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8
“누, 누구십니까?”
다프네가 걸치고 있는 의복은 수많은 왕족이 거주하는 왕궁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다.
티아라, 목걸이, 팔찌, 반치, 귀고리, 브로치 등 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 않다.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 귀한 것이다.
왕이 왕비를 맞이할 때 입는 한껏 멋을 낸 예복 수준이다.
이러니 신분을 짐작할 수 없어 묻기만 할 뿐 액션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대, 대체 누, 누구십니까?”
“나를 국왕에게 안내하라 했다.”
“누, 누구신지 신분을 밝히셔야…….”
기사 미테랑의 물음은 중간에 잘렸다.
“나는 라수스 협곡의 지배자 라이세뮤리안 옥타누스 카로길라아지바랄이다.”
“헉! 네? 누구요?”
“자, 잠깐만요. 누, 누구시라고요?”
기사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선다.
라수스 협곡은 미판테 왕궁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인간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레드 드래곤 라이세뮤리안이 직접 선포한 일이다. 하여 국가의 균형 발전에 아주 큰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마음 같아선 공격을 해서라도 뜻을 접게 하고 싶다.
그런데 그러면 모두가 죽는다. 아주 끔찍한 결과가 예상되기에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 이유가 바로 눈앞의 존재 때문이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하여 저도 모르게 다시 물은 것이다.
“네가 감히 내게 두 번 말을 하게 하려느냐?”
라세안이 존재감을 드러내자 기사들이 일제히 주저앉는다.
털썩털썩! 털썩―!
“위, 위대한 존재를 뵈옵니다.”
“저, 저희를 용서하소서.”
기사들 모두 돈수하며 부르르 떤다. 감당조차 못할 너무도 거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 너희가 지금 내게 기다리게 하는 것이냐? 어서 나를 국왕에게 안내하라.”
“네! 아, 알았습니다. 소, 소인을 따라주십시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용기를 내서 일어선 이는 기사 미테랑이다.
왕국법에 의하면 누구든 국왕을 알현하려면 사전에 내락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따위 국법을 적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내전에 알리지도 않고 안내하려는 것이다.
“기사 호데른! 기사 마필드! 기사 데이빗! 내전으로 달려가 위대하신 분께서 오셨음을 알리도록!”
“존명!”
기사들은 더 물을 것도 없다는 듯 그대로 달려간다.
우다다다! 우다다다다다!
평상시라면 결코 보이지 않을 모습이다. 마치 꽁지 빠진 닭처럼 우르르 달려가고 있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시지요.”
“허험! 그래.”
미테랑의 안내를 받아 미판테 왕궁 내부로 접어드니 상당히 공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호데른과 마필드, 그리고 데이빗이 달려가면서 레드 드래곤 라이세뮤리안이 방문했음을 알려서 인적이 싹 끊긴 것이다. 포악한 레드 드래곤을 만났다간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에 얼씬도 않는 것이다.
“흐음! 번거롭지 않아 좋기는 한데, 그래도 이건…….”
위대한 존재가 스스로 나타났는데 아무도 와서 절하는 이가 없자 슬슬 발작하려는 것이다.
“아버지.”
“응?”
“다들 아버지가 두려운가 봐요.”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내가 누구냐?”
“그래서 없는 거예요. 그러니…….”
“알았다, 알았어. 가기나 하자.”
다프네가 하려는 말을 짐작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잠시 미테랑을 따라 걸어 들어가니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다. 선두의 인물은 머리 위에 관을 쓰고 있다. 미판테의 국왕이다.
“어, 어서 오십시오. 미판테의 왕 홀랜드 커드버리 폰 미판테가 위대하신 분을 영접합니다.”
4서클 마법사이기도 한 국왕은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한 나라의 국왕이지만 수천 년을 사는 드래곤에 비하면 스스로 미천한 존재라 여기기 때문이다.
국왕의 곁에는 노회하게 생긴 노인이 서 있다.
“저는 재상 자리에 있는 에드가 롤랑 폰 갈리아 공작이옵니다.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에드가는 6서클 마법사이다.
