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1
“아저씨, 아저씨가 정말 우리 아빠예요?”
“…그래, 내가 네 아빠야. 이름이 철이라고 했지?”
“응!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래.”
철이는 처음 보는 아빠가 신기한지 여기저기 만져본다.
현수는 한 손으로 연희를 다독이면서 다른 한 손으로 아이를 안아 올렸다.
“그랬구나. 철이는 아빠 보고 싶었어?”
“응. 엄마가 매일매일 아빠 내일 오신다고 했거든. 근데 진짜 온 거예요?”
철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현수의 얼굴을 만지면서 신기해한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하는 표정이다.
“미안. 아빠가 조금 늦게 왔지?”
“응, 근데 괜찮아. 이렇게 왔으니까 됐어. 근데 이제 어디 가면 안 돼. 나랑 놀아줘야 하니까. 알았지?”
말을 마치곤 아무 데도 못 간다는 듯 현수를 꼭 껴안는다. 아빠를 많이 보고 싶던 모양이라 울컥하는 기분이 든다.
“그래, 그래. 아빠가 철이랑 놀아줘야지. 근데 엄마가 많이 운다. 먼저 엄마 뚝 시키고 놀자. 알았지?”
“응. 울 엄마 뚝 해야 해. 너무 많이 울면 기진맥진한대.”
“와! 우리 철이 똑똑하구나. 근데 기진맥진이 뭔지 알아?”
어린아이가 쓸 어휘가 아니기에 물은 말이다.
“응. 기진맥진은 지쳐서 기운이 하나도 없는 거잖아. 아빤 그거도 몰라? 엄마가 가르쳐 줬는데.”
현수는 자신을 쏙 빼어 닮은 철이를 보며 잠시 말을 끊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런 기분이 든 때문이다.
“흐흑! 흐흐흑! 이제 왔으니까 됐어요. 흐흐흑!”
연희는 현수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운다.
현수로부터 연락이 끊기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까지는 바빠서 그런가 보다 했다. 보름이 지나고 한 달 가까이 지나자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할 사람이 아닌 때문이다. 하여 산지사방으로 전화를 걸어 수소문을 했다.
지현도 이리냐도 현수의 행방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이실리프 의료원 건설을 총괄하기 위해 빈관에 머물던 주영 역시 모르고 있었다. 하여 이실리프 계열사 전부에 전화를 걸어 현수를 찾았지만 오리무중이었다.
천지건설에서도 현수의 행방을 모른다고 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현수는 출퇴근이 자유롭고 회사에 업무 보고를 해야 하는 입장도 아니다. 그렇기에 뭔가 새로운 일을 수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배는 점점 불러오는데 아이 아빠는 실종 상태이다. 어떤 산모가 마음이 편하겠는가!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즈음 주영이 섭외한 세계 각국의 의료진이 속속 킨샤사에 당도했다.
내과, 외과,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영상의학과, 마취통증의학과, 진단검사의학과, 병리과, 정신건강의학과, 안과, 피부과, 치과 등의 권위자들이 속속들이 모여든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한의사도 다수 지원하였다.
이들은 코리안 빌리지의 성자, 까마귀 마을의 성자, 그리고 모든 의료기관이 포기한 환자를 완치시킨 기적의 사나이 현수 때문에 몰려든 것이다.
이들에겐 미라힐Ⅰ과 미라힐Ⅱ에 대한 사용권이 주어졌다. 회복 포션을 복제 후 희석한 이것은 정말 놀라운 효능을 가졌다. 외상은 흔적도 없이 아무는데 회복 속도가 경이적이다.
이것들을 복용하면 웬만큼 중한 병이 아니라면 거의 완치되었다. 그야말로 기적의 치료제이다.
대체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미라힐 시리즈가 있어 의사들은 기분이 좋았다. 웬만하면 환자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지 않게 된 때문이다.
어쨌거나 정식 건물이 지어지기 전에 저택 앞엔 임시진료소가 세워졌다. 그리고 진료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산부인과이다. 지현과 연희, 그리고 이리냐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권지현은 출산을 위해 휴직하고 이곳으로 왔다. 이리냐도 도착했다. 그녀 역시 임신을 했던 것이다.
