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2
현수의 시선을 받은 연희는 고개를 끄덕인다. 잠깐 사이지만 많이 진정된 듯하다.
“네, 자기가 사라진 것만 빼면 다 좋아요. 그동안 주영 씨가 애 많이 썼어요.”
“그래, 그랬겠지. 여기 의료원 짓는 건? 자치령 개발은? 계열사들은 어때?”
“에고, 하나씩 물어보세요. 일단 의료원은 완공되었어요. 준공식하던 날엔 조제프 카빌라 대통령님과 가에탄 카구지 내무장관님 등이 오셨어요. 자기가 안 보인다고 무슨 일 있냐고 물었지요.”
“10,000병상인 거지?”
혹시라도 줄여서 만들었을까 싶어 한 말이다.
“네,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다면서요.”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머지 궁금한 것을 물었다.
“의료진은 제대로 다 구한 거야?”
“그것 때문에 이실리프 브레인 이준섭 전무님 머리카락 다 빠졌어요. 엄청 힘들었나 봐요.”
“그래, 그랬겠지. 그래도 다행이네. 의료진 구축이 가장 어려운 문제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의료원은 어때? 10,000병상이면 엄청 큰 건데, 절반은 찼어?”
“절반이요? 에구, 지금도 병실이 모자라서 쩔쩔매고 있어요. 그래서 긴급하지 않은 환자들은 대기 번호를 받고 인근에서 머물고 있다고 해요.”
연희의 말처럼 이실리프 의료원은 만원이다. 대기하고 있는 환자 수는 약 3,000명이나 된다.
다른 의료기관과 달리 이실리프 의료원은 입원하자마자 다른 병원에서 가져온 의료 기록을 참고하여 추가로 검사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엔 곧바로 수술 내지는 투약을 한다.
그래서 정말 중증 환자가 아닌 경우 입원 기간이 짧다.
예를 들어 신장이식 수술을 할 경우 공여자는 3∼5일 만에 퇴원하고, 수여자는 30일 정도 입원한다.
이실리프 의료원의 경우는 공여자 2일, 수여자 8일이다.
이식 수술 후 미라힐을 환부에 발라주면 회복 속도가 경이적으로 빠르기 때문이다.
이렇듯 입원 기간이 짧음에도 환자들이 줄지어 있는 건 광범위 진통제 홍익인간과 CRPS 환자용 진통제인 NOPA, 그리고 미라힐 시리즈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실리프 의료원의 의사들은 대부분 그 분야의 전문가 중의 전문가이다.
뿐만이 아니라 의료비가 생각보다 훨씬 저렴하다.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겠다는 것이 이실리프 의료원의 모토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 세계에서 환자가 몰려오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오는 환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알다시피 미국의 의료비는 엄청나게 비싸다.
치과에서 충치 두 개를 치료하면 한화로 800만 원을 내라는 청구서가 날아오는 곳이다.
앰뷸런스를 타고 15마일쯤 떨어진 병원에 가면 100만 원짜리 청구서가 나오기도 한다.
산부인과에서 제왕절개로 출산하면 1,996만 원, 안과 백내장 수술은 507만 원, 맹장 수술은 1,513만 원이다.
한국에선 119를 부르면 앰뷸런스가 무료이다.
게다가 전 국민이 건강보험에 가입되어 있어 제왕절개는 39만 원, 백내장 수술은 28만 원, 맹장 수술은 40만 원 정도만 환자가 부담하면 끝이다.
뿐만 아니라 치료비가 많이 드는 암(癌)이나 중증 질환자로 건강보험공단에 등록되면 진료비의 5%만 부담한다.
현재 미국의 전체 인구는 약 3억 1,900만 명이다.
이 중 약 17.24%인 5,500만 명 정도는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
보험료가 너무 비싸서 가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 돈이 없는 서민이 아프면 병원으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몸으로 때운다. 병원을 찾아갔다가 파산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9년, 세계적인 정보 서비스 기업인 ‘톰슨로이터’가 미국 의료 시스템의 낭비 요인을 분석한 결과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엔 불필요한 과잉 검사와 정보 공유 체계 미비 등의 고질적인 낭비 요인이 많음이 지적되어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의 비싼 의료비는 낭비가 심한 영리 시스템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몇몇 정치인이 바로 이런 식으로 의료보험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떠든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은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이 대단히 불만스러운 것이다.