현수에 의해 절반이나 테세린 영지에 흡수당한 유카리안 영지의 영주 데니스 백작의 뒤를 봐주던 인물이다. 물론 정기적인 뇌물이 상납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수가 억류되어 있던 카이로시아를 내놓으라 했을 때 데니스가 제1권력자인 갈리아 공작에게 보냈다고 말한 것이다.
“저는 최고사령관인 할만 본조니 드 레비나 공작이옵니다. 위대하신 존재를 알현하옵니다.”
소드 마스터이며 막심 에밀 드 츠로쉐 백작의 장인이기도 하다. 막심은 하렌 폰 케발로 자작의 영지를 집어삼키려 영지전을 선포했던 욕심 사나운 인물이다.
영지전이 벌어졌을 그때 라수스 협곡에서 엄청난 수의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 라세안이 다프네에게 준 소변이 야기한 일이다.
그때 현수는 헬 파이어로 5천 마리의 오크와 200여 마리의 트롤, 그리고 150마리나 되는 오우거를 작살냈다.
이를 본 막심 백작군은 케발로 영지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한 모든 공성무기를 팽개치고 허겁지겁 도망갔다. (전능의 팔찌 17권)
“저는 아르가니 에이런 판 포인테스 공작이옵니다.”
현수 덕에 7서클 마법사가 되었고, 손녀인 케이트를 아내로 맞기로 하여 졸지에 공작이 된 사람이다.
미판테의 현자라 불리기도 한다.
“라이세뮤리안 옥타누스 카로길라아지바랄이다. 여기는 내 딸인 다프네 옥타누스 폰 라수스이다.”
“아! 어서 오십시오. 미판테 왕국은 두 분을 열렬히 환영하는 바입니다. 자,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래, 그러지.”
국왕의 안내를 받아 국사를 논하던 메인 홀로 들어갔다.
오늘은 미판테 왕국의 주요 국사를 논하기 위해 많은 귀족이 집결하여 회의를 하는 날이다.
그렇기에 공작, 후작, 백작이 거의 전원 모여 있다.
이들은 복도 양쪽에 서 있다가 라세안과 다프네가 지나가면 공손히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라세안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만 까닥거렸지만 다프네는 그럴 수 없었다. 하여 여기저기 머리를 숙여 답례했다.
“이쪽에 앉으시지요.”
국왕이 안내한 자리는 옥좌와 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상석에 놓여 있다.
“흐음! 그러지.”
라세안이 착석하고 다프네가 그 곁에 앉자 국왕도 앉는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입을 연 건 라세안이다.
“이 아이는 내 딸 다프네이다. 라수스 협곡은 미판테 왕국에 있으니 이 아이 또한 미판테 사람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왠지 으스스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대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그렇지요.”
“이실리프 마탑주이자 이실리프 왕국의 국왕인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을 알고 있는가?”
“그, 그분께서 왕국을 선포하셨습니까?”
아직 이곳까지는 소문이 나지 않아 모르는 모양이다.
“그래, 그 친구가 파이렛 군도의 모든 해적을 제압했다. 그리고 그곳을 이실리프 왕국으로 선포하였다.”
“허어! 그, 그분이 그러셨습니까?”
무시무시한 드래곤이 친구라고 칭하자 국왕은 입을 딱 벌린다. 상상도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그 친구의 아내가 될 것이다.”
“……!”
“이 아이 말고도 미판테 왕국의 두 아이가 그 친구의 아내가 된다. 그건 알고 있나?”
국왕은 지체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그럼요! 테세린 영지의 로잘린 로니안 드 테세린 공녀와 포인테스 영지의 케이트 에이런 판 포인테스 공녀가 그러합니다.”
둘이 있기에 미판테 왕국은 이실리프 마탑과 아주 돈독한 관계가 된다. 그렇기에 자랑스럽다는 표정이다.
라세안이 말을 잇는다.
“미판테 왕국은 운이 좋다. 셋이나 그 친구의 아내를 배출했으니. 다른 제국이나 왕국은 하나도 없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아드리안 왕국조차 그의 아내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 그럼요. 저, 정말 감사한 일이죠.”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러하다. 국왕은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지는지 조금 전보다 한결 표정이 편해진다.
