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4
알론은 맛있는 음식을 바라보는 눈길로 이를 보고 있다.
다음으로 꺼낸 건 플러스 펜이다. 이것은 각각 2,400자루씩이다. 네임 펜은 1,200자루씩 꺼냈다.
알론의 입이 딱 벌어진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인 때문이다. 이때 뇌리를 스치는 상념이 있다.
‘대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똑같은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지? 드워프도 못하는 일인데 정말 대단하시다.’
마탑주라 가능하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종이이네.”
현수가 꺼낸 건 A4용지 500박스이다.
이 중 하나를 열고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알론은 눈을 크게 뜬다. 새하얀 종이에 티 한 점 박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수는 수성인 플러스 펜과 유성인 네임 펜에 대해 설명해 줬다. 알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현수를 바라본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드느냐는 의미일 것이다.
“이건 자네에게 주는 내 선물이네.”
현수는 먼저 꺼낸 모나미 153 볼펜 10,800자루를 알론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이, 이 많은 걸 전부요?”
검정, 파랑, 빨강 한 세트의 정가는 1골드이다. 그렇다면 방금 3,600골드를 선물로 받은 것이다.
지구로 치면 36억 원짜리 선물이다.
당연히 입이 딱 벌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간 애쓴 것도 있고 해서 특별히 주는 것이네. 그리고 이건 오늘 받은 것에 대한 잔금이네.”
이번에 내민 건 플러스 펜이다.
모나미 153에 비해 필기 감이 좋으니 세트당 1골드 50실버는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3,600골드를 잔금으로 준 것이다. 이 중 1,600골드가 부족했으니 케이상단이 번 건 2,000골드이다.
아주 만족할 만한 거래라 할 수 있다.
“이건 팔아서 쉐리엔 채취 비용으로 하게.”
네임 펜 1,200세트와 A4용지 500박스이다.
네임 펜은 한번 쓰면 지워지지 않는다 하니 플러스 펜보다는 더 받을 생각이다. 세트당 2골드면 2,400골드가 된다.
문제는 A4용지이다. 값을 가늠할 수 없다.
한 박스당 2,500장씩 담겨 있다. 장당 2쿠퍼를 받으면 박스당 50실버이다. 이런 게 500박스이니 250골드이다.
5쿠퍼이면 625골드에 해당된다.
일단 2,650∼3,025골드를 선금으로 받은 셈이다. 성실히 쉐리엔은 채집해 놓으면 또 상당한 이득을 줄 것이다.
그렇기에 알론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접는다.
“마탑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어찌 감당할지 모르겠습니다. 늘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아냐. 내가 더 고맙지. 그동안 쉐리엔을 채취하고 보관하느라 애 많이 썼네. 참, 그간 애써준 인부들에게도 약간의 인사를 하고 싶은데 자네가 전해주겠나?”
“네? 그게 무슨……? 인부들에겐 이미 일당을…….”
알론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현수는 아공간에서 구충제를 꺼냈다. 위생이 좋지 않은 곳이라 회충, 촌중, 십이지장충, 요충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음을 알기에 꺼낸 것이다.
“이건 구충제라 하는 것이네. 이렇게 해서…….”
껍질을 벗겨 복약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아울러 그 효능도 가르쳐 주었다.
알론은 세상에 이런 것도 있느냐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어린아이들이 똥을 싸면 때론 벌레 비슷한 것이 보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현수는 알론과 더불어 선술집으로 향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세실리아 여관으로 향했다. 식사할 시간도 되었고 알론과 더불어 술 한잔 마시고자 함이다.
끼이익―!
와글와글!
주점의 문을 여니 아직 해도 안 떨어졌는데 불콰하게 취한 자들이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다. 복장을 보아하니 임무를 마치고 갓 복귀한 용병단인 모양이다.
그간의 노고에 대한 돈을 받고 한잔 걸치는 중이다.
“여어, 이게 누구신가? 고매하신 케이상단 알론 씨께서 여긴 어쩐 일로 행차하셨소?”
말투에 약간은 어쭙잖다는 기색이 어려 있지만 알론은 대꾸하지 않고 빈 테이블을 찾았다.