이런 것을 같은 국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 대한민국의 대다수 국민들이 불쌍할 뿐이다.
어쨌거니 이실리프 의료원을 찾은 미국인들은 대부분 보험이 없는 환자이다. 상대적으로 가난해서 그렇다.
그런데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킨샤사까지 날아와 이곳의 숙박시설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다 자기 순번이 되면 의료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한다.
그럼에도 기꺼이 돈을 지출하는 건 미국에서 치료받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친절한 서비스를 받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SNS, 그리고 입소문으로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병원에서의 치료를 엄두도 못 내던 환자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중이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의료 상황이 열악한 아프리카 각국과 동유럽 국가, 그리고 중동 등지에서도 환자가 몰려들고 있다.
이들 거의 대부분의 질환은 미라힐 시리즈를 이용한 간편한 치료로 해결된다.
불치병으로 알려져 있는 크론병의 경우엔 딱 두 번만 미라힐을 복용하는 것으로 완치된다.
한방에서 중풍이라 칭하는 뇌졸중은 뇌 기능의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급속히 발생한 장애가 상당 기간 이상 지속되는 것이다. 뇌혈관에 문제가 있는 경우엔 미라힐 희석 액을 수액에 섞는 것만으로 치료가 끝난다.
아울러 각종 혈관과 혈액순환 관련 질병들 역시 이런 수액치료법으로 간단히 해결된다.
예를 들어 동맥경화, 관상동맥협착증, 각종 동맥염과 정맥류, 그리고 각종 혈전증 등이 그러하다.
수액을 처방받고 이틀이나 사흘쯤 집중 치료를 받으면 정상인에 근접한 상태, 또는 정상인이 된다.
이것 이외에도 필요 이상으로 많은 지방 성분 물질이 혈액 내에 존재하는 고지혈증까지 정상 상태로 되돌려진다.
따라서 의사들에게 있어 미라힐 시리즈는 그야말로 신이 내린 기적의 신약이다.
하여 미라힐이 아니라 엘릭서라 부르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실리프 의료원이 완공된 이후 킨샤사의 수많은 환자가 저렴한 가격에 혜택을 입었다. 대부분이 서민이기에 원가에 가까운 진료비만 청구했기 때문이다.
콩고민주공화국 조제프 카빌라 대통령과 가에탄 카구지 내무장관은 이실리프 자치령 등을 유치한 일등공신이다.
이 덕에 실업률이 대폭 하락했다.
곧이어 이실리프 의료원이 생겨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콩고민주공화국 국민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하여 지지율이 대폭 상승하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다.
격렬하게 반격을 가하던 반군들의 움직임은 확연히 뜸해졌다. 비날리아 지역에 자리 잡은 자치령 때문이다.
그곳 개발을 위해 상당히 많은 사람을 고용했는데, 대부분이 반군의 가족이다. 매월 안정적으로 급여를 받으며 거의 대부분 주거까지 해결해 준 상태이다.
이렇듯 확실하게 먹고살 수 있는 기반이 갖춰지자 반군 활동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조제프 카빌라와 가에탄 카구지 입장에서는 일석삼조 이상의 효과가 발생되어 희색이 만면하다.
현수가 나타나기만 하면 최고 등급 훈장을 수여한다는 것은 이미 내정된 일이다.
현수가 받을 것은 국가에서 수여할 수 있는 최고의 특별대우인 ‘국가 영웅’ 칭호이다.
이 서훈은 콩고민주공화국 역사상 딱 셋뿐이다.
가장 먼저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은 독립 후 최초 총리이던 파트리샤 루뭄바(Patrice Lumumba)와 조제프 카빌라의 아버지이자 전 대통령인 라우렌트 데지레 카빌라(Laurent Desire Kabila)이다.
둘 다 사후에 수여되었다.