세 여인은 사라진 남편을 걱정하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내내 슬퍼만 한 것은 아니다.
태교를 위해 일부러 즐거운 시간을 갖으려 노력했다. 어쨌거나 그렇게 하여 출산일이 다가왔다.
먼저 연희가 아들을 낳았다. 며칠 후 지현도 아들을 출산했고 이리냐는 한 달 정도 지난 후 딸을 낳았다.
현수의 부모님 등은 손주들을 안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들은 현수가 바빠서 연락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고연 놈. 그래도 제 새끼를 낳을 때는 코빼기라도 비춰야지, 어떻게 이렇게 무심할 수 있어?”
“맞아요. 현수 걔가 이렇게 무책임한 앤지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오기만 하면 혼쭐을 내줍시다.”
부모님의 말을 받은 것은 천지건설 이연서 회장이다.
“하하! 그래도 이렇게 예쁜 손주들을 보셨으니 된 거 아닙니까? 뭔 일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요.”
현수가 천지건설 일 때문에 바쁜 줄 알고 짐짓 쉴드를 쳐주는 것이다.
“어머! 얘 좀 보세요. 눈이 정말 예뻐요.”
이리냐의 모친 안나 여사가 한 말이다. 이리냐가 낳은 딸을 바라보는 눈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다.
“얘는요. 어머, 어머! 발길질을 세게도 하네요.”
지현의 품에 있던 아이를 받아 안은 이숙희 여사는 보통 아이들보다 발육이 좋은 손자가 마냥 귀엽다는 표정이다.
곁에는 권철현 전 고검장이 있다. 지금은 콩고민주공화국 이실리프 자치령의 행정수반을 맡아 열정적으로 보내고 있다.
반둔두와 비날리아 두 지역을 동시에 개발하려니 몸은 바쁘지만 정신적으론 아주 안정적이다.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뒤에서 헐뜯는 이도 없기 때문이다.
고대 바빌론엔 함무라비 법전이라는 것이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 이 법전의 주요 내용이다.
현재 이실리프 자치령들은 일시적으로 ‘두 배 보복법’을 시행하는 중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폭행하여 전치 4주의 부상을 입힌다면 전치 8주 진단이 나올 정도로 두들겨 팬다.
사기를 쳐서 돈을 100만 원쯤 편취했다면 원금 100만 원은 물론이고 추가로 200만 원을 변상토록 한다.
한국에서처럼 돈 좀 있다고, 혹은 지위가 좀 높다고 갑질을 하면 공개적으로 개망신을 준다.
이곳은 한국과 다른 곳이니 가능한 일이다.
나쁜 놈과 범죄자, 인성 고약한 것들까지 품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 세금을 걷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자들은 처벌 후 곧장 추방이다. 그리고 영원히 이실리프 자치령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귀국하는 데 드는 돈은 당연히 본인 부담이다.
자치령에서 내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타고 가든 배를 타고 가든, 아니면 아프리카 대륙을 맨발로 걸어가든 전혀 배려해 주지 않는다.
실제로 갑질을 하던 어떤 20대 여자가 있었다.
자치령 곳곳엔 작업자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마트가 개설되어 있다. 이곳에서 일하던 엄마뻘인 직원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면서 소란을 피우는 사건이 있었다.
자신이 지불한 돈을 세어봤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를 못 믿느냐?’부터 시작하여 ‘입이 없냐?’, ‘멍청하다’ 등의 막말을 했다.
마트 직원이 대꾸 없이 고개를 숙인 채 다음 손님의 물건 값을 계산하자 ‘야, 이 씨발 년아! 입이 있으면 말을 해, 씨발 년아!’라고 고성을 질렀다.
어찌 이런 개만도 못한 인성을 가진 사람을 자치령에 살게 하여 온갖 혜택을 누리게 하겠는가!
권철현 행정수반은 보고를 받은 즉시 이 여인을 체포토록 했다. 그리고 전 재산을 몰수하여 모욕을 당한 마트 직원에게 위로금으로 지급하였다.
