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7
슬슬 걸어서 시가지로 나가보았다.
커피숍에서 한잔 마시며 또 한 번 가격을 비교해 보았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 20원이다. 두 번까지는 리필도 해준다고 한다. 커피와 사탕수수 등 커피의 원료 전부가 자체 생산되니 비싸지 않는 것이 맞다.
자동차 전시전이 있어 들어가 보았다. 처음 보는 모델의 차가 있다.
엠블럼을 보니 이실리프 모터스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선 폼 잡기 위해 타는 자동차를 못 본 듯하다.
그리고 대형차도 없다.
카탈로그를 보니 네 종류의 자동차가 팔리고 있다.
800㏄, 1,000㏄, 1,200㏄, 그리고 1,500㏄급이다.
각각의 가격은 125만 원, 180만 원, 210만 원, 그리고 250만 원이다. 이것 역시 국내 판매가의 10분의 1가격이다.
한 가지 마음에 안 든 점은 연비이다. 1500㏄급은 리터당 약 17㎞를 가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흐음! 엔진 마법진도 왕창 만들어야겠군.”
3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으니 마법진이 부족한 것이 당연하다.
그러고 보니 디오나니아 재배지도 다녀와야 한다.
꽃은 ‘디오나니아의 눈물’이라는 천연 향수의 원료이고, 열매는 NOPA 제조에 꼭 필요하다. 이 밖에 잎사귀는 방탄복 제조에 사용된다.
말할 것도 없이 쉐리엔도 엄청 많이 필요할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아르센의 공주’라는 천연 향수의 원료 포인세도 확보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쏘러리스의 간과 스콜론의 독액을 이용한 동물성 해독제가 어찌 되었는지를 물어보지 않았네.”
쏘러리스는 소처럼 생긴 미노타우로스의 조상이고, 스콜론은 전갈처럼 생긴 독충이다.
“아! 디오나니아 잎사귀의 가시로도 식물성 해독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깜박했네.”
현수는 생각나는 것들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확인할 것이 너무나 많아서이다.
“그러고 보니 잊은 게 또 있네. 근데 주영이가 율인전자 최지원 사장으로부터 납품은 받았을까?”
선택 온도 유지마법진을 창안한 뒤 마법진이라는 것을 감추려 전자제품처럼 디자인한 것을 주문한 바 있다.
1차 주문 물량 10만 개는 납품받았을 것이다. 주문과 동시에 현금으로 대금은 지불했기 때문이다.
2차와 3차는 100만 개씩, 4차는 500만 개를 주문하라고 메일을 보냈다.
돈이야 있으니 문제가 없지만 이 많은 물량을 확보해 놨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려는지에 대해선 알려주지 않은 때문이다.
“아마 받았을 거야. 참, 리우 건설공사는 어떻지?”
시계를 확인해 보니 정오쯤이다. 서울과 킨샤사의 시차는 서울이 8시간 빠르다.
그렇다면 지금은 오전 4시쯤 된다.
“흐음! 아직 자고 있겠구나.”
현수는 서둘러 시찰을 마쳤다. 그리곤 곧장 킨샤사 저택으로 귀환했다.
* * *
“다녀오셨어요?”
“응. 애들은?”
마치 10년은 넘게 산 부부 같은 대화이다.
“다들 자요. 잘 시간이거든요.”
지현이 함초롬히 웃음 짓는다. 현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후후, 후후후!”
현수 또한 입가에 절로 미소가 어리는지라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낸다.
“이따 장인어른과 장모님께서 오신다고 했어.”
“어머! 그래요? 그럼 만찬을 준비해야겠네요.”
“응. 어르신들에겐 이 술을 드리고.”
아공간의 엘프주를 꺼내주자 이게 웬 것이냐는 표정이다.
“이건 마시면 몸이 건강해지는 술이야.”
“쳇! 세상에 그런 술이 어디 있어요? 아무리 귀한 술이라도 마시면 간이 나빠지잖아요.”
“이따 자기도 마셔봐. 내 말을 믿을 테니. 알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거.”
“좋아요. 두고 보죠.”
지현이 냉장고를 열 때 아공간에서 크리스털 술병을 꺼냈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있다는 말을 떠올린 것이다.