세 번째는 전 총리 안톤 기젱가(Antoine Gizenga)로 살아 있을 때 영예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다.
현수는 네 번째로 이 영예를 얻는 셈이다.
콩고민주공화국 법률에 따르면 서훈 전에 벌어들이던 금액과 대등한 월급과 주거, 그리고 여섯 대의 차량과 열두 명의 국가경찰을 포함한 권리와 이익이 종신토록 주어진다.
하여 ㈜천지건설로 급여 명세를 보내달라는 협조요청 공문을 보냈다. 이것이 당도하면 서훈 후 그에 합당한 금액을 지불하는 것으로 이미 내각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다.
모르긴 몰라도 천지건설에서 현수의 급여명세서가 오면 대통령을 비롯한 거의 모든 각료가 기절초풍할 것이다.
연봉이 무려 300억 원인데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법률에 따라 현수가 죽을 때까지 매년 300억 원씩 지불해야 하는데 문제는 현수의 수명이다.
멀린의 레어에서 또 한 번의 기연을 겪으면서 무려 1,500살까지 살게 되었다.
이제 겨우 34살이니 향후 1,466년 동안 더 산다.
콩고민주공화국이 이때까지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무려 44조 원이나 지불해야 한다.
나라를 거덜 낼 의결을 한 것을 아직 본인들은 모른다.
물론 두 개의 자치령과 하나의 의료원이 있어서 국가에 보탬이 되는 금액을 따지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최소 매년 3조 원 이상의 매출 실적이 오르는 것과 같을 것이니 따지고 보면 남는 장사이기는 하다.
현수는 연희로부터 의료원에 대해 소상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개원식을 무사히 치른 후 주영은 복귀했다.
그리고 연희는 의료원 재단이사장에 취임했다. 원래는 현수가 앉을 자리인데 본인이 없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재단이사장은 원장으로부터 의료원 전반에 대한 보고를 받을 수 있는 자리이다. 그렇기에 소상한 내용까지 알려줄 수 있던 것이다.
“수고가 많았네.”
현수는 다정스런 손길로 연희의 눈물에 젖은 머리카락들을 하나하나 떼어주었다.
“이제 어디 안 갈 거죠?”
“이번처럼 연락 안 되고 그런 일 다시는 없을 거야. 그나저나 지현과 이리냐는 어때?”
“다들 잘 있어요. 여기 있으면 좋은데 각자 할 일이 있어서 한국과 러시아로 돌아갔어요. 연락하면 금방 올 거예요.”
현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렇게 해. 우선 부모님을 찾아봬야지.”
“아버님, 어머님은 자기가 실종되었다는 걸 몰라요. 회사 일이 바빠서 그런 줄 아시니까 주의하세요.”
“그래, 그럴게. 마음 써줘서 고마워.”
“치이!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고맙다는 말 하는 거 아니라고 했으면서. 설마 기억을 잃었다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도 식은 건 아니죠?”
연희는 짐짓 입술을 삐죽인다. 현수는 살짝 보듬어 안으며 속삭였다.
“그럴 리가 있겠어? 이렇게 섹시한데. 철이 자면 이따… 말 안 해도 알지?”
“어머!”
연희의 몸이 단번에 굳어버린다.
3년도 더 지났지만 혼자서 현수를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현 언니랑 이리냐더러 얼른 오라고 해야 해. 안 그럼 나 죽어.’
현수는 빈관에 머물고 계시는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3년이 넘는 세월 동안 코빼기도 안 비췄다며 핀잔을 들었지만 건강한 모습을 보곤 안심하신다.
말은 안 했지만 혹시라도 며느리들이 속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현수로부터 너무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 자식이 셋이나 세상 구경을 했는데 한 번도 안 온다는 건 상식적이지 못한 일이니 당연한 의심이다.
그런데 그 의문이 말끔히 해소되었다. 당연히 매우 반가워하셨고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으셨다.
아버지는 남자가 밖에서 일을 하다 보면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길 수도 있으니 피곤하게 하지 말자 하셨다.
그래도 어머니는 걱정스러웠는지 혹시 밖에 새아기를 본 건 아니냐고 은근히 물어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