다음은 추방이다. 자치령 경계 바깥으로 내보내고 영원히 출입이 금지되었음을 고지했다. 물론 엄청 욕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경찰 출신 원주민이 호송을 한 때문이다.
돈 한 푼 없이 쫓겨난 이 여인의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정글을 헤매다 맹수에게 잡아 먹혔을 수도 있고, 어디가 어딘지를 모를 곳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벌써 굶어 죽었을 수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느 누구도 이 여인을 측은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 이하의 존재라 아예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권철현 행정수반은 행복하다.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신혼에 버금갈 깨가 쏟아지는 삶을 살고 있다. 여기에 손자까지 생겼다.
그렇기에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또 하나의 손자 바보의 탄생되었다.
6장 전가의 보도 기억상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쩜 3년이 넘도록 소식 한번 없을 수 있어요?”
“그게…….”
현수는 쉽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답변할 말이 궁색한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 마인트 대륙의 흑마법사들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다는 말을 할 수도 없다.
차원이동을 한다는 건 비밀 중에서 비밀이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 설명해 주기 싫어요?”
“그건 아냐. 다만…….”
잠시 말을 끊었을 때 번개처럼 스치는 상념이 있다. 대한민국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기억상실’이 그것이다.
3년간 소식을 전하지 않은 걸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변명이다.
“사실은 내가 잠깐 다쳤었어.”
“네에? 어, 어딜 얼마나요?”
“여기. 길을 가는데 여길 누가 때렸나 봐.”
“강도, 아니, 퍽치기를 당한 거예요?”
연희는 비정상적인 부위가 있는지 얼른 현수의 머리를 살펴본다. 이때 현수의 설명이 이어진다.
“그때 그 충격으로 기억을 상실했어. 그렇게 3년을 보냈나 봐. 그러다 다시 기억을 찾았지. 그래서 돌아온 거야.”
“세상에! 지금은 괜찮은 거예요?”
너무나 쉽게 거짓말에 넘어가 주니 약간은 미안한 기분이 든다.
그렇다 하여 어찌 다프네라는 어여쁜 여인을 구하려다 부상을 당했다고 하겠는가!
“응. 지금은 멀쩡해. 그나저나 오늘 며칠이야?”
“2018년 6월 28일이에요.”
“아……!”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냈다. 지난번 차원이동과 시차가 3년 1개월 하고도 13일이 지났기 때문이다.
‘스승님의 레어에서 보낸 시간이 꽤 길었나 보네. 부상이 심해서 그랬나? 근데 먹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살았지?’
현수는 전능의 팔찌를 쓰다듬어 보았다. 연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촉감은 예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내가 모르는 뭔가 감춰진 기능이 있나 보네.’
이실리프 마법서에 혹시 전능의 팔찌에 대한 추가 기록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그런 것은 기억에 없다.
멀린이 전능의 팔찌를 만들고 그것에 대해 기록을 한 후 추가시킨 기능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레어에서 깨어났을 때의 현수는 거의 뼈 위에 가죽을 씌운 듯했다.
신진대사 기능만 극도로 제어한 결과이다.
이는 멀린이 우연히 얻은 네크로맨서 계열의 마법을 개량하여 만든 것이다. 이실리프 마법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은신 마법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심장박동 소리마저 극도로 줄여 적의 예민한 이목으로부터 안전하게 하기 위한 마법이다. 그렇기에 이 마법에 대해 알면서도 그 덕을 보았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철이는 언제 태어난 거야?”
“2014년 12월 24일이에요.”
“크리스마스이브에?”
“네, 철이는 그날 태어났어요. 지현 언니가 낳은 현이는 2014년 12월 30일이에요. 이리냐가 낳은 아름이는 그보다 한 달쯤 늦은 2015년 1월 28일이구요.”
“철이, 현이, 아름이?”
“네, 아버님께서 작명원에 가서 지어오셨어요. 철이는 哲 자를 써요. 밝고 현명하라는 뜻이래요.”
“현이는?”
“현이는 賢 자를 써요. 그리고 아름이는 한글 이름인데 아름답게 성장하라는 의미래요.”
“그래, 그렇군. 그나저나 집엔 별일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