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7
파이젤 백작의 시선을 받은 다프네가 눈을 크게 뜬다.
“방금 들은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내고 싶은데 허락해 주실 수 있는지요?”
“네? 제겐 그런 권한이 없어요. 그건…….”
“아니, 네겐 그런 권한이 있어. 너는 하인스 그 친구의 아내니까. 게다가 그 일은 순전히 너를 구하기 위해 그 친구가 위험을 무릅쓴 거니까 네게도 권한이 있다.”
라세안은 다프네에게 허락하라는 말을 하고는 파이젤 백작을 바라본다.
“허락하니까 책으로 엮게. 단, 방금 내 딸 다프네가 말한 것처럼 조리 있고 생생해야 하네. 알았나?”
“네, 그럼요. 뛰어난 이야기꾼을 고용해서라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좋아, 책이 만들어지거든 이 동네에서만 읽지 말고 온 세상 사람이 다 볼 수 있도록 상단을 통해 사방팔방에 깔게. 이런 건 모든 사람이 다 알아야 할 일이야.”
“아! 그런 방법도 있군요.”
장사꾼이 아닌지라 파이젤 백작은 생각지 못한 일이다.
얼마 후의 일이지만 파이젤 백작은 현수가 다프네를 구하러 간 일을 한 권의 책으로 엮는다.
콘트라 제일의 이야기꾼들을 고용하여 이루어낸 일이다.
그리고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평민들을 고용하여 무한 필사시켜 아르센 대륙 곳곳에 판다. 그렇게 해서 엄청난 부(富)를 축적하게 된다.
상인들은 돈 생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일부는 법에 저촉되거나 비도덕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은밀히 하면 된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하여 누군가 불법 복제를 하여 큰 힘 안 들이고 많은 돈을 벌 것이라 예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하인스의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팔리는 책은 그럴 수 없다.
표지를 넘기면 가장 먼저 보이는 문구 때문이다.
이 책은 특별히 두 분의 허락을 받아 편찬되었다.
이 지면을 빌려 라수스 협곡의 지배자이시며 중간계의 조율자이고 위대한 존재이신 레드 일족의 큰 어른 라이세뮤리안 옥타누스 카로길라아지바랄 님께 깊은 존경과 감사의 뜻을 바친다.
아울러 그분의 따님이시자 이실리프 마탑주이시며 이실리프 왕국의 국왕이신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 님의 배우자이신 다프네 옥타누스 폰 라수스 님께도 깊은 감사와 흠모의 뜻을 드린다.
누구든 허락 없이 이 책을 배포할 경우 징벌당할 수 있다. 후환이 두렵지 않다면 시도해 봐도 좋을 것이다.
-아드리안 왕국 콘트라 영지 파이젤 백작 白
결국 수천 년이 흐르도록 ‘하인스의 모험’은 단 한 권도 무단 필사되어 배포되지 않는다.
허락한 자들이 너무도 무시무시한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엔 저작권 보호법이 있다.
누구든 남의 저작권을 침해하면 5,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 또는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런 형사처분과는 별도로 저작권자에 의해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당할 수 있다.
이는 형사처분과 별도로 저작권자가 입은 구체적인 손해를 배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P2P, 웹하드, 토렌트 등을 이용한 저작권 침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렇듯 법률이 있어도 지켜지지 않은 세상이 있건만 아르센 대륙 사람들은 참으로 도덕적이다.
어쨌거나 하인스의 모험이 필사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현수 때문이다.
현수는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는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이며 그랜드 마스터이다.
그래서 아무리 간이 큰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 모든 기사와 마법사들의 눈초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기에 필사하지 않은 것이다.
걸리면 최소 뼈가 부러지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가도 쏙 들어갈 것이다.
덕분에 파이젤 백작가는 아드리안 왕국 최고의 부자가 된다. 책을 팔아서 생긴 이득금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이는 라세안을 접대하느라 들어간 돈의 20배쯤 되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아무튼 ‘하인스의 모험’은 이 세상 모든 기사와 검사, 그리고 마법사들에게 팔린다. 뿐만 아니라 모든 귀족가와 왕궁, 그리고 제국의 황궁에서도 사들인다.