“어허! 이거 왜 이러시나? 오랜만에 봤으면 아는 척이라도 해야지. 우리가 뭐 모르는 사이인가?”
시선을 들어보니 30대 후반이다. 알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이 사내는 거친 용병 생활이 몸에 밴 듯하다.
“톰슨, 나는 지금 귀한 손님과 식사를 하러 왔네. 나중에 이야기하게.”
“오호! 중요한 손님? 나 같은 용병 나부랭이는 감히 비교도 못할 만큼 귀한 손님이니까 아가리 닥치고 찌그러져 있으라는 이야기인가?”
이번엔 적나라하게 비아냥거린다.
“톰슨, 정말 귀한 손님이니 나중에 이야기하세.”
알론은 현수에게 시선을 주며 죄송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에 현수는 개의치 말라는 뜻으로 슬쩍 웃어주었는데 톰슨이 이를 본 모양이다.
“뭐여? 둘이 사귀어? 이봐, 알론. 설마 이 반반한…….”
“어허! 입 닥치지 못할까? 어디서 감히!”
알론이 벌떡 일어서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선술집 주객들의 시선이 쏠린다.
“어이, 톰슨, 왜 그래?”
“다들 알지? 케이상단의 알론 말이야. 지부장이 되기 전에는 아주 상냥하고 싹싹했는데 그 후론 싸가지가 왕창 없어진 알론 말이네.”
톰슨의 말에 일부만 고개를 끄덕이고 대부분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알론이 싸가지가 없다는 말에 동의 못하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톰슨의 말이 이어진다.
“내가 오랜만이라고 했더니 여기 있는 이 애송이와 한바탕 즐기러 가려다 걸렸는지 소리를 지른 것이네.”
“어이! 톰슨, 알론이 남색을 즐기던 뭐 하던 그게 자네하고 무슨 상관인 거야?”
“그러게. 너하곤 상관없잖아.”
“아니, 상관이 있지. 내가 젊잖게 인사를 했는데 안 받아주잖아? 한마디로 싸가지가 없어져서 그런 거네. 안 그런가? 그렇게 생각 안 해?”
톰슨의 유들유들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알론이 성난 표정으로 소리친다.
“톰슨, 너 뒈지고 싶어?”
“뭐라고? 하하, 하하하! 오래 살다 보니 별말을 다 듣네. 상단 지부장 주제에 감히 B급 용병인 내게……. 좋아, 덤벼! 아주 작살을 내줄 테니! 그리고 너, 너는 옆에 찌그러져 있어! 돈 몇 푼에 엉덩이나 파는 주제에 까불지 말고!”
“뭐, 뭐라고? 이런 미친……!”
알론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앞으로 튀어 나가려 한다. 톰슨과 싸우면 진다는 걸 알지만 감히 하늘같은 마탑주를 남색의 상대로 여긴 걸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용병들은 기다렸다는 듯 테이블을 옮겨 자리를 비운다.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다.
돈도 안 내고 누구 하나 얻어터지는 삼삼한 구경을 하게 되었으니 얼씨구나 하면서 홀의 중앙을 비운 것이다.
톰슨은 기다렸다는 듯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알론을 향하여 손가락 끝을 까딱거린다. 용기가 있으면 덤비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시선은 현수에게 준다.
“어이, 애송이, 방금 경고한 대로 너는 찌그러져 있어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너도 흠씬 얻어터진다. 알았나?”
“저런 미친……!”
분기탱천한 알론이 소매를 걷고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순간이다.
“아니, 다들 왜 이래요? 여기가 무슨 싸움장인 줄 알아요? 싸우려면 나가서 싸우지 하필이면 왜……?”
웬 여인의 고함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세실리아 주점의 열린 문 사이엔 귀족가 여인 하나가 쌍심지를 돋우고 서 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기사 두 명과 열 명의 병사들이 도열해 있다.
“앗! 세, 세실리아 백작부인이다!”
“뭐야? 어라? 정말이네.”
용병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곤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숙인다.
“올테른의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나이 용병단’ 일동이 백작부인께 인사드립니다.”
올테른에서 가장 헤론 찜을 맛있게 하는 세실리아 여관집 딸 세실리아가 맞다.
이전 같으면 농담을 지껄이겠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
2년 전 세실리아는 인근 백작령으로 시집을 갔다.
