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5
“그럼요! 저의 여관은 늘 청결하답니다. 제가 모실게요.”
세실리아는 예전 여급이던 그 시절처럼 안내하려는 모양이다. 어찌 그렇게 되도록 놔두겠는가!
“아냐. 어딘지 아는데. 알론과 한잔할 테니 헤론 찜 2인분과 슬럼주 두 병 부탁해.”
“네, 알겠습니다. 특별히 아주 푸짐하고 맛있게 만들어달라고 할게요. 호호호!”
“참, 여긴 선불이지? 얼마야?”
“네? 아, 아니에요. 어떻게 감히 마탑주님에게……. 저희 여관에 와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이니 특별히 무료로 서비스해 드릴게요.”
“정말?”
현수는 짐짓 눈을 크게 떴다.
“대신 저기 저 팻말 아래에 마탑주님 이름을 한 번만 써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여기 없으니까 자주 싸워서 테이블이 망가진다고 아빠가 걱정이거든요.”
현수는 싸움 금지 팻말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리곤 손을 내밀어 허공을 휘저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검기가 뿜어지자 팻말의 글귀가 바뀐다.
실내에선 절대 싸우지 말 것.
누구든 이 경고를 무시하는 자는 이실리프 마탑의 응징을 받을 것이다.
― 제2대 마탑주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
13장 라수스 협곡에서
“……!”
용병들은 팻말이 글귀가 바뀌는 현장을 목도하곤 입을 딱 벌린다. 허공을 격하고 이러한 기현상을 빚어낼 수 있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마탑주가 직접 팻말의 글귀를 바뀌게 한 것은 이제 곧 소문이 날 것이다.
하여 수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어 세실리아 여관은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드나듦에도 결코 싸움은 벌어지지 않는다.
손님 대부분이 마법사 아니면 기사이기 때문이다. 하긴 자신들의 하늘이 직접 내린 명령이다. 어찌 어기겠는가!
늘 헤론 찜과 슬럼주만 마시고 얌전히 돌아간다.
무식하고 거친 용병들도 헤론 찜을 먹으러 수없이 드나들지만 어느 누구도 경거망동을 못한다.
마법사와 기사들이 함께하고 있음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어머! 고마워요. 호호, 호호호!”
세실리아의 웃음소리가 주점 내부로 번져나갔지만 용병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다.
쿠쿵! 쿠쿠쿠쿠쿠쿠쿠쿵―!
“검의 하늘을 뵙습니다!”
“마법사의 하늘을 알현하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나이 용병단원 전부는 불콰했던 취기가 단숨에 사라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며 전율에 떨었다.
국왕과 황제들, 그리고 마탑주들조차 뵙기 힘든 존재를 두 눈에 담았음이 너무도 영광스러운 것이다.
“모두 일어서라.”
“존명!”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현수의 말이 이어진다.
“다들 아까처럼 즐기게. 단, 이곳에서 싸움은 안 되네. 알겠는가?”
“물론이옵니다.”
“당연하신 말씀이옵니다. 절대 싸우지 않겠습니다.”
“톰슨 자네는?”
“네? 저, 저, 저는…….”
“알론과 싸울 건가?”
“아, 아닙니다. 소인이 어찌……. 알론 지부장, 미안하네. 내가 눈이 삐었어. 내 실수였네. 용서해 주시게.”
톰슨은 필사적으로 입을 놀렸다. 알론의 입에서 다른 소리가 나오면 꼼짝없이 죽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게.”
“고, 고맙네! 여, 열 번이라도 사겠네!”
톰슨은 지옥의 문 앞에서 구함을 받았음을 깨닫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한바탕의 해프닝을 끝으로 현수는 하루에 10실버를 내야 하는 세실리아 여관 특실로 들어섰다.
잠시 후, 푸짐한 헤론 찜과 슬럼주가 들어온다.
문득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는 깊은 겨울이었다. 그리고 아르센 대륙에 와서 처음으로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었다.
쪼르르르!
술잔을 채우고 단숨에 들이켰다. 딸기같이 생긴 슬론으로 만든 이 술은 포도주 맛이다.
“크흐음! 맛이 괜찮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 맛이 괜찮았다.
현수는 알론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저녁을 즐겼다.
오늘의 일로 케이상단은 더욱 발전하게 될 것이다.
마탑주와 독대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식사까지 하는 사이라는 게 알려지면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 *
“라세안! 라세안! 이곳에 있는가?”
마나에 의지를 실어 멀리멀리 퍼뜨려 보았다. 한참 동안 무반응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허공에서 빛 덩어리가 생성된다.
파아앗―!
“하, 하인스!”
“라세안, 오랜만이네.”
“이 친구야,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라세안은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살펴본다.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음이 느껴진다.
“다프네는?”
“그 아인 잘 있어. 그나저나 어찌 된 일이야?”
“다프네에게서 이야길 들었나?”
“그래, 9서클 마스터들이 우글거린다며.”
라세안은 드래곤으로서 약간 쪽팔린다는 느낌이다. 마법은 8서클 마스터 수준이고 검은 소드 마스터 수준이다.
둘 다 궁극에서 한 수 아래의 수준이다.
그런데 저쪽엔 한쪽의 끝을 이룬 놈이 많다고 한다. 다프네가 뭘 잘못 알고 과장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확인할 것은 해야 한다. 하여 물은 것이다.
