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5
이실리프 의료원을 모두 둘러본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곤 뼈와 살이 타는 밤을 보냈다. 예상대로 연희는 새벽 무렵 곯아떨어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다면서 매우 행복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남편이 곁에 있음을 새삼 느낀 때문이다.
다음 날, 현수는 반둔두로 향했다.
“어서 오시게.”
“네, 장인어른.”
현수를 맞이한 것은 이실리프 자치령 행정수반인 권철현이다.
“이실리프 메디슨부터 방문했으면 합니다.”
“그러게.”
안내를 받아 가보니 이실리프 메디슨은 다른 곳과 달리 보안이 철저하다.
입구에서 신분증을 확인하면서 사전에 약속되어 있는지를 확인한다. 그렇게 하여 안으로 들어서면 현관에서 대기하고 있는 경비원의 안내를 받도록 되어 있다.
회사 업무가 아닌 경우엔 별도로 마련된 접견실에서만 용무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외국의 첩보원들이 간혹 접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수는 자치령의 상황을 직접 알아보기 위해 일반적일 절차를 거쳤다.
그런데 자치령에서 발급한 신분증을 보여주자 즉시 문을 열어준다. 자치령의 주인임을 알기 때문이다.
경비원의 안내를 받아 현관에 당도하니 낯익은 사내가 꾸벅 고개를 숙인다.
“어서 오십시오.”
“어라! 김지우 연구실장님이 여기엔 어떻게……?”
연구에 매진하고 있어야 할 양반이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한 말이다.
“저, 이제 연구실장 아닙니다.”
“네?”
“이실리프 메디슨 반둔두 사업본부장입니다.”
나이도 있고 하니 현직에서 물러난 모양이다.
“아! 그러시군요. 불편하신 점은 없죠?”
“그럼요. 아주 좋습니다. 모든 게 만족스럽고요.”
김지우 연구실장은 가족 전부를 데리고 이곳으로 이주했다. 넓은 집, 깨끗한 자연, 쾌적한 환경, 그리고 오염되지 않은 신선한 먹거리가 이곳으로 이끈 것이다.
“안내 부탁드려도 되죠?”
“물론입니다.”
김지우 본부장의 안내를 받아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자치령에서 사용할 일반 의약품 생산 라인도 있고, 미라힐 시리즈를 제조하는 라인도 있다.
“효소가 더 필요하겠군요.”
“네, 그것도 시급히 많이 필요합니다. 전에 주신 건 거의 다 떨어졌거든요.”
“알았습니다. 만드는 대로 보내드리지요. 이번엔 조금 더 넉넉히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주시면 고맙지요.”
김지우 박사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현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둘러보다 직원들과 대화를 나눠보았다. 격무와 중노동에 시달리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모두 밝은 얼굴이기 때문이다.
“일하기 힘들지 않아요?”
“전혀요. 여기 정말 좋아요.”
원주민은 흰 이를 드러내며 순박한 미소를 짓는다.
“사는 집은 여기서 멀어요?”
“아뇨. 이 근방에서 살아요. 그 집도 아주 좋아요.”
몇 가지를 더 물었지만 나쁜 대답은 없다.
주 5일 근무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야근은 없다.
급여도 만족스럽고 생활환경은 천국이라는데 무엇을 더 묻겠는가!
이실리프 메디슨을 나온 현수는 이곳저곳을 더 둘러보았다. 자치령은 인간에게 가장 이상적인 곳이다.
물가는 싸고 범죄자는 없다. 길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은 모두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깨끗한 환경 속에서 무리하지 않는 교육을 받으며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는 곳이다.
시찰을 마치니 행정수반 권철현이 보낸 비서가 다가온다.
“영주님, 권철현 행정수반께서 안내해 드리라고 한 곳이 있습니다.”
“그래요? 어디죠?”
“가보시면 알게 될 것이라는 전언이 있으셨습니다.”
두말해서 뭐 하겠는가!
비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니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한 거대한 저택이 보인다. 아프리카 대륙엔 없는 한옥 단지이다.
“여긴 뭐 하는 곳인지요?”
“자치령의 주인이신 영주님 가족이 기거하실 곳입니다.”
“네?”
“일종의 왕궁입니다. 들어가 보시죠.”
