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3
“그간 잘 있었는가?”
“그, 그러믄입쇼. 근데 왜 이렇게 안 오셨습니까?”
“그럴 일이 있어 한동안 못 왔네. 그나저나 쉐리엔 채집은 어찌 되었는가?”
“아, 그거요. 그건 저쪽에 있습니다요.”
마레바 촌장이 손짓한 곳엔 한눈에 보기에도 결코 작지 않은 창고들이 줄지어 서 있다.
가로 20m, 세로 40m, 높이 7m 정도 되는 창고가 약 30여 개나 된다. 내부 용적이 560㎥나 되는 엄청난 크기이다.
“많이 모았는가?”
“그러믄입쇼. 그러지 않아도 요즘 채집하는 건 둘 데가 없어서 창고를 더 지어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습니다요.”
“창고가 저렇게 많은데 또 지어?”
“네, 마법사님들이 공간 확장 마법까지 걸어주셨는데도 쉐리엔을 쌓아둘 곳이 없습죠.”
“허어, 공간 확장 마법까지?”
“네, 어쨌든 잘 오셨습니다. 필요하신 만큼 가져가십시오. 그래야 또 수확해서 채워 넣을 테니 말입니다.”
마레바 촌장은 정말 다행이라는 표정이다.
“그래? 그럼 가서 보세.”
잠시 후 현수는 입을 딱 벌렸다.
촌장의 말처럼 창고엔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다.
뿐만 아니라 보존마법까지 걸려 있어 방금 채취한 것처럼 싱싱하다.
확장 비율을 확인해 보니 1 : 5이다. 겉보기엔 560㎥이지만 실제론 이것의 다섯 배인 3,360㎥씩 담겨 있는 것이다.
물론 천장에 닿을 정도는 아니니 통로와 이를 제외하면 약 3,000㎥가 쌓여 있다.
이런 것이 30개나 있으니 총 90,000㎥의 쉐리엔이 수확되어 있는 셈이다.
40피트짜리 컨테이너 하나의 용적은 대략 67㎥ 정도이다. 따라서 알베제 마을에서 수확해 놓은 쉐리엔은 약 1,340개 분량이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잠시 비켜서게.”
현수는 창고의 중심부로 비집고 들어갔다.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통로만 남겨놓고 꽉꽉 채워놓은 때문이다.
“매스 스토리지!”
샤르르릉―!
“허억!”
“헐! 이럴 수가!”
마레바 촌장과 엘베른 모두 나지막한 탄성을 낸다. 단숨에 창고가 텅텅 비어버린 때문이다.
현수는 차례차례 창고를 비웠다.
“저 창고엔 채집된 약초와 만드라고라가 있습니다요.”
“그래?”
약초는 이곳에서도 요긴하게 쓰니 남겨두어야 하지만 만드라고라는 아니다. 하여 그간 수집해 놓은 11뿌리의 만드라고라까지 아공간에 담았다.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
현수는 촌장이 좋아하는 소주와 밀가루를 꺼내놓았다.
밀가루라 하여 딱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글루텐 함량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뉜다.
12장 쉐리엔 얼마나 있지?
⊙박력분(Weak flour): 글루텐 함량 7~9%.
연질 소맥(부드러운 밀)을 사용. 제과용으로 사용.
→쿠키, 카스텔라 등.
⊙중력분(Middle flour): 글루텐 함량 9~10%.
다목적용으로 가정에서 많이 사용. 면류용으로 적당.
→국수, 짜장면, 수제비, 만두피 등.
⊙강력분(Strong flour): 글루텐 함량 12~14%.
경질 소맥(단단한 밀)을 사용. 신장성과 쫄깃함이 강해 주로 제빵용으로 사용.
→식빵, 단팥빵 등.
현수는 이 세 가지를 골고루 꺼내주었다. 물론 용도도 알려주었다.
이 밖에 상당히 많은 양의 생선을 주었다. 깊은 산중이라 먹어보지 못한 것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소금이다. 인원이 많이 늘어났으니 전보다 훨씬 많이 꺼내주었다. 아이들을 위해 사탕과 과자, 그리고 초콜릿 등도 왕창 꺼내주었다.
이 밖에 설탕과 식용유도 상당량 꺼내놓았다.
마레바 촌장은 처음 보는 기물이라면서 감탄사를 터뜨린다. 그러는 동안 마법사들이 모여든다.
