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4
생전엔 기사였다. 당연히 명예를 중시하였다.
따라서 임전무퇴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후퇴하라니 잠시 멈칫거린 것이다. 가해진 영혼의 금제가 생전 기사였을 때의 자부심보다 더 크고 강한 때문이다.
차라리 명령을 듣지 않고 직진했다면 영원한 안식을 얻었을 것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거나 공격에 가담시켜 봐야 20m짜리 검강에 의해 가까이 다가가 보지도 못하고 소멸당할 것을 알고 즉각 뒤로 뺀 것이다.
“이제 원로 리치들께서 전진해 주십시오!”
“헬헬헬!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거늘! 이놈아, 나도 예전엔 공작이었다!”
“헐헐, 그러게. 힐만 저놈, 많이 키워줬어.”
“맞아. 요즘 애들은 어른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 겁도 없고. 한 번만 더 리치라고 부르면 입을 찢어놓을 것이다.”
“형님, 예전이나 지금이나 애들은 싸가지가 없잖아요. 힐만 저놈도 나이를 꽤 먹었을 텐데 아직 애인가 봐요.”
명령권자의 명이 떨어졌으니 전진을 하지만 존장에 대한 예의가 없는 힐만 공작은 마구 씹혔다.
“죄송합니다, 요하난 님, 야네즈 님, 조해넌 님, 야니스 님. 그리오 이오안 님.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전투 중이지만 괴팍하고 잔인한 선배 리치들의 뒤끝이 두렵기에 힐만 공작은 얼른 납작 엎드린다.
“어쨌거나 이 애송이만 잡으면 되는 건가?”
“네, 죽이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헬헬! 맡기기만 하라고. 아주 녹신녹신하게 패줄게.”
“크크! 거럼, 거럼. 오랜만에 힘 좀 씁시다.”
리치들은 현수를 완벽하게 포위한 채 점점 거리를 좁혀온다. 이놈들은 베어도 베어도 달려들 것이다. 뼈가 가루가 되도록 공격을 당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리스폰된다.
라이프 베슬을 깨뜨리지 않는 한 영원히 지속되니 9서클 마법사 100명의 전력과 다를 바 없다.
“끄응!”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냈다. 포위하고 있는 100여 명의 9서클 마법사만으로도 벅차다. 여기에 추가로 300명의 8서클 마법사가 호시탐탐 승작의 기회만 노리고 있다.
그런데 베어도 베어도 되살아나는 리치들이 썩은 내를 풍기며 다가온다.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빌어먹을. 너무 많고 너무 강하잖아. 끄응! 시간을 벌어 틈을 내야 텔레포트를 하든 차원이동을 하는데 그럴 시간을 안 주는군.’
현수는 다가오는 리치들을 보다 문득 뒤쪽의 마법사들을 보게 되었다. 거의 절반이 황태자 주변에 뭉쳐 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물론 그럴 경우 제 한 몸 던져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더 클 것이다.
“미티어 스트라이크!”
현수는 투덜거리듯 나직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막대한 양의 마나가 하늘로 쏘아져 간다.
고오오오오오-!
잠시 후, 주먹보다 큰 운석들이 놈들의 머리 위로부터 쏟아져 내린다. 까마득한 하늘로부터 직선으로 선을 그리며 다가오는데 중력가속도가 붙어 점점 빨라지고 있다.
쒜에엑! 슈아앙! 쐐에에에에에엑!
속도가 빠를수록 더 강력한 에너지를 갖게 된다.
직선운동의 운동에너지이다.
어쨌거나 운석은 엄청난 속도로 쏟아져 내린다.
그런데 ‘그 빠른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니 운석이 가진 운동 에너지[Kinetic Energy]의 총량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할 수 있다.
“아앗! 미티어 스트라이크다! 앱솔루트 배리어!”
“허억! 앱솔루트 배리어!”
“으읏! 앱솔루트 배리어! 앱솔루트 배리어!”
삽시간에 30여 개의 배리어가 허공에 생성된다.
쐐에엑! 콰앙! 슈아앙! 콰콰쾅! 쒜에엑! 콰아앙!
“컥! 크윽! 캑! 허억! 헤엑! 으윽! 이이잇!”
배리어와 운석이 부딪치면서 엄청난 격돌음이 터져 나온다. 가진 에너지의 총량이 워낙 크니 당연한 일이다.
수십 겹의 배리어가 없었다면 전멸했을 가공할 공격이다.