마차 닭 벼슬처럼 생긴 뚜껑이 있는 이것의 모양은 프랑스 코냑 중 하나인 ‘헨리4세 두도뇽(Henri IV Dudognon Heritage)’의 그것과 비슷한 형상이다.
이것은 아르센 대륙의 장인 종족이 만든 것인데 멀린의 드래곤 레어에서 가져온 것이다.
“참, 여기에 옮겨 담아서 드려.”
“어머! 이거 뭐예요? 정말 예뻐요.”
지현은 주당인 부친이 있기에 수많은 술병을 접한 바 있다. 하지만 이렇듯 화려한 것은 본 적이 없다.
헨리4세 두도뇽은 1776년에 설립된 메종 두도뇽에서 딱 한 병만 생산된 코냑이다.
4kg의 백금과 6,500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이 병에는 100년 넘게 숙성된 프랑스 코냑 원액이 담겨 있다.
지현의 부친이 제아무리 잘나가는 대한민국의 고검장이었다 하더라도 구경조차 못해 봤을 것이다.
이 술 한 병의 가격이 무려 22억 원이기 때문이다.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는 현존 최고가 코냑이다.
지현이 감탄사를 터뜨릴 때 현수는 아공간에서 엘프주 몇 병을 더 꺼내 냉장고에 넣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 마시고 싶으면 마시라는 의도이다.
‘그러고 보니 엘프들로부터 엘프주 담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언제 배우지? 근데 다들 잘 있을까?’
문득 바세른 산맥 아랫자락에 자리 잡은 이실리프 자치령의 아카데미에서 정령술을 가르치고 있을 하일라 토들레아 남매가 떠오른다.
엘프주는 천연 피톤치드를 다량 함유하고 있다. 하여 이걸 마시면 숲의 진한 향기가 코끝에 어리는 듯하다.
달콤하며 향기롭다. 도수가 제법 높음에도 불구하고 목 넘김이 부드러워 마실 때 부담스럽지 않다.
적당량을 마시면 스트레스가 확연히 감소되고 숙면을 유도한다. 아울러 각종 피부 질환이 해소되며 치매를 예방한다.
결정적인 것은 간 기능 개선 효과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과하면 아니함만 못하므로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마시면 이런 효과가 확실하게 줄어든다.
9장 피터의 걸작 금고
“너무 많지 않아요?”
현수가 냉장고에 넣은 건 약 20리터 정도 된다. 두 사람이 마시기엔 당연히 많다.
“우리도 마셔야지. 그리고 오늘만 날인가?”
“그건 그러네요.”
지현은 혀를 쏙 내민다. 이럴 때 보면 애 엄마가 아닌 것 같다. 와락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솟는다.
“참! 장인어른 가실 때 가져가실 건 따로 꺼내놓을게.”
“네, 근데 많이 드리진 마세요.”
“그래, 걱정 마.”
현수는 싱긋 웃어주었다. 그리곤 아내들을 데리고 이실리프 수목원에서 한가로운 오후를 즐겼다.
아리아니와 정령들, 그리고 가이아 여신의 축복 덕분인지 모든 수목이 싱싱하다. 달콤한 향기를 뿜는 꽃들도 만개하여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과실이 주렁주렁 달린 것도 많다. 수림 사이에 심어놓은 바이롯 역시 아주 싱싱하다.
치치치치! 치치치치! 취취취취―!
소리가 들려 시선을 돌려보니 물 줄 시간인지 스프링클러가 작동하고 있다. 작은 물방울이 햇빛에 어우러지자 수많은 무지개가 보인다. 장관이다.
바이롯에 시선을 주니 민주영이 생각난다.
‘녀석이 아주 좋아하겠군.’
아무리 바빠도 이실리프 바이롯의 사장 자리만큼은 자신에게 달라던 친구이다. 침실의 제왕이 되고 싶은 때문이다.
‘이따 통화해 봐야지. 근데 욕하겠지?’
3년이 넘도록 모든 일을 떠넘긴 채 종적을 감췄으니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에구! 쩝!”
현수는 뭐라 변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기억상실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왠지 남세스런 때문이다.
‘그래도 그거밖에 없지.’
마음을 정하곤 느긋하게 수목원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현수 일가와 러시아 무스크하코에서 이주해 온 러시아인만 드나드는 곳이다.
다시 말해 외부인 출입금지인 곳이다.