평민임에도 미모가 빼어나고 몸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나는 여인이라는 소문이 번진 결과이다.
백작가 차남과 혼인하면서 올테른을 떠난 세실리아는 불과 1년 만에 백작부인이 되었다. 시아버지와 시아주버니가 몬스터 토벌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은 결과이다.
그리고 백작가의 다음 대를 이어갈 아들을 낳아서 일약 신분이 상승된 것이다.
“왜 여기서 싸움을 하지? 분명 우리 여관 내에서는 싸우지 말라는 팻말을 걸어놨을 텐데.”
세실리아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인 팻말이 걸려 있다.
실내에선 절대 싸우지 말 것.
집기가 파손될 경우 원상 복구비는 물론이고 그로 인한 영업 손실까지 배상하게 될 것임.
― 세실리아 토리안 드 말로.
어린 시절부터 술 취한 자들의 싸움질을 이골이 나도록 본 세실리아이기에 이런 팻말을 걸어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나이 용병단원들은 팻말을 보며 머리를 긁적거린다.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이때 세실리아는 빈 공간에 서 있는 톰슨과 알론에게 시선을 주고 있다. 누가 봐도 상대가 안 될 싸움이다.
톰슨은 거구이고 알론은 약질이다. 왜 이런 무모한 대결을 펼치려나 싶어 둘러보던 중 하인스와 시선이 마주친다.
“어머낫! 세, 세상에! 하, 하인스 마탑주님 아니세요?”
세실리아는 백작부인이라는 걸 잊었는지 현수에게 쪼르르 달려와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테리안 왕국의 백작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어찌 이실리프 마탑주와 비교한단 말인가!
세실리아의 뒤쪽에 있던 두 명의 기사도 얼른 달려와 군례를 올린다.
세실리아는 결혼한 후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하인스와의 인연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했다.
마법사의 하늘인 하인스 마탑주가 손거울과 빗, 그리고 머리핀과 향수를 하사한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페퍼민트, 라벤더, 그리고 아세로라 향이 나는 비누와 여러 벌의 귀한 원피스도 주었다.
백작과 시아주버니, 그리고 남편은 이것들을 본 후 세실리아를 더욱 아꼈다. 가문의 영광으로 여긴 것이다.
이 이야긴 소문이 되어 번졌다.
그 결과 호시탐탐 말로 백작령을 탐내던 이웃의 후작령으로부터 선물이 왔다. 그간의 불협화음은 잊어달라는 의미에서 보내는 결혼 축하 예물이었다.
자식이 평민과 결혼하여 가문의 부(富)가 늘어나지 않음을 마땅치 않게 여기던 시아버지의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대단한 예물이었다.
어쨌거나 세실리아가 이실리프 마탑주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은 테리안 왕국 곳곳으로 번져갔다.
그 결과 기울어가던 가세가 단번에 일어섰다. 여러모로 현수의 덕을 본 것이다.
쿵, 쿵―!
“말론 영지의 기사 스테판이 위대하신 그랜드 마스터님을 알현하옵니다.”
“말론 영지의 기사 로레임이 검의 하늘을 뵙습니다. 정말이지 일생의 광영이옵니다.”
두 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오른 주먹으로 왼 가슴을 강하게 두드리며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본 톰슨은 넋이 나가 버렸다.
하늘보다도 높은 이실리프 마탑주를 보고 애송이라는 표현을 한 것만으로도 죽을죄를 지은 것인데 알론의 남색 상대라고까지 했다.
“으으! 으으으!”
쿵―!
오금에서 힘이 빠지는지 저도 모르게 두 무릎을 꿇는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허어엉!”
톰슨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자신의 눈알을 파내고 싶었다. 어떻게 하늘보다도 높은 분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후회가 막급하다.
“세실리아,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네, 그럼요! 마탑주님 덕분에 저 백작부인이 되었어요.”
환히 웃는 세실리아는 아주 예뻤다. 그리고 순수하게 반가움만 어려 있는 순박한 미소이다.
“잘 지낸다니 다행이네. 알론과 한잔하러 왔는데 여긴 조금 시끄럽군. 전에 내가 쓴 그 특실 아직도 괜찮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