위저드 로드를 알현하기 위함이다.
이들로부터 더 이상 정중할 수 없는 예를 받은 현수는 그간의 수고를 치하했다.
이들은 알베제 마을이 유지될 수 있도록 음양으로 많은 것을 베풀었다. 이는 이실리프 마탑의 휘하에 들고 싶은 열망에 자발적으로 한 일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자네들이 이실리프 마탑의 휘장을 달 수 있을 날이 있을 것이네.”
마법사들은 땅바닥에 닿은 이마가 부서질 정도로 강하게 절을 하며 감격해했다.
이실리프 마탑의 마법사들은 마탑주를 제외하곤 단 하나도 세상 밖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여 수많은 추측이 오가는 상황이다.
마탑주가 10서클 마스터이니 그 휘하에 얼마나 많은 9서클, 8서클 마법사가 있겠느냐는 것이 그것이다.
대륙엔 7대 마탑이 있는데 마탑주 중 가장 화후가 높은 이가 7서클 유저이다.
그런 화후의 마법사가 널리고 또 널렸을 것이라는 것이 마법사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어쨌거나 이실리프 마탑의 휘장을 단다 함은 마탑에 속하는 마법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실리프 마탑의 보호를 받는 마법사 신분이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거의 모두 자유 마법사이다. 다시 말해 어딘가 속해 있지 않은 신분이다. 하여 상당한 괄시와 박대를 경험하며 살았다. 배경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상 최고의 배경이 생기려 한다. 그렇기에 이처럼 감격해하는 것이다.
엎드린 채 감격에 겨워 눈물까지 흘리는 마법사들을 본 현수는 이들에게도 뭔가를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목적을 가졌지만 3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알베제 마을을 위해 제 주머니까지 털어가며 봉사한 것에 대한 보답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나 개방!”
고오오오오오오―!
현수의 몸으로부터 무지막지한 마나가 뿜어져 나간다.
이것들은 허공에서 그냥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엎드린 마법사들 하나하나에게 흘러들고 있다.
“……!”
“으헛!”
“아앗!”
첫 반응은 달랐지만 두 번째 반응은 같다. 하나같이 마나심법을 운용하는 자세가 된 것이다.
이들에게 흘러든 마나는 켈레모라니의 비늘 속에 담긴 정제된 순수 마나이다. 공간을 통해 전해졌지만 순수함이 더럽혀진 것은 아니다.
“오오! 오오오!”
누군가는 체내로 스며든 마나가 본신에 쌓여 있는 마나들을 정제하는 걸 느끼는 모양이다.
법열(法悅)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참된 이치를 깨달았을 때 느끼는 황홀한 기쁨’이다.
불교에선 이를 설법을 듣고 진리를 깨달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기쁨이라 한다. 비슷한 말로 법희(法喜)가 있다.
마법사들은 현수에게 단 한 마디도 마법에 관한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치 이치를 깨달은 것처럼 희열에 찬 탄성을 내는 이가 있다.
실제로 그간 모르던 이치를 깨달은 자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또 보세. 텔레포트!”
샤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지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예를 갖춘다. 그런데 그러지 않는 자가 셋이나 있다. 이를 본 마법사들이 감탄사를 터뜨린다.
“아아! 과연 로드이십니다!”
“단 한 말씀도 안 하셨는데 깨달음을 주시다니…….”
“로드 중의 로드! 당신은 위저드 로드가 아니라 위저드 갓이십니다.”
마법사들은 현수가 서 있던 자리를 향해 다시 한 번 정중히 허리를 꺾는다.
이 중 90° 이하로 꺾는 자는 하나도 없다. 거의 모두 135°의 예를 갖추고 있다.
* * *
“오랜만이네.”
“누구……? 앗! 마, 마, 마탑주님!”
자신의 집무실에서 전표 확인을 하고 있던 케이상단의 알론 지부장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 어서 오십시오! 정말 오랜만이십니다, 마탑주님!”
“그래, 몇 년 새 자네 신수가 아주 훤해졌군.”
“네, 모두 마탑주님 덕분입니다.”
실제로 알론은 현수의 덕을 많이 보았다.
전임 지부장 말링코가 본점으로 간 후 이곳 지부장이 된 것도 현수를 모셨다는 이유 때문이다.