천천히 걸으며 사랑하는 아내들에게 입맞춤을 해주었다. 근무시간이 지나 아무도 없으니 남의 눈치를 볼 일은 없다.
“어서 오십시오, 사돈! 안사돈께서도 그간 안녕하셨지요?”
“하하! 네, 그럼요. 사돈도 잘 지내셨지요?”
“물론입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입구에 있던 현수의 부친이 권철현 행정수반 부부를 안으로 안내한다.
“아빠! 엄마!”
“하라부지! 할무이!”
지현과 현이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선다.
“하하! 그래, 우리 현이도 잘 있었지? 자, 이건 할아버지 선물이다.”
권철현 행정수반이 현이에게 건넨 것은 자치령에서 생산하는 초콜릿이다.
“와아! 마시께따.”
현이는 부지런히 포장을 벗긴다. 그리곤 곧장 철이와 아름이에게 내민다.
“이건 형아가 먹어. 이건 예쁜 아름이가 먹고.”
“응, 고마워.”
“응, 오빠.”
아이들의 하는 짓을 지켜보던 어른들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린다. 사이가 너무 좋으니 흡족한 것이다.
이때 엘린 가가바가 다가온다.
“만찬 준비 다 되었습니다, 가주님.”
“네, 알았습니다. 자, 어서 가시죠. 철아, 현아, 그리고 아름아. 초콜릿은 밥 먹고 이따 먹자.”
“네, 아빠!”
세 녀석은 이제 겨우 하루밖에 안 본 아빠가 몹시 마음에 드는지 환히 웃으며 소리친다.
엘프주를 곁들인 저녁식사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부친과 장인은 술 맛에 감탄하느라 여념이 없고, 모친과 장모들은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현과 연희, 그리고 이리냐는 이리저리 날뛰는 철이와 현이, 그리고 아름이에게 밥을 먹이느라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래도 근심걱정 하나 없는 아주 행복한 순간이었다.
장인과 장모는 빈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버지와 장인어른은 2차를 하고, 어머니와 장모님은 밀린 수다를 떨어야 하기 때문이다.
* * *
“주영이냐? 나다.”
“누구? 설마 현수? 야! 야! 야! 너 인마!”
주영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미안하다.”
“너 진짜! 너, 지금 어디냐? 응?”
“여기 킨샤사야.”
“으으! 으으으! 내가 미친다, 미쳐!”
주영이 앓는 소리를 한다. 현수의 음성을 듣는 순간 그간의 고통과 고뇌가 한순간에 기억난 탓이다.
“미안하다. 내게 문제가 생겨서 연락도 할 수 없었어.”
“문제? 무슨 문제? 대체 무슨 문제이기에 3년이 넘도록 전화 한번 못한 거냐? 어디 들어나 보자. 딴 데 살림 차렸어? 대체 얼마나 이쁘길래……. 아니다, 이건 아니겠구나.”
지현과 연희, 그리고 이리냐는 그냥 미녀가 아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초특급 미녀 중에서도 초특급이다.
모든 기업체에서 CF에 출연해 주길 갈망하고 있다. 연예기획사와 방송국에서도 출연만 해달라며 굽실거린다.
따라서 현수가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살림을 차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여 얼른 말을 바꾼 것이다.
“그게… 사실은 내가…….”
현수는 기억상실증을 또 한 번 팔아먹었다.
“야! 그 거짓말 진짜야?”
현수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주영의 첫 반응이다. 당연히 믿을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 아무런 방비도 없이 있다가 부지불식간에 당했어. 그래서… 근데 야, 넌 친구 말을 안 믿는 거냐?”
“그래! 너 같으면 믿겠냐? 니가 누군데!”
현수는 깨갱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래, 아무튼 사실이 그러하다. 믿어줘라.”
“좋아, 내일 당장 귀국하면 믿어주지.”
“야야, 내일은 좀 그렇지. 며칠 말미를 줘. 여기도 지금 분위기가 그렇다.”
“쩝! 그렇겠구나. 아무튼 잘해줘라. 너 없어졌다고 아버님, 어머님이 뭐라 하셨을 때 마음고생 심했으니까.”
“그래, 알았다. 조만간 보자.”
“오냐. 오거든 거하게 한잔 사야 하는 거 알지?”
“그래, 그럴게. 참, 내가 궁금한 건 이메일로 보낼 테니까 회신이나 빨리 해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