그럼에도 내장이 진탕하는 정도만 느꼈을 뿐 부상자조차 없다. 9서클 마스터들의 연합된 방어이기에 미티어 스트라이크도 타격을 주지 못한 것이다.
“빌어먹을!”
회심의 한 수가 허사로 돌아가자 현수는 나직이 투덜거렸다. 이때 슬그머니 다가서던 리치 하나가 말한다.
“꼬마야, 그래 봤자 아무 소용없단다. 그래도 저 애들이 명색이 9서클 마스터이다. 미티어 스트라이크를 수십 번 날려도 끄떡없을 거야.”
“크흐흐!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우릴 무시하는 거냐?”
“맞아. 우릴 놔두고 저 핏덩이들을 공격한 건 리치 따윈 위협이 안 된다는 거지? 좋아, 이제부터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똑똑히 가르쳐 주지.”
“크흐흐! 그래, 그래.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크흐흐!”
음산한 기운이 사방으로부터 엄습한다. 현수는 이제 곧 엄청난 전투가 시작될 것임에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다프네가 어떤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마침 싸미라 등이 끌려나오고 있다. 스타르라이트는 거칠게 몸을 흔들며 놈들의 마수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고 있고, 아만다 프러페 반 도델 공주 역시 발버둥 치고 있다.
테이란 왕국 후작가의 영애인 도로시 칼라 폰 발렌틴은 더 이상 끌려가지 않으려 버티고 있다.
“이런, 비겁한 놈들!”
넷이 끌려나오는 모습을 본 현수는 곧이어 등장할 다프네를 기다렸다. 초조한 눈빛이다. 혹시라도 잘못되었을까 싶은 것이다. 그런데 나오지 않는다.
“갔나? 성공했을까?”
다프네에게 준 펜던트엔 아드리안 공국 최남단의 항구도시 콘트라의 좌표를 입력해 놓았고, 초장거리 텔레포트가 가능하도록 특급 마나석을 박아놓았다. 하지만 성공 여부는 확신할 수 없다. 얼마나 먼 거리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디 성공했기를…….”
싸미라와 도로시, 그리고 스타르라이트와 아만다에겐 미안하지만 이제 더 이상 마음에 걸리는 일은 없다.
초장거리 텔레포트가 성공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현수는 기회만 주어지면 적극적으로 도주하리라 마음먹었다.
손자병법은 36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맨 마지막이 주위상(走爲上)이다. 적이 강하면 만용을 부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피하라는 뜻이다.
지금이 딱 이런 상황이다. 그러므로 죽을 때까지 싸울 일은 아니다. 다만 갈 땐 가더라도 최대한 타격을 줘야 한다.
명색이 백마법사의 총수이다. 그런데 흑마법사들이 무섭다고 그냥 도망가는 건 모양새가 빠진다.
하여 죽여도 되살아나는 리치가 아닌 뒤쪽의 마법사들을 노려보았다.
이 순간, 아드리안 공국 최남단 콘트라의 영주성 한 곳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고오오오오-!
파아앗! 콰당-!
“으읏! 여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음산해 보이는 녀석들이 싸미라와 스타르라이트, 그리고 아만다와 도로시를 제압했다.
그리고 본인에게도 싸늘한 인상의 늙은 마법사가 접근했다. 그 순간 현수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다프네,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아까 준 그거에 달려 있는 끈을 뽑아.”
“네? 그게 무슨……?”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 정말 위급하지 않으면 절대 뽑지 말고. 알았지?”
“무슨 일인지 말해주면 안 돼요? 이제 겨우 만났잖아요.”
“긴장 풀어. 그리고 지금은 그걸 자세히 설명해 줄 시간이 없어. 황궁을 떠날 때까지는 조심해야 하거든.”
다프네는 현수가 말한 순간이라 생각하여 펜던트의 끈을 힘차게 잡아당겼다. 그리곤 곧바로 빛의 향연 속에 담겼다.
그리고 아주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이곳에 나타났다.
바닥으로부터 약 30㎝쯤 위에 나타났기에 도착하자마자 나뒹군 것이다.
“으읏! 아파라. 근데 여긴 어디지?”
다프네는 아픈 무릎을 문지르며 두리번거렸다. 어느 귀족가의 방 안인 듯한데 정확히 어딘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곳은 마인트 대륙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의 책등에 쓰여진 글씨가 아르센 공용어이기 때문이다.