“쉐리엔이 필요해서 왔네. 모아놓을 것 있나?”
“그, 그럼요! 비용은 조금 들었지만 매년 최선을 다해 수확했습니다.”
“그래, 얼마나 되는가?”
“상당히 많습니다.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알론의 안내를 받아간 곳의 입구엔 팻말 하나가 세워져 있다.
《쉐리엔 보관소》
누구든 허락 없이 이곳에 침입할 경우 이실리프 마탑주님의 분노를 살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 케이상단 테리안 지부장 알론 백
현수가 보기엔 그리 위협적이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경고이다.
현수는 위저드 로드이자 그랜드 마스터이다.
현수의 분노를 산다 함은 세상 모든 마법사와 기사를 적으로 두겠다는 뜻이다. 누가 감히 이를 감당해 내겠는가!
이 팻말을 걸기 전에는 이곳에 귀중품이라도 있나 싶어 좀도둑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따로 경계 근무자를 두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팻말이 떡하니 걸린 날 이후 이곳을 찾는 좀도둑은 하나도 없다. 현수의 분노가 두려운 것이다.
실제로는 아무 쓸모도 없는 쉐리엔만 잔뜩 쌓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흐음! 제법 크군.”
“그럼요. 마탑주님께서 명을 내리셨는데 당연히 이 정도는 모아드려야죠.”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케이상단의 창고 역시 공간 확장 마법과 보존 마법이 걸려 있다. 알베제 마을의 마법사들이 이곳까지 와서 수고해 준 결과이다.
현수가 이곳에서 아공간에 담은 건 120,000㎥를 상회한다. 40피트 컨테이너 1,800대 분량이다.
케이상단의 알론이 3년이 넘도록 오지도 않는 현수를 위해 쉐리엔을 채취한 이유는 일전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드라고라를 최대한 확보해 달라고 한 현수는 예상보다 늦게 왔다. 그때 부른 것보다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해서 큰 이득을 보았다.
그리고 볼펜을 팔 수 있도록 해줬다. 모나미 153볼펜 12,000자루를 준 것이다.
현수는 하나당 최소 1실버는 받을 것이라 예상했다.
한국 돈으로 치면 10만 원이다. 문방구에서 자루 당 600원 정도에 팔리니 160배 이상의 폭리이다.
하지만 이건 현수의 생각이다.
볼펜을 보고 있던 알론은 세트 판매를 고려했다.
장부를 기록하다 보면 검정색만으론 부족할 때가 있다.
이익은 검정색, 손해는 붉은색이나 파란색으로 기록하면 훨씬 보기에 편할 것이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나머지 색으로 기록하면 된다. 늘 장부를 끼고 살기에 단숨에 색깔의 효용성을 깨달은 것이다.
아무튼 검정, 파랑, 빨강 한 세트를 1골드에 팔았다. 550배 이상의 폭리를 취한 것이다.
세상에 없던 필기구인데다 물량까지 한정되어 있다 하니 귀족가 행정관들이 앞다퉈 사갔다.
볼펜심 하나의 소매가격은 150∼200원 수준이다. 알론은 이를 1실버에 팔았다. 500∼660배 폭리이다.
그 결과 5,400골드를 벌었다. 한국 돈으로 54억 원이다.
당시의 현수는 볼펜을 팔아 쉐리엔 채집 비용으로 쓰라고 했다. 시킨 대로 일꾼들을 사서 쉐리엔 채집에 나섰다. 일당을 지급해 보니 10톤당 1골드 정도가 들었다.
오늘 120,000㎥의 쉐리엔을 납품했다. 2㎥당 1톤 정도 되니 16,000톤 정도를 더 수확해 놓은 것이다.
“내가 얼마를 더 지불하면 되는가?”
“네? 그게…….”
알론은 돈을 달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하늘같은 마탑주 덕분에 이 위치에 올랐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으면 추가 상품은 없네.”
“네? 아, 아닙니다. 1,600골드만 더 주시면 됩니다.”
“…그럼 남는 게 없지 않나?”
“어, 어떻게 제가 감히……. 괜찮습니다.”
현수는 바보가 아니다. 알론의 심사를 짐작한 것이다. 다만 얼마나 비용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아공간 오픈!”
먼저 모나미 153 볼펜 검정, 파랑, 빨강을 각각 3,600자루씩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