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151화 (1,150/1,307)

# 1151

식을 마친 직후 황제는 자리를 떴다. 새로 작위를 받은 귀족들과의 대면식조차 귀찮다며 떠난 것이다. 하긴 새 공작과 후작은 황태자와 정사를 논할 인물들이다.

“자, 그럼 다음은 영지 수여식입니다. 먼저 핫산 브리프 공작님, 어전으로 나와 주십시오.”

영지 수여식 역시 순서에 따라 진행되었다.

“그럼 작위를 받으신 것을 축하하는 의미의 연회가 베풀어지기 전에 선택하신 미녀들을 하사받으시겠습니다.”

“이번엔 라인리히 후마네 공작님부터 나와 주십시오.”

“그러지.”

아까는 작위를 받기 전이니 후작이었지만 현재는 공작이다. 그렇기에 후작인 황실 시종장에게 자연스레 하대한다.

“라인리히 공작님께서 선택하신 미녀는…….”

황실 시종장은 서류에 적힌 성명을 일일이 불러 확인했다.

“맞네.”

“호명된 미녀들을 모셔라!”

네 명의 미녀는 모두 라인리히 후마네 공작의 아내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공작부인이 될 여인들이다. 그렇기에 존대로 나오라 한 것이다.

어쨌거나 시종장의 말이 끝나자 문이 열리고 곱게 단장한 네 명의 미녀가 들어선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세심한 손길을 받은 티가 역력하다.

“다음은 핫산 브리프 공작님이십니다. 나오십시오.”

“그러지.”

현수 역시 자연스레 대꾸하곤 앞으로 나서자 시종장은 쪽지에 적혀 있는 이름을 부른다.

“공작님께서 선택하신 미녀는 다프네 님, 아만다 프러페 반 도델 님, 스타르라이트 님, 그리고 도로시 칼라 폰 발렌틴 님 맞습니까?”

“맞네.”

“방금 호명된 미녀분들을 모시게.”

문이 열리고 다시 네 명의 미녀가 들어선다. 호명된 역순으로 미녀들이 들어선다. 161번부터 164번까지이다.

뒤쪽에 서 있는 후작 다섯 명은 부럽다는 표정이다.

자신들이 고른 미녀들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분명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도로시 칼라 폰 발렌틴이 현수에게 예를 취한다.

마인트 대륙에서 여자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큰 예법은 아무래도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가슴골이 보일 정도로 고개를 숙이는 것인 듯하다.

아르센 대륙의 어느 도시에서 쇼핑을 마치고 귀가하던 도로시는 누군가의 마법에 걸려 이곳까지 끌려왔다.

이웃 영지 후작가의 삼남과 혼담이 오가 예복을 맞추러 나왔다가 당한 일이다.

두 번째로 인사한 스타르라이트는 가난한 집을 위해 스스로를 팔았다. 흉년이 들어 굶어 죽을 상황이었기에 제 한 몸 희생한 것이다.

세 번째로 인사한 아만다 프러페 반 도델은 도델 왕국의 공주이다. 나른한 오후에 깜박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자루 속에 담겨 있었다.

살려달라고, 구해달라고 애원했지만 모두 묵살되었다.

스타르라이트는 굶기거나 때리지만 않으면 누구에게 시집을 가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잡혀와 보니 이곳은 평범하지 않았다.

죽은 시녀의 살점을 떼어내 요리를 하는 걸 보고 그날 먹은 걸 다 토했다. 그러다 구울과 좀비도 보았다.

겁이 와락 났다. 그래서 시중드는 시녀들에게 물었다.

이곳은 흑마법사들의 제국이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은 즉시 수거되는데 구울이 되거나 좀비가 되거나 식량이 된다.

특히 젊은 여자가 죽을 경우엔 거의 대부분 부위별로 잘리고 신선한 육류라는 팻말을 단 진열대에 놓인다고 했다.

잘못 왔다는 생각에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울부짖으면 애원했다. 그랬더니 곧장 진열대로 가게 해준다고 했다.

마인트 대륙에 머문 내내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 귀족의 아내가 되면 그럴 확률이 매우 적다는 이야길 들었다. 방법을 물었더니 영주 선발대회의 상으로 주어질 미녀로 뽑히면 된다고 하였다.

