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155화 (1,154/1,307)

# 1155

“응? 어디서 본 얼굴인데. 근방 영지의 파티 석상에서 봤나? 근데 왜 기억이 안 나지?”

파이젤 백작부인이 갸웃거릴 때 다프네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실례했습니다. 다프네라 합니다.”

“…네에? 다, 다프네요? 그, 그럼 라, 라수스의 협곡을 지배하시는 라이세뮤리안 님의 따님이십니까?”

파이젤 백작부인은 대경실색하며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네, 라수스의 지배자 라이세뮤리안 옥타누스 카로길라아지바랄 님이 제 부친이세요.”

“세, 세상에! 자, 잠시만요. 자,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 주세요.”

백작부인은 금방이라도 달려가려는 듯 치마를 추켜든다. 그냥 뛰면 치마가 밟혀 엎어지기 때문이다.

“에, 에밀리! 절대, 절대 무례하면 안 돼! 알았지?”

“네?”

“위대하신 존재의 따님이셔. 절대로 무례히 굴지 마.”

“헉! 저, 정말이요?”

쿵! 쿠쿵! 쿠쿠쿵-!

“위, 위대하신 존재를 뵈옵니다.”

에밀리를 비롯한 시녀들 모두 머리를 박으며 고개를 숙인다. 위대한 존재의 딸이라면 똑같이 위대하기 때문이다.

“이, 이러지 말아요. 나, 나는 위대한 존재가 아니에요.”

“아, 아니에요. 위대하신 존재 맞아요. 그러니 잠시만 여기 계세요. 제가 가서 백작님을 모시고 올게요.”

“네? 제가 왜……? 그리고 백작님은 왜……?”

다프네에게 대답해 줄 사람은 없다. 백작을 데리고 온다는 백작부인이 어느새 헐레벌떡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에밀리를 비롯한 시녀들은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이마는 당연히 바닥에 붙어 있다.

떼면 당장에라도 죽을 것만 같은 공포심이 든 때문이다.

다프네는 뭐라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제는 안전하다는 것이다.

‘고마워요, 하인스. 내 사랑……. 죽을 때까지 사랑할게요.’

위기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먼지도 모를 곳까지 와줬다. 그리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영주 선발대회라는 목숨이 오가는 살벌한 전장에서 끝까지 버텨주었다.

그리고 당당히 승리하여 자신을 선택했다.

오늘 작위식이 있기 직전 황궁 시녀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목숨을 걸고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하러 온 하인스는 이제 영혼마저 줄 수 있을 정도의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에 있어요? 왜 오질 않는 거죠? 흐흑! 하인스, 어서 와요. 제가 꼭 안아드릴게요.’

다프네는 눈물을 흘렸다. 고마워서, 너무도 사랑해서이다.

이때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퍽, 퍽, 퍽, 퍽! 우당탕탕-!

무언가를 건드렸는지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에밀리를 비롯한 시녀들은 여전히 이마를 땅에 대고 있다.

“헉헉! 헉헉헉! 다, 다프네 님?”

헐레벌떡 달려온 파이젤 백작은 다프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누구든 찾기만 하면 팔자를 고칠 수 있을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는 여인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 초상화를 보고 또 봤다. 너무 아름다워서이고 반드시 찾아야 할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 인물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림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이곳 콘트라는 항구도시이다.

주변 국가의 상선이 수시로 드나들기에 입항료와 출항료만으로도 영주성이 운영될 정도로 많은 배가 오간다.

쿠르스 왕국, 테리안 왕국, 제라스 왕국, 라이카 왕국, 그리고 카이엔 제국과 크로완 제국의 배가 오간다.

뿐만이 아니다. 바다 건너 브리만 왕국의 배도 가끔 들른다. 지구로 치면 콘트라는 허브항만이다.

일본의 고베와 요코하마, 한국의 부산과 대만의 카오슝, 지나의 홍콩, 그리고 싱가포르가 동북아시아의 허브항만이다.

특히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컨테이너 허브항만으로 손꼽힌다.

이렇듯 많은 나라의 상선이 콘트라를 찾기에 파이젤 백작은 상당히 많은 귀족을 접한 바 있다.

