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1
“헉! 아, 아닙니다. 고, 고맙습니다, 회장님!”
구본홍은 얼른 90°로 허리를 숙이며 두 손으로 봉투를 받는다. 신혼인데 잘리면 큰일이다.
게다가 천지기획은 누구나 입사하고 싶어 하는 신의 직장이다. 출퇴근이 자유로운 탄력근무제가 운용되어 아무 때나 회사에 나와도 된다. 급여는 천지건설과 동일하다.
게다가 업무량도 거의 없다. 하루 종일 놀면서 이런저런 기획안을 만들어보다 퇴근하는 게 전부이다.
결재권자인 현수는 3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았고, 직속상관이라 할 수 있는 유민우 과장은 별로 터치하지 않는 스타일이라 모든 게 만족스럽다.
업무랄 게 별로 없는 상황이 계속되자 현수의 친구들은 모두 천지건설로 자리를 옮겼다.
이들은 천지건설 직원이 될 수 없어야 했다.
기존 직원과의 스펙 차이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직이 가능했던 건 일손이 달려서이다.
이들은 현재 자치령 개발 공사에 투입되어 있다.
어쨌거나 구본홍 대리가 봉투를 받아 들자 유민우 과장이 끼어든다.
“구 대리, 봉투 안 열어봐?”
“네? 아, 네. 근데 열어봐도 됩니까?”
구본홍이 현수에게 시선을 준다. 이에 싱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황급히 봉투를 열어본다.
결혼 축의금이다. 부회장 자리에 있으면서 5만 원이나 10만 원을 넣지는 알았을 것이다.
“어라?”
봉투를 열어보니 현금은 없다. 대신 두툼한 서류가 있다.
구본홍 대리는 접혀 있는 걸 펼쳤다.
“헉! 이, 이건…….”
“스테파니가 신혼집이 작다고 불평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회, 회장님, 세상에……!”
구본홍이 말을 잇지 못하자 박진영 부장이 나선다.
“구 대리, 대체 뭔데 그래?”
말을 하며 슬쩍 다가가 구본홍이 들고 있는 서류를 본다.
“허어! 이건…….”
“아! 대체 뭔데 그래요? 저도 좀 봐요.”
유민우 과장까지 고개를 들이밀자 현수가 끼어든다.
“유 과장, 요즘 신 주임과 열애 중이라며? 잘해봐. 둘이 결혼하면 같은 걸 주지.”
현수의 말이 떨어질 무렵 유민우의 시선은 구본홍이 들고 있는 서류에 고정되어 있다.
현수가 구본홍에게 축의금 명목으로 건넨 것은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68평형 아파트이다.
매매 가격으로 8억 5천만 원을 지불했다.
9억 원에 매물로 나온 것인데 계약 즉시 현금으로 완불하겠다고 하자 5천만 원이나 내려간 것이다.
대금을 지불하는 과정에서 융자금 5억 원은 일시 상환했다. 대출금 하나 없는 아파트이다.
그리고 취득세 및 제반 세금으로 2,040만 원과 부동산 중개 수수료 425만 원까지 모두 지불하였다.
“정말입니까, 회장님?”
유민우 과장의 눈이 대번에 커진다. 신민아 주임과의 결혼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신혼집이었다.
둘 다 넉넉한 가정이 아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 않아 모아놓은 돈도 적다. 요즘엔 데이트 비용까지 최대한 아끼고 있지만 집을 마련하려면 아직 멀었다.
“내가 언제 헛소리를 했나요?”
“아, 아니죠. 한 번도 그러신 적 없습니다. 정말 약속하신 겁니다? 신 주임과 결혼만 하면…….”
“네, 결혼만 하세요. 똑같은 걸 받을 겁니다.”
“와아! 만세! 만세!”
유민우 과장은 한편에 서 있는 신민아 주임을 바라보며 환호성을 터뜨린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난 게 있다는 듯 후다닥 신민아의 앞으로 다가간다.
그리곤 한 쪽 무릎을 꿇고 주머니 속에 간직하고 있던 반지를 꺼낸다.
“민아 씨, 나하고 결혼해 줄래요?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죠? 나랑 결혼해요. 네?”