다행히 엔트리에 들었다. 그다음은 제발 착한 사람에게 뽑히게 해달라고 빌었다.

다프네는 이곳에 와서도 시선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딱히 보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여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왔다. 서 있으라 하면 서 있고 자라고 하면 잤으며 먹으라 하면 먹었다.

삶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 다만 끊임없이 중얼거렸을 뿐이다.

“아아! 하인스 님,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현수에게 인도되었음에도 다프네는 아무런 말도 없고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원치 않는 사내에게 선택되었지만 이제부터 밤 시중을 들어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현수는 시종장의 인도를 받아 온 다프네의 손을 살그머니 잡았다. 그리곤 남들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직이 물었다.

“다프네, 그동안 잘 있었어?”

“……!”

다프네가 눈을 번쩍 뜬다. 이곳에 와서 처음 듣는 아르센 공용어이기 때문이다. 이때 나직한 음성이 들린다.

“나야. 하인스.”

“서, 설마……?”

“그래, 하인스. 라세안의 친구지. 누군지 알지? 근데 지금은 길게 말하기 곤란하니 나중에 말해.”

“네, 그럴게요.”

지금껏 창백하기만 했던 다프네의 안색이 확연하게 발그레해진다. 절망 속에서 한줄기 희망, 그것도 아주 굵은 희망을 본 때문이다.

현수는 다프네를 자신의 여인들 틈에 끼워 넣었다.

황태자가 인연을 맺어준 정실부인 싸미라는 다프네를 자신의 옆으로 인도한다. 투기는 여인이 버려야 할 가장 나쁜 마음이라 배운 때문이다.

핫산 브리프 공작의 뒤를 이어 후작들에게도 미녀들이 인도되었다. 모든 행사가 끝나자 현수와 라인리히 후마네 공작이 앞줄에, 바로 뒤엔 각자에게 주어진 미녀들이 섰다.

이들 뒤엔 다섯 명의 후작이 섰고, 각자의 뒤엔 각기 세 명씩 미녀 섰다.

이곳의 여인들은 모두 공작부인 아니면 후작부인이 된다. 평생 손가락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 팔자가 된 것이다.

“이로써 작위식을 마친다. 당부가 있다면 제국의 미래를 위해 가급적 많은 아이를 낳아달라는 것이네.”

지구에서라면 농담이라 생각하고 껄껄대며 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웃지 않는다. 진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녀를 상으로 주었고, 오늘부터 며칠간 황궁에 머물면서 모든 미녀를 품어야 한다.

우수한 두뇌와 아름다운 미모를 결합시키는 걸 보면 유전학에 대한 짐작이 있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모든 것이 끝났다. 곧이어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그래 봤자 바로 옆이다.

현수는 다섯 미녀와 함께 시종의 안내를 받아 연회장으로 이동하여 공작석에 앉았다.

당연히 바로 곁엔 다프네가 앉았다.

“다프네, 이걸 받아.”

“네? 이게 뭔데요?”

“묻지 말고 일단 받아.”

다프네는 현수가 건네는 펜던트를 받았다.

슬쩍 내려다보니 가운데 진한 보라색 보석이 박혀 있고 주변엔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져 있다.

다프네는 현수와 애틋한 마음이 들 만한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 함께 혼돈의 숲을 지나친 것이 거의 전부이다.

그럼에도 마치 열렬한 사랑을 나눴다 본의 아니게 떨어져 있던 기분을 느끼고 있다.

납치된 이후 너무도 간절히 구해주길 바란 때문이다.

부친 라세안은 자식들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으니 구하러 와줄 확률이 거의 없어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이 아는 유일한 남자이자 호감을 품은 사내인 현수를 열렬히 그리워한 것이다.

이 감정은 점점 증폭되어 지금은 현수가 이 세상의 전부이다. 하여 와락 안겨 그간 있었던 일들을 하소연하고 싶다.

그런데 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작위식이니 분명 축제 분위기여야 한다. 그런데 바로 곁에 앉은 현수가 유난히 긴장한 듯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부터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상석의 황태자가 신호를 하자 악단이 음악을 연주한다. 가만히 들어보니 왈츠 곡이다.

왈츠 하면 요한 스트라우스이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며 바이올린 연주자로 ‘왈츠의 아버지’라 불린다.