아드리안 왕국의 수도 멀린에선 왕국의 귀족들도 만났다.

뿐만 아니라 인근 영지의 파티 석상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변경백이면서 항만도시를 운영하기에 그들로서는 꼭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파이젤 백작은 상당히 많은 귀족을 만났다. 그중엔 귀족의 부인과 딸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 많은 여인 중 눈앞의 다프네와 미모를 견줄 만한 사람은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것이다. 하여 말을 잇지도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여보!”

“아……!”

백작은 부인이 옆구리를 찌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다.

“정말 다프네 님이십니까? 이실리프 마탑주의 부인이 되실 분! 위대한 존재의 따님이신 그분 말입니다!”

“…네, 제가 다프네예요. 근데…….”

자신은 이실리프 마탑주의 부인이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물으려는데 파이젤 백작이 먼저 입을 연다.

“가시지요. 위대한 존재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누구요?”

“위대하신 존재 라이세뮤리안 옥타누스 카로길라아지바랄 님께서 제 집무실에 계십니다, 지금!”

“네에? 아버지가요?”

믿기지 않지만 백작과 백작부인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백작은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 돌아선다. 백작부인은 다프네가 따르면 그 뒤를 따를 요량인지 기다리고 서 있다.

“오오! 다프네!”

다프네를 발견한 라세안이 두 팔을 벌려 어서 달려오라는 몸짓을 하지만 감히 그럴 수가 없다.

하여 공손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위대하신 존재를 뵈어요.”

“하하! 이 녀석, 너는 안 그래도 된다.”

“네? 어머! 죄송해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저도 모르게 한 반문이다.

그런데 감히 위대한 존재에게 다시 말하라는 뜻이 되었기에 얼른 고개를 조아린다.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다프네 옥타누스 폰 라수스이다.”

“……!”

라이세뮤리안의 원래 이름은 라이세뮤리안 다르살마이네 옥타누스 카인토르이파치 쿠라이제이시카 카로길라아지바랄 화르토갓이슈이다.

조상들의 이름이 중첩된 이 긴 이름 중 상당 부분을 쳐냈다. 태어나기도 전에 살다가 마나의 품으로 돌아간 조상 중 별로 존경스럽지 않은 이름은 없앤 것이다.

라이세뮤리안은 본인의 이름이니 없앨 수 없고, 나머지 중 존경할 만한 옥타누스와 카로길라아지바랄만 남긴 것이다.

이 중 옥타누스는 라세안의 고조할아버지 이름이다.

이 이름을 남긴 이유는 골드 드래곤을 힘으로 찍어 누른 위대한 분이기 때문이다.

카로길라아지바랄은 훨씬 오래전의 존재인데 블랙 드래곤과 혈전을 벌여 화이트 드래곤을 아내로 취한 존재이다.

연적끼리 싸워서 이긴 건데 워낙 굉렬한 전투였는지라 드래곤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이다.

어쨌거나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이름 중 중간 이름을 다프네에게 주었다. 그리고 라수스 협곡 전체를 영지 개념으로 삼으라는 뜻에서 라수스를 추가했다.

이는 친딸로 인정하고 직접 보살피겠다는 뜻이다.

“다프네 옥타누스 폰 라수스라고요?”

“그래, 곧 바뀌겠지만 결혼 전까지는 다프네 옥타누스 폰 라수스로 살아라.”

다프네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근데 바뀐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너는 곧 다프네 멀린 킴 드 셰울이 될 거야.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이자 이실리프 왕국의 국왕이 될 하인스의 아내가 되는 거지.”

“네? 제가요?”

다프네는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 하인스 그 친구가 너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내게 널 달라고 했다.”

사실은 라세안이 강요한 것이다. 드래곤 로드와의 중재와 아드리안 왕국의 수호령 선포가 조건이었다.

“저, 정말요?”

꿈에서도 그리는 일이 하인스와 맺어져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른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하인스의 품에 안겨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하인스와의 활쏘기 내기에 이겨 소원 하나를 빌 수 있다.