위대한 인물의 발자취임과 동시에 교훈과 웃음, 그리고 재치와 재미가 넘쳐나는 책이기 때문이다.
메인 스토리는 이실리프 마탑주가 아내가 될 여인을 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당히 많은 여인이 탐독한다.
백마 탄 왕자보다도 더 뛰어난 인물이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이야기이니 당연한 일이다.
지구에선 시집 잘 가서 팔자 핀 여자들의 이야기를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곳 아르센에선 그런 종류의 글을 ‘다프네 스토리’라는 고유명사로 부른다.
어쨌거나 나중엔 평민들도 사게 된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양이 팔린다. 물론 나중에 일어날 일이다.
어쨌거나 라세안이 책으로 엮는 데 적극 나선 이유는 다프네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 하인스의 첫째부인 카이로시아와 둘째부인 로잘린의 이름은 잊힌다.
상대적으로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가이아 여신의 성녀이자 하인스의 셋째부인인 스테이시 아르웬의 이름은 조금 오래갈 것이다.
남은 것은 케이트와 다프네이다. 하나는 드래곤의 제자이고 다른 하나는 드래곤의 딸이다. 당연히 마법적 배려가 가해져 카이로시아나 로잘린보다 훨씬 오래 살 것이다.
라세안이 베풀려는 마법적 안배가 성공적으로 가해지면 다프네의 수명은 약 500살이 될 것이다. 제니스케리안 역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 케이트 또한 그럴 것이다.
책으로 출판되면 둘 중 세상 사람들의 뇌리에 더 오래, 그리고 더 명확히 기억되는 건 당연히 다프네일 것이다.
그렇기에 출판을 종용한 것이다.
라세안의 의도대로 사람들은 케이트보다는 다프네의 이름을 더 오래 기억한다. 계획 성공이다.
어쨌거나 라세안이 책으로 엮으라 하자 다프네는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다.
“아버지, 하인스 님이 혹시…….”
“괜찮아. 그 친구는 이런 일에 신경 안 써. 그리고 나중에 뭐라 하면 내가 다 무마할 테니 너는 걱정 말거라.”
“네에.”
드래곤이 그렇다는데 어찌 말리겠는가!
“아, 잠깐만. 잊은 게 있다.”
라세안은 자신이 머물던 침실로 들어간다. 뭔가 가져올 것이 있는 듯하다.
“자, 이제 챙길 것은 모두 챙겼으니 가자.”
“네? 어디로요? 어머! 죄송해요.”
라세안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기에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물어놓고는 얼른 입을 다문다.
라세안이 반문하는 걸 싫어함을 알기 때문이다.
“먼저 미판테 왕궁으로 가야겠다. 이리 오너라.”
다프네가 라세안의 곁으로 다가가자 파이젤 백작은 얼른 물러선다.
“그동안 신세 졌네. 또 보세.”
“네? 아, 네! 아, 안녕히 가십시오.”
파이젤 백작의 허리가 꺾일 때 라세안의 입술이 달싹인다.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르-!
용언 마법답다. 하나 잔류 마나는 현수의 그것보다 많다. 효율 면에서 떨어진다는 뜻이다.
“…가셨네. 휴우우~!”
내놓고 말은 안 했지만 파이젤 백작은 그간 가슴앓이가 심했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두려운데 극진히 모시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매일 대면해야 했다. 그리고 축적되어 있던 가문의 재산 중 거의 절반이 소모되었다.
왕궁에도 라세안이 방문했음을 알렸다.
그 결과 국왕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지시받았다. 따라서 사용된 재원 가운데 일부는 보전될 것이다.
그래도 출혈이 심했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 콘트라 영주성은 드래곤이 머물던 공간이 되었다.
드래곤이 수면을 취한 침실, 드래곤이 밥을 먹은 식당, 드래곤이 거닌 정원, 드래곤이 책을 읽은 도서관, 드래곤이 수련한 연공실이 된 것이다.
후세에 기념이 될 만한 일이기에 그 정도 출혈은 충분히 감수하리라 생각한다.