현수는 싸미라와 가장 먼저 춤을 추었다.

다음은 도로시 칼라 폰 발렌틴이었고, 스타르라이트, 아만다 프러페 반 도델, 그리고 다프네의 순서였다.

춤을 추며 나직이 속삭였다.

“다프네,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아까 준 그것에 달려 있는 끈을 뽑아.”

“네? 그게 무슨……?”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 정말 위급하지 않으면 절대 뽑지 말고. 알았지?”

“무슨 일인지 말해주면 안 돼요? 이제 겨우 만났잖아요.”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하는지 다프네는 와들와들 떤다.

“긴장 풀어. 그리고 지금은 그걸 자세히 설명해 줄 시간이 없어. 황궁을 떠날 때까지는 조심해야 하거든.”

“알았어요. 근데 무슨 일 없겠죠?”

다프네는 괜히 불안한 기분이 든다. 하여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피려는데 현수가 먼저 입을 연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야 해. 그리고 이제부턴 아르센 공용어를 쓰지 않을 거야.”

현수의 말에 다프네는 고개만 끄덕인다. 몹시 불안함을 느끼고 있지만 그래도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잠시 시간이 흘러 다시 싸미라의 손을 잡았다.

“공작님, 저 잘할게요. 뭐든 시키는 대로 하구요. 투기도 하지 않고 아우들하고 사이좋게 지낼게요.”

“…그래, 고마워.”

싸미라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현수는 전혀 마음이 없다.

그렇기에 허공에 대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애처롭고 애틋해하니 참 난감하다.

‘싸미라! 난 떠날 사람이야. 어쩌면 나 때문에 평생을 홀로 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마음 주면 안 돼.’

현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대신 있는 동안엔 잘해주자는 마음을 품었다. 하여 살짝 싸미라의 동체를 끌어안았다.

그래 봤자 약간 떨어져 있던 몸이 조금 더 가까워진 것뿐이다.

“저택 잘 지을 자신 있지?”

“…그럼요. 고마워요. 전부 부군 덕분이에요.”

모처럼 시선을 마주치자 함박웃음을 짓는다. 과연 ‘맥마흔의 요정’이라 불릴 만한 미모의 여인이다.

“잘 지으면 나중에 상 줄게.”

현수가 낮은 음성으로 속삭일 때 갑자기 음악이 멈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시선을 돌려보니 악사들 모두 상석의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다. 무언가를 읽고 있다.

아마 황태자의 지시로 연주를 멈춘 듯하다.

황태자의 곁에는 힐만 공작과 제국 특수첩보단장 에단 듀크 후작이 서 있다. 보아하니 상당히 긴박한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가져온 모양이다.

윈스턴 공작가를 폐허로 만들고 터번스 백작의 저택을 통째로 사라지게 한 인물은 수도에 잠입한 10서클 거수자인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

하여 어제 하루 동안 맥마흔엔 특수첩보단원들이 새까맣게 깔려 있었다. 곳곳에서 불심검문을 하는 것도 목격되었다.

현수는 물론 거리낌 없이 돌아다녔다.

핫산 브리프 공작에게 어쩔 수 있는 간 큰 특수첩보단원은 없다. 무례를 범했다가 무려 60여 명이나 아공간에 담겨 목숨을 잃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류를 모두 읽은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곤 무도회장 중심으로 내려온다. 당연히 힐만 공작을 비롯한 수신호위와 에단 듀크 후작 등도 따라온다.

“핫산 브리프 공작!”

“네?”

현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자넨 누군가?”

“네? 누구라니요? 저는 핫산 브리프입니다.”

“핫산 브리프는 작년에 바다에서 실종된 인물이야. 자유영지 헤르마에서 배를 타고 이동하던 중 파도에 휩쓸렸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실종됐다니요?”

현수는 오리발을 내밀었다.

“핫산 브리프의 시신이 발견되어 지금 수도로 가져오고 있는 중이네. 다시 묻겠다. 자넨 누군가?”

시선을 들어보니 황태자의 표정이 굳어 있다. 이 순간 9서클 마법사들이 순식간에 현수의 주위를 에워싼다.

“말하라! 자넨 누구인가?”

『전능의 팔찌』 48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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