아직 써먹지 않았는데 다시 만나면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물론 몹시 부끄럽겠지만 그 시간은 짧을 것이다. 대신 아주 오랫동안 행복한 삶을 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소원을 빌기도 전에 저쪽에서 먼저 청혼했다고 한다. 쌍방이 서로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이다.

다프네는 한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뇌 속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짐작한 라세안이 너털웃음을 짓는다.

“녀석. 그렇게 좋으냐? 하긴, 그 친구가 잘나긴 했지.”

현수가 검은별의 전설호를 타고 이곳 콘트라를 떠난 다음날 라세안이 당도했다.

라수스 협곡에서 쏟아져 나간 몬스터들을 다시 산맥 안으로 들여보내고 오느라 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제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가진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1,000㎞가 넘는 협곡 전부를 건사하는 건 시간이 걸릴 일이다.

도착하자마자 제일 큰 집을 찾았다. 그건 그곳을 지배하는 자가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현수가 준 아베크롬비 스타일의 티셔츠와 청바지를 걸친 라세안의 모습은 이곳 사람들의 눈에 몹시 기괴해 보였다.

그렇기에 영주성 앞을 지키던 위병은 ‘이건 웬 미친놈인가?’ 하는 표정으로 라세안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음 급한 건 라세안이었다.

“들어가 너희 영주에게 이르라. 나는 라수스 협곡의 지배자 라이세뮤리안 옥타누스 카로길라아지바랄이다. 레드 일족의 수장이 너희 영주를 보러 왔다고 하라.”

“네? 그, 그게 무슨……?”

위병은 기사나 귀족이 아니다. 그렇기에 위대한 이름을 듣고도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반문한다.

“나는 레드 드래곤이다. 가서 영주더러 나오라 하라.”

말을 마친 라세안은 눌러놓은 기세를 발산한다.

털썩-!

“헉! 위대하신 분! 죄, 죄송합니다. 소, 소인이 정말 잘못했습니다.”

너무도 놀란 위병은 심하게 말을 더듬는데 겁에 질려 소변을 지렸는지 아랫도리가 흥건하게 젖고 있다.

“시끄럽고, 가서 영주나 불러와라. 어서!”

“헉! 네! 자, 자, 잠시만요!”

챙그랑! 후다다닥-!

위병은 들고 있던 창을 내던지고 얼른 안쪽으로 달려간다. 원래는 위병들을 관리하는 기사에게 먼저 보고해야 한다.

다음은 기사의 지시에 따라 안쪽으로 가든지 해야 하는데 지금 그런 건 깡그리 무시했다.

그런 절차를 밟을 정신이 없는 것이다.

한편, 위병들이 제대로 근무하고 있는지 순찰하던 위병 담당 기사는 정문을 지키는 녀석 중 하나가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가자 무슨 일인가 싶다.

정문 앞엔 괴상한 의복을 걸친 사내 하나가 서 있다.

“뭐야? 너는 누구냐? 여긴 왜 왔어?”

“말이 짧다.”

퍼억-! 와당탕탕-!

“크흐윽!

라세안이 걷어찬 발에 가슴패기를 얻어맞은 기사는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두어 바퀴나 굴렀다.

그런데 갈비뼈에 문제가 생겼는지 뻐근한 통증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신음을 냈다.

“이잇! 이, 이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기사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투핸드 소드이다.

라세안은 급한 마음이지만 그래도 인간의 예법을 어느 정도는 지켜주려고 했다. 이곳이 아드리안 왕국이기 때문이다.

친구 하인스가 보호해 줘야 할 나라라 하여 인내심을 갖고 절차를 따르려는데 웬 애송이가 분수도 모르고 달려든다.

이럴 땐 적절한 훈육이 필요하다.

“이놈!”

쉐에에엑-!

투핸드 소드가 가슴 어림을 노리고 베어온다. 라세안은 슬쩍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 기사의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

다음 순간 목표물은 잃었지만 관성은 살아 있어 몸이 한편으로 쏠린 기사의 등을 찼다.

퍼억-! 우당탕-!

“크윽!”

어디를 어떻게 잘못 맞았는지 모르지만 한쪽 어깨가 탈구되었다. 소드를 들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나머지 한 손으로 검을 쥔 채 재차 공격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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