“이 아이를 이곳에 맡길 생각이다.”
“네? 그게 무슨……?”
“장차 이실리프 왕국의 왕비가 될 아이이니 예법을 가르치고 교양을 쌓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데 라수스 협곡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가? 맡아주겠는가?”
“…그, 그럼요! 맡겨만 주시면 최선을 다해…….”
어찌 드래곤의 청을 거절한단 말인가!
게다가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도 아니다.
드래곤의 요청은 무조건 들어줘야 한다. 그래야 만수무강에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고맙군.”
짧게 대꾸한 라세안은 다프네에게 시선을 준다.
“이곳에서 가르치는 것을 배워라. 장차 그 친구가 너를 다시 볼 수 있도록.”
“네, 아버지.”
다프네는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하인스의 아내로 합당하기 위한 일인데 어찌 말을 듣지 않겠는가! 백 번이라도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라세안은 다시 국왕에게 시선을 준다.
“믿고 맡겨도 되겠지?”
“그럼요! 세상에서 가장 왕비다운 왕비님으로 탈바꿈시켜 드리겠습니다. 마음 놓으십시오.”
“흠! 조금 마음에 드는군.”
라세안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좋아, 믿지. 나는 급한 일이 있어 이만 가네. 텔레포트!”
샤르르르르―!
이곳은 안티 매직필드 마법진이 중첩된 곳이다. 그런데 그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라세안의 신형이 사라진다.
‘아차! 그 말을 못했네.’
국왕은 라수스 협곡의 출입 금지령을 풀어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잠시 당황하던 국왕은 이내 다프네에게 시선을 준다.
태어나 지금껏 수많은 여인을 보았다. 그런데 맹세코 다프네만 한 여인은 없었다. 공작가의 공녀가 된 로잘린과 케이트보다도 우아하고 더 교양미 넘쳐 보인다.
‘허어! 정말 대단하군. 근데 대체 뭘 더 하라는 거지? 지금도 충분히 왕비 같은데.’
라세안은 다프네가 노예상인과 함께 있을 때 더 많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 여러 가지를 배운 것을 모른다.
그렇기에 다프네를 이곳에 맡긴 것이다.
어쨌거나 국왕은 골치가 아프다. 지금도 빼어난데 얼마나 더 뛰어나게 해달라는 건지 짐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 * *
다프네가 미판테 왕궁 수석시종의 뒤를 따라 여인들이 머무는 내전으로 향할 때 현수는 위기에 처해 있다.
“허헉! 이런 빌어먹을 놈들!”
계속된 격돌로 본신의 마나는 물론이고 켈레모라니의 비늘에 담긴 마나까지 거의 모두 소진된 상태이다.
아홉이나 되는 리치들은 현수와의 대결에서 마나가 소진되자 뒤로 빠졌다. 이놈들 때문에 현수는 보유하고 있던 마나의 절반을 써야 했다.
라이프 베슬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제거를 해도 리스폰하여 재차 공격에 가담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아무튼 대결이 시작되었을 때 두 번의 멀티 스터리지 마법으로 33명을 아공간에 담았다.
이들을 제외하면 103명의 9서클 마법사가 있다.
지금은 98명으로 줄어 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건만 겨우 다섯을 처리한 것이다. 공방이 계속되는 동안 조직적으로 대항하여 숫자를 더 줄일 수 없었다.
이들 이외에도 300명의 8서클 마법사가 더 있다. 지치면 교대하는 수법으로 차륜전을 벌이는 중이다.
“헉헉! 틈을 안 주네, 틈을.”
3초 정도만 여유가 있으면 텔레포트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럴 틈조차 주지 않는다.
“이런 빌어먹을! 매직 캔슬! 매스 윈드 캐넌! 매스 아이스 스피어! 매스 매직 미사일! 매스 파이어 애로우!”
현수는 조금 전의 공격을 막은 배리어를 해제했다. 그리곤 반격을 개시했다. 이 순간 공격받은 자들이 일제히 방어 마법을 구현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