“어머! 여보, 여기 좀 와보세요!”
그간 빼앗긴 영주의 침실로 들어간 백작부인의 뾰족한 음성에 파이젤 백작은 후다닥 달려 들어간다.
혹시라도 뭐가 잘못되었나 싶은 것이다.
“헉! 이건…….”
자신의 침실로 들어간 파이젤 백작은 한가운데에 놓인 상자를 보고는 입을 딱 벌린다.
가로세로가 50㎝, 높이 30㎝짜리 상자엔 보석이 하나 가득 들어 있다.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루비, 사파이어, 묘안석, 토파즈, 아쿠아마린 등등이다.
“세상에! 이 많은 걸 숙박비로 주셨어요.”
“뭔 소리야?”
“여기 이거요.”
백작부인이 내놓은 서찰엔 용사비등한 글이 일필휘지로 쓰여 있다.
그간 애썼다.
이건 숙박비이니 챙겨두도록!
-라이세뮤리안 옥타누스 카로길라아지바랄.
“흐으음! 세상의 소문이 모두 거짓이란 말인가?”
드래곤은 너무도 탐욕스러워 받는 것은 알뜰하게 받아챙겨도 주는 것은 인색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라세안은 받은 것 이상으로 되돌려 주었다. 그러니 파이젤 백작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어머나! 여보, 이것 보세요. 이거 정말 예뻐요.”
백작부인은 커다란 에메랄드를 빛에 비춰보며 신 난 표정을 짓고 있다.
드래곤은 청결하다. 하여 인간의 거처에서 지내는 걸 불편해한다. 잠자리는 냄새나고 벌레도 많은 때문이다.
유희 중일 때는 그걸 일부러 감내하는 것이다.
그런데 라세안은 당도함과 동시에 자신이 드래곤임을 밝혔다. 유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이나 불편한 곳에 머물러 줬으니 거꾸로 뭔가를 받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석을 남긴 건 전적으로 현수 때문이다.
친구인 하인스의 체면이 있기에 내키진 않았지만 가진 것 중 극히 일부를 꺼내놓았다. 그런데 파이젤 백작부인은 이걸 보고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순간, 라세안과 다프네는 미판테 왕궁에서 스르르 돋아나고 있다.
“헉! 누, 누구……?”
왕궁의 정문 안쪽에서 위병 근무 중이던 왕실기사단 소속 중견기사 호데른과 미테랑은 얼른 검을 뽑아 들었다.
뒤늦게 괴현상을 발견한 나머지 기사들 역시 검을 뽑아 들고 삼엄한 경계망을 펼친다.
왕궁은 만일을 위해 마법이 구현되지 않도록 안티 매직필드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7서클 대마법사가 그려놓은 것인지라 6서클 이하의 마법사들은 마법을 쓸 수 없다.
그런데 마법진의 효력이 있는 범위 안에서 누군가가 돋아나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아무튼 라세안은 검을 뽑아 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기사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수고들 많다. 나를 국왕에게 안내하라.”
“누, 누구냐?”
한눈에 보기에도 라세안에게선 고수의 풍모가 엿보인다.
그런 그의 뒤에 서 있는 여인은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만큼 아름답기 그지없다.
4장 이 아이를 맡기네
“호, 혹시 서, 써큐버스(Succubus)?”
써큐버스는 여자 악령으로 잠자는 사내와 정을 통한다고 알려져 있다.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져 제아무리 심지 굳은 사내라 할지라도 써큐버스를 만나면 결국엔 정을 통하고 만다. 그렇게 사내의 정기를 야금야금 빼앗아간다.
반대로 꿈속에서 여성과 정을 통하는 남성체 악령은 인큐버스(Incubus)라 칭한다.
이 둘을 통칭하여 몽마(夢魔)라 부르는 것이다.
기사들이 다프네를 보고 써큐버스라고 추측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다.
어찌 인간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에 몽마를 떠올린 것이다.
둘째는 안티 매직필드에서 돋아났기 때문이다.
몽마는 마법으로 어쩔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꿈에서만 나타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둑어둑한 저녁이다. 아직 잠들 시각은 아니다. 따라서 몽마는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