백작은 드마인 백작에게 핫산 브리프 공작령에 인접해 있는 예전의 영지를 고스란히 돌려준다고 쓰여 있다.
모든 재산은 현지에 두고 오로지 터번스 백작가의 마법사들만 철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애써 조련한 병사들까지 그대로 두고 간다는 것이다.
“허어! 이런……! 고맙네. 정말 고맙네.”
와락―!
드마인 백작은 감격을 금치 못하여 현수를 와락 껴안는다. 그리곤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꿈에서라도 되찾고 싶은 영지였지만 몇 달 후면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살림이다.
하여 엄두조차 내지 못한 일이다. 그런데 마법사의 제국답게 정말 마법처럼 며칠 만에 이루어졌다.
어찌 감격하지 않겠는가!
“아버지! 흐흑, 흐흐흑!”
현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격정적인 뭉클함에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싸미라는 부군이 귀가했다는 소리에 하던 바느질을 멈추고 달려왔다. 터번스 백작가를 다녀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집무실 문을 열자 오열하는 부친의 얼굴이 보인다. 어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가!
가문의 오랜 숙원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기쁨이 벅차오른다. 하여 현수의 동체를 와락 안아버렸다. 그리곤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린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평생… 평생 당신 하나만 바라보고 살게요. 정말 잘할게요. 흐흑, 흐흐흑!”
싸미라는 태어난 이래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자신이 결혼을 하고 나면 크기만 할 뿐 다 부서져 가는 집 한 채만 남을 뿐이다. 부친마저 세상을 뜨고 나면 마법사도 아닌, 행정가도 될 수 없는 동생 무하드 혼자만 남는다.
지금이야 토른과 셀마가 있지만 그때가 되면 둘 다 세상에 없을 나이가 된다.
혼자 남은 동생은 결혼도 못한 채 홀로 늙어가다 어느 날 쓸쓸히 차가운 방에서 숨을 거둘 것이라 생각했다.
하여 핫산 브리프 공작에게 시집가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데…….
가문은 이제 완벽하게 살아날 것이다.
핫산 브리프, 이 위대한 이름 덕분에!
싸미라는 정말 평생 발바닥을 핥으며 살라고 해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흐흑! 정말 고마워요. 평생 당신만을 사랑할게요. 내 마음을 다해 오로지 당신만을 섬길게요. 흐흑, 흐흐흑!”
싸미라의 눈물은 길었다.
드마인 백작도 울고 싸미라도 울고 있다.
어느 순간 무하드도 끼어든다. 그 역시 가문이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간 너무나 가난해서 아무것도 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능하다 낙인찍혀도 묵묵히 감내해 냈다.
친구도 없고 모두가 멸시의 눈빛만을 보냈다.
그때 그 모든 서러움이 폭발했는지 무하드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나온다. 토른과 셀마 역시 출입구 기둥에 기대어 조용히 눈물짓고 있다.
“백작님은 영지로 돌아가셔서 모두 점검하시고 모든 것을 드마인이라는 이름 아래에 놓도록 하십시오.”
“그래, 그러겠네.”
“무하드와 싸미라는 이 저택을 헐고 새집을 지어. 지금보다 더 크고 아름답게. 이제 드마인 백작가의 이름은 맥마흔의 모두가 아는 이름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