“대체 여기가 어딘데 이곳으로 보내셨지?”
다프네는 두리번거리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구 등을 보니 어느 귀족가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곳인지는 가늠할 수가 없다.
다프네가 이러고 있을 때 혼자 뭐라 중얼거리며 접근하는 여인이 있다.
콘트라의 영주 파이젤 백작성의 시녀 에밀리이다.
“피터 도련님은 잘 계실까? 엠마도 보고 싶네. 에휴! 언제 오려나. 그나저나 오늘도 도련님 방을 청소해야지. 언제 오실지 모르니까.”
에밀리는 피터의 방문을 노크도 없이 열었다. 이 방의 주인이 없음을 알기에 노크하지 않은 것이다.
벌컥-!
“헉! 누, 누, 누구십니까?”
에밀리는 번쩍이는 티아라까지 쓴 다프네를 보고 눈을 크게 뜬다. 이런 손님이 왔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기 때문이다.
다프네는 에밀리를 보자마가 묻는다.
“여, 여긴 어디죠?”
“네? 여기가 어디라니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여기 계시는 거예요? 네?”
보아하니 아주 높은 귀족가의 여인인 듯싶다.
영주인 파이젤 백작은 부인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지금껏 부인 이외의 여인에게 한눈을 판 적이 없다. 따라서 이 사람은 영주와 관련 있는 여인은 아니다.
그런데 걸치고 있는 의복이나 장신구 등을 보면 파이젤 백작 부인보다도 훨씬 더 호사스럽다.
“여기가 어딘지 먼저 말해주면 안 돼요?”
“여기요? 여긴 콘트라의 파이젤 백작님 성이에요.”
“콘트라? 콘트라? 콘트라가 어디죠?”
“아드리안 공국, 아니, 아드리안 왕국 최남단에 위치한 항구도시예요. 설마 그것도 모른단 말이에요?”
“아드리안? 아!”
풀썩-!
“어머! 아가씨, 아니, 부인인가? 그러기엔 너무 젊고. 이것 보세요. 정신 차려요. 정신 차리란 말이에요.”
에밀리는 피터의 침대로 쓰러진 다프네를 흔들었다. 과도하게 긴장하고 있다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왔다.
잘못되면 수없는 능욕을 당한 끝에 놈들의 음식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맥마흔에서 본 무서운 장면 때문이다.
황궁 특수첩보단원들은 죽은 시녀의 살점을 베어내 굽고, 찌고, 볶아서 먹었다. 그러면서 맛있다고 낄낄대곤 했다.
로렌카 황궁 지하의 모처엔 엄청난 수의 구울과 좀비들이 도열되어 있다.
유사시를 대비한 비축 병기라는 표현을 쓰는 것들이다. 그때 맡은 시체 썩는 냄새 때문에 사흘은 토악질을 했다.
잡혀가면 그런 끔찍한 꼴을 당할 것이라 과도하게 긴장해 있었다. 그런데 그 긴장이 풀리자 저도 모르게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쓰러진 것이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정신 차리란 말이에요! 에휴! 그렇지 않아도 귀빈이 오셔서 바빠 죽겠는데……. 안 되겠다.”
아무리 흔들어도 다프네가 깨어나지 않자 에밀리는 다른 시녀들을 데리고 왔다.
웬만하면 물을 뿌려 정신을 차리게 하겠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걸치고 있는 의복이 너무나 고급이기 때문이다.
백작부인조차 엄두를 못 낼 정도로 비싼 옷을 입었는데 물을 뿌려 젖게 할 순 없었다.
다프네는 한참 동안 헝겊 인형처럼 흔들면 흔드는 대로 움직였다. 그러다 모두가 포기했을 즈음 정신을 차린다.
“끄으으응!”
“어머! 깨어나셨어요? 깨어나셨군요.”
에밀리가 데리고 온 시녀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을 때 누군가의 음성이 들린다.
“무슨 일이지?”
막 들어선 이는 파이젤 백작의 부인이었다.
“아, 백작부인, 피터 도련님 방에 이분이 계셨는데 금방 기절하셔서…….”
“그게 무슨 소리냐? 소상히 말해보아라.”
“네, 쇤네가 피터 도련님의 방을 청소하려…….”
잠시 에밀리의 보고가 이어졌다.
백작부인은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이야기를 들은 후 막 상체를 일으키는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상당히 낯이 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