보아하니 진즉 프러포즈를 하려고 반지를 준비했는데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
신민아 주임은 보는 사람이 많은데다 모두 직장 동료인지라 몹시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하여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유민우가 내민 반지를 바라본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11장 국적을 버리세요
“우와! 만세! 만세! 만세!”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신민아에게 반지를 끼워준다. 이때 뒤에 있던 황만규 과장이 소리친다.
“뽀뽀해! 뽀뽀해! 뽀뽀해!”
“에이, 그것 가지곤 안 돼지.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박진영 과장이 장난스럽게 소리치자 모두 따라서 외친다.
“키스해! 키스해!”
쪼오옥―!
유민우가 얼른 달려들어 신민아의 입술을 훔쳤다. 둘에겐 이게 첫 키스이다. 둘 다 혼전 순결을 중시한 때문이다.
약 20초에 걸친 열렬한 키스를 하고 유민우가 떨어져 나가자 신민아의 두 볼이 능금처럼 붉어져 있다.
이때 유민우의 시선은 현수에게 향해 있다.
“회장님…….”
“하하! 이거 추가 매물이 있는지 알아봐야겠군요. 결혼식 날짜가 확정되면 말해주세요.”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유민우는 과장된 몸짓으로 감사의 뜻을 표한다.
“박 부장과 황 과장도 아직 미혼이죠? 두 분도 결혼식이 확정되면 알려주세요.”
“헛! 정말입니까?”
황만규가 먼저 반응한다.
“황 과장, 보고도 몰라요? 회장님은 역시 통이 크십니다. 저도 날짜가 잡히는 대로 청첩장을 드리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유민우는 두 달 후 결혼한다.
구본홍이 살고 있는 아파트 앞 동의 같은 층이다.
황만규 과장은 석 달 후에 결혼하는데 유민우 과장보다 두 층 위에서 살게 된다.
직장 동료이면서 이웃사촌이 되는 것이다.
천지건설 기획영업부를 맡게 되는 박진영 부장과 이실리프 뱅크 행장대리 전무이사 김지윤의 결혼식은 현수처럼 크리스마스이브에 거행된다.
축의금과 화환 대신 받은 쌀은 전량 불우한 이웃을 위해 기부되는 아름다우면서도 소박한 결혼식이다.
현수는 이들에겐 우미내 마을의 단독주택을 결혼 선물로 준다. 대지 385평에 연면적 100평짜리 전원주택이다.
누군가 공들여 지은 신축 건물인데 사정상 급매물로 나온 걸 샀다. 가격은 상당히 비쌌지만 흡족했다.
앞에는 한강이 흐르고 있고 뒤에는 병풍처럼 산이 둘러싸여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남향집이다.
“박 부장, 회사 전반에 대한 브리핑 부탁해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현수는 진행되고 있는 공사들의 진척 사항을 보고받았다.
이 자리엔 박 부장뿐만 아니라 타 부서 부장급 직원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무엇이든 궁금한 점이 있으면 즉각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간 수고들이 많았네요. 잘 알았습니다.”
“네, 부회장님.”
천지건설 부장급 직원들은 자신보다 훨씬 어린 현수에게 허리를 꺾었다. 그만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모두들 흔쾌한 마음이다.
모두가 물러간 후 현수는 봉투 몇 개를 준비했다. 각 부서에 금일봉을 내려 회식을 하도록 한 것이다.
당연히 회사 전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동그라미 하나가 더 많은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휴우! 북한도 다녀와야 하고, 아제르바이잔이랑 러시아, 그리고 몽골과 에티오피아까지 두루 돌아다녀야 하네.”
넥타이를 슬쩍 풀어낸 현수는 우선순위를 정했다.
가장 급한 건 북한이다. 공사는 급진전되고 있는데 여기저기에서 불협화음이 나오는 중이다.
남북한 간의 입장 차 때문이다.
“근데 국적을 버리라고? 끄응!”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냈다. 예카테리나 일리치 브레즈네프 변호사로부터 온 메시지의 내용이 그러하다.
현수가 실종된 후 두 번의 해프닝이 있었다.