행정수반의 비서는 절도 있으면서도 예의 바르다.
돌아보니 창덕궁과 그 후원 같은 느낌이 강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흙바닥 대신 초지가 많다는 것이다.
아울러 화재를 대비한 개울이 흐르고 있다.
야트막한 담장으로 구획한 이곳엔 현수와 아내들이 기거하는 곳을 중심으로 여러 전각이 배치되어 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현수의 집무처이다. 이실리프 자치령의 대소사에 대해 보고를 받는 자리이다.
이곳에서 현수는 왕이다.
제반 행정은 장인인 권철현이, 치안과 보안은 전 공군참모총장 김성률이 맡고 있다.
가장 큰 전각에 가보니 커다란 회의실이 보인다.
조선시대 왕처럼 대소신료들을 불러다 회의할 일은 없을 것 같다. 행정수반과 통령에게 거의 모두 일임했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개량 한옥이다.
널찍한 유리창도 있고 주방엔 싱크대와 수전도 보인다. 화장실과 욕실은 6성급 호텔 수준이다.
“마음에 드십니까?”
“좋군요.”
본인과 가족을 생각해서 지어놓은 집인데 어찌 싫다고 하겠는가! 하여 고개를 끄덕이곤 나머지를 둘러보았다.
저택 좌우엔 행정수반과 통령의 공관이 자리하고 있다.
둘 다 개량한옥으로 구성된 대저택이다.
정원을 포함한 현수의 저택은 10만 평 정도이고, 행정수반과 통령의 것은 각각 3만 평 규모이다.
셋 다 아주 잘 꾸며놓았다.
돌아올 땐 비행기를 탔다.
반둔두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킨샤사 저택 인근에 새롭게 조성된 공항에 당도했다.
이 공항의 명칭은 이실리프 에어포트이다.
이실리프 의료원이 만들어지면서 항공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나자 급하게 만든 미니 공항이다. 이곳에선 50인승 이하 소형 비행기만 이착륙한다. 킨샤사 국제공항 때문이다.
그런데 오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마치 셔틀버스처럼 운행되고 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 두 시간마다 한 번씩 이륙한다. 물론 인원이 많아지면 추가로 뜨기도 한다.
이 공항의 인근엔 여러 편의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각종 기념품 매장부터 레스토랑 등이 있다.
흘깃 바라보니 성황이다. 이실리프 의료원과 이실리프 테마파크, 그리고 이실리프 수목원을 찾는 사람이 많아서 그럴 것이다.
집에 돌아오니 연희와 철이가 반갑게 맞이한다. 모처럼 사람 사는 맛이 나서 기분이 좋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는데 지현과 현이, 그리고 이리냐와 아름이 등이 들어선다.
8장 무지한 자의 신념
“자기야!”
“아아! 자기야!”
“그래, 그래. 어서 와.”
현수는 와락 안겨드는 두 여인을 품었다.
“흐흑! 대체…….”
“미안. 미안해.”
또 한 번 울음바다가 되었다.
진정된 후 살펴보니 지현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다.
아이는 점점 커 가는데 아빠가 사라졌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돈이라면 대한민국 어느 누구보다도 많다. 너무도 사랑하는 사내가 행방불명인지라 가슴을 졸여서 그러하다.
이리냐 역시 펑펑 운다. 아름이는 멋모르고 따라서 운다. 혼혈이라 그런지 아주 예쁘다.
현수는 현이와 아름이를 교대로 안아주었다.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아빠지만 아주 잘 따랐다.
늦은 시각이기에 아이들 먼저 재웠다. 그리곤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지현과 이리냐는 혹시라도 과부가 되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했음을 감추지 않아 미안한 마음이 컸다.
다음 날 아침.
현수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께 아침 문안을 여쭸다. 두 분은 처음으로 온 가족이 다 모였다면서 몹시 기뻐하셨다. 철이와 현이, 그리고 아름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무릎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는 듯하다.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흐뭇한 풍경이다.
아침 식사를 마친 현수는 비행기를 타고 반둔두 자치령의 드넓고 비옥한 농장을 둘러보았다.
도보로 구경하기엔 너무도 큰 때문이다.
바나나 농장은 마포구와 서대문구를 합쳐놓은 것만큼 컸고, 파파야와 파인애플 재배지는 강남구와 서초구, 그리고 송파구를 합쳐 놓은 것만큼 크다.
이런 농장들을 어찌 걸어서 구경하겠는가!
휘휘 둘러보니 아리아니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식물 생장에 관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의 최상급 정령 엘리디아는 식물이 필요한 만큼의 수분을 공급하고 있고, 땅의 최상급 정령 노에디아는 잘 자라도록 양분을 조절하고 있다.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라디아와 불의 최상급 정령 이그드리아는 축산 쪽의 일을 돕고 있다.
2015년 3월에 환경부가 발표한 가축 분뇨처리 통계에 따르면 젖소를 포함한 소 사육 두수는 약 350만 마리였다.
그런데 반둔두에만 400만 마리의 소가 자라고 있다. 당연히 엄청나게 많은 축사가 줄지어 있다.
그런데 중간중간에 공장 같은 건물이 보인다. 하여 동승한 자치령 관리에게 물어보니 축산분뇨 처리장이라 한다.
사육 두 수가 워낙 많기에 매일 엄청난 양의 분뇨가 발생되고 있다.
350만 마리가 있는 한국의 통계자료엔 하루에 약 7만 6,500㎥라 기록되어 있다.
자치령 축산분뇨 처리장에선 이를 전량 수거한 뒤 비료로 만들고 있다. 그런데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아 이를 물어보았더니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이때 아리아니의 전음이 있다.
‘주인님, 분뇨를 비료로 만드는 과정에서 나는 냄새는 실라디아가 제어하구요, 이그드리아가 이를 받아 태워 버려요. 그래서 냄새가 하나도 안 나는 거예요.’
‘그래?’
‘네, 그리고 둘은 매일 축사를 돌며 해로운 것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태워 버리고 있어요.’
사람들의 눈에는 뜨이지 않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도 정령들은 감지하니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 구제역이나 돈 콜레라, 그리고 조류독감 같은 건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거지?’
‘네, 그래서 그런 것에 감염되지 않도록 매일매일 살피는 거예요. 이게 다 제가 지시한 거랍니다. 헤헷! 잘했죠?’
아리아니는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알아서 한 일이니 자신의 공을 알아달라는 듯 우쭐해한다.
‘잘했네. 진짜 잘했어. 근데 정령들을 여기에 묶어놓으면 어떻게 해? 자치령이 여기 하나만 있는 게 아닌데.’
‘아!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정령들은 얼마든지 자신을 쪼갤 수 있으니까요.’
‘정령을 쪼개? 그게 무슨 소리야?’
‘흐음! 편형동물에 속하는 생물 중 플라나리아(Planaria)라는 걸 혹시 아세요?’
‘당연히 알지. 재생력이 엄청 강해서 몸의 100분의 1짜리 작은 조각에서도 전체가 재생되는 거잖아.’
‘맞아요. 정령이 그래요. 그래서 여러 곳에서 분체들이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죠.’
‘그럼 일종의 클론인 건가?’
‘뭐, 그렇게 이해하셔도 돼요.’
현수는 고개를 끄덕여 아리아니에게 칭찬을 해주었다.
의문점을 푼 현수는 관리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기서 생산된 비료는 어디에서 사용되지요?”
“거의 대부분 농장에서 소모되죠. 남는 건 북한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북한이요?”
“네, 그쪽 토양이 워낙 박해서 엄청난 양을 보내는데도 아직 충분치 않다고 합니다.”
“으음!”
벌여놓은 일이 워낙 많으니 확인할 것도 많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행기는 저공비행을 하며 자치령 곳곳을 보여주고 있다.
비탈진 산지엔 커피나무가 생장하고 있고, 들판에선 바나나, 파인애플, 파파야, 두리안 등이 익어가고 있다.
우사와 돈사, 그리고 계사에선 소, 돼지, 닭이 왕성한 식욕을 보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농지이다.
각종 곡물 농사가 한창이다. 그중 쌀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라이셔 제국에 머물 때 성녀와 더불어 쌀의 품종개량 작업을 했다. 그때 준 종자를 파종한 듯싶다.
“논이 인상적이군요. 쌀의 수확량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