첫 번째는 예비군 동원훈련에 참석하라는 통지문을 보냈으나 무단으로 불참했다는 것이다.
병무청에서는 법에 따라 현수를 고발했다. 하여 벌금 50만 원을 내라는 통지문이 양평 저택으로 보내졌다.
지현은 본인과 연락이 닿지 않기에 뭐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하여 천지건설로 연락했다.
해외 근무자는 예비군훈련에서 제외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수가 해외 근무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비군훈련까지는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지현은 벌금 50만 원을 납부했다.
사랑하는 남편과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되어 죽을 판인데 벌금을 내라니 야속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사건 부풀리기 좋아하는 언론에서 물고 늘어졌다.
물론 찌라시 언론사의 기레기 기자가 한 일이다.
한바탕 댓글 전쟁이 벌어졌다.
돈 많고 성공했다 하여 예비군훈련을 빠지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현수를 옹호하는 의견도 많았지만 대세는 비난이었다.
두 번째 해프닝은 회사에 출근도 안 하는데 급여가 지불된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찌라시 언론사의 그 기레기가 기사를 썼다.
현수의 동원예비군 불참 사건을 최초로 터뜨린 후 우쭐한 기분을 느끼곤 회사 앞 카페에서 매일 애인과 노닥거렸다.
그러면서 현수와의 인터뷰를 따려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보이지 않자 천지건설 직원들을 상대로 취재를 했다.
그리곤 출근도 안 하면서 꼬박꼬박 월급만 타가는 나쁜 놈으로 묘사했다.
현수의 연봉은 300억 원이니 매월 25억 원을 받는다.
연봉으로 5,000만 원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사람이 30살에 입사하여 55세에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버는 돈을 현수는 보름 만에 번다. 이러니 월 25억 원은 어마어마하게 큰돈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현수에게 있어 이 금액은 껌 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푼돈 부스러기일 뿐이다.
어쨌거나 기레기는 현수는 매우 부도덕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이에 대해 또 한바탕 댓글 전쟁이 벌어졌다.
―와! 일도 안 하고 한 달에 25억? 완전 꿈의 직장이군.
―뭐야? 박탈감이 느껴지잖아. 아무리 김현수래도 이건 아니지. 무노동 무임금이니 일 안 했으면 반납해!
―무슨 소리야? 김현수 부회장이 천지건설에서 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연봉 300억, 70세까지 정년 보장된 거 몰라?
―맞아. 한 일에 비하면 급여가 적은 거지.
―그래도 지금은 무노동이니까 무임금이 맞아.
―어디서 미녀 끼고 놀고 있나 보지. 천지건설, 좋은 직장이다. 이래도 월급은 따박따박 주니.
―만인은 평등하다. 무노동 무임금!
―형아가 알려줄게. 김 부회장, 지금 미국에서 놀아.
―헐! 정말? 어디에서 놀아요?
―힌트. 라스베이거스 최고의 카지노.
―윈 라스베이거스(Wynn Las Vegas)인가요?
―아니. 벨라지오(Bellagio)가 최고 아닌가?
―김현수 회장은 그런 데 안 가.
―니가 봤냐? 봤어? 너, 알바지? 얼마 받냐?
댓글 전쟁은 한동안 이어졌다. 이번에도 현수는 까임을 당하는 쪽이었다.
예카테리나 일리치 브레즈네프는 일련의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아는 사람들은 알지만 일반 대중은 현수가 대한민국을 위해 얼마나 크고 많은 일을 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아니다 싶었던 모양이다. 하여 현수나 나타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흐음!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한 자치령 전부를 한국의 것이라 여길 것이라고?”
일반 대중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테리나의 의견이다.
‘그나저나 테리나는 결혼을 했을까?’
3년이 지났으니 그사이에 좋은 남자를 만났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현수는 고심했다. 한국 국적을 유지하는 것이 득이 될 수도 있지만 역으로 손해가 될 수도 있다.
“그나저나 내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나라에서 한국을 압박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고?”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실리프 우주항공(전 KAI)과 이실리프 코스모스(전 세트렉아이), 그리고 이실리프 스페이스(전 퍼스텍)에선 눈부신 성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