“그래, 자네 말대로 9서클 마스터들이 우글거리더군. 130명이 넘었어.”
“세상에, 맙소사!”
라세안은 우려가 현실이라는 말에 입을 딱 벌린다.
다프네에게서 들은 마인트 대륙의 이야기를 드래곤 로드에게 한 바 있다. 그때 옥시온케리안은 다프네가 뭘 몰라서 한 이야기로 판단했다.
인간의 수명은 길어야 100년이다.
현수야 타 대륙에서 왔고 스승이 특이한 존재이니 예외로 치지만 이곳 인간들은 9서클 마스터에 오르는 게 쉽지 않다.
옥시온케리안의 계산에 의하면 10억 명당 하나이다. 실제로 멀린이 살아 있을 때 아르센 대륙의 인구가 그러했다.
알려지지 않은 마인트 대륙에 얼마나 많은 인구가 있는지 몰라도 100명을 상회하는 9서클 마스터는 말이 안 된다.
이게 합당하려면 마인트 대륙엔 1,000억 명이 넘는 인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럴 것 같지 않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 만큼 넓은 대륙은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라세안도 로드의 의견에 동참했다. 지극히 상식적이며 합당한 의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다 하니 입이 딱 벌어진 것이다.
“그, 그래서 어찌 되었는데?”
“그러니까 나는 다프네를 찾으려…….”
현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블랙일 아일랜드로 향하는 동안 크라켄을 잡은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라세안은 드래곤의 명령을 무시하는 크라켄들이 싫었는데 벼락으로 지져줬다는 말에 통쾌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마인트 대륙에 상륙한 이후의 이야기는 실로 흥미진진했다. 그러다 대결장에서 다프네를 본 이야기를 했다.
“이런 나쁜 놈들! 감히 내 딸을……!”
으드득!
드래곤이 어금니까지 간다. 눈에 보이면 가루로 내버릴 정도로 분노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남작위만 따려던 계획을 바꿔…….”
블링크와 아공간 마법만으로 9서클 마스터를 제압한 이야기를 들은 라세안은 무릎을 치며 크게 웃는다.
“기발해! 정말 기발해! 자네는 하여간…….”
온갖 신기한 물건을 가진 인간이다. 그런데 하는 짓마저 신기하니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모양이다.
모든 대결에서 승리를 취하여 공작이 된 다음 가장 먼저 다프네를 상으로 골랐다는 말에 라세안이 미소 짓는다.
자신의 딸을 아껴주는데 어찌 싫겠는가!
“그래서 그다음은?”
“삼 일째 되던 날 작위식이 거행되어 공작이 되었지. 그리고 다프네를 상으로 골랐지. 다음엔 성대한 파티가 열렸는데 그때 갑자기 음악이 끊기더군. 그래서…….”
진짜 핫산 브리프의 시신이 발견되어 수도로 이송 중이라면서 신분을 물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곤 9서클 마스터 136명과 8서클 마스터 이상인 후작 300명에게 둘러싸인 이야기를 했다.
라세안은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화염의 브레스를 뿜어 몇몇을 죽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곤 자신도 놈들에게 당했을 것이다. 9서클 마스터가 너무나 많은 때문이다.
놈들 중 상당수는 마인트 대륙의 드래곤을 말살시키고 얻은 드래곤 하트의 마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놈들을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이 돋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자신이 창안한 멀티 스터리지 마법으로 9서클 마스터들을 아공간에 담았다는 말에 또 한 번 감탄사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방심한 적의 허를 찌른 기발하면서도 어이없는 대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놈들이 물러서더군. 그리곤 데스 나이트들이 등장했어. 살아 있을 때 최하 소드 마스터였더군.”
“그거야 자네가 그랜드 마스터이니……. 아, 그게 아니군.”
데스 나이트는 베어도 죽지 않는다.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검으로는 데스 나이트를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기에 하던 말을 끊은 것이다.
“놈들은 별거 아니었네. 검으로 휩쓸었더니 단번에 소멸되더군.”
“데스 나이트가 소멸돼?”
“그렇다네. 소멸되었네. 그러자 리치들을 투입하더군. 모두 아홉이었어. 9서클 마스터의 끝에 이른 놈들이었지.”
라세안은 놀랍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냥 9서클 마스터도 상대하기 어려운데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리치라면 어떻겠는가!
하여 얼른 물어본다.
“리치라면… 라이프 베슬을 깨지 않으면 끝없이 리스폰되는 존재잖아.”
“그래서 무척 애를 먹었지. 놈들을 제압하느라 마나의 절반을 소모했네.”
“어, 어떻게 놈들을 제압했나? 라이프 베슬을 깬 거야?”
“아니. 놈들의 라이프 베슬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네. 하여 내가 창안한 다이아몬드 마법을 썼지.”
“다이아몬드 마법?”
“응. 그 마법은 내가 놈들을 어찌 상대할까 하던 중 창안한 마법인데, 순간적으로 사방에서 압력을 가해…….”
잠시 다이아몬드 마법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라세안은 새로운 마법을 창안해 냈다는 말에 입을 딱 벌리고 있다.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 그래서?”
“놈들을 콩알만 하게 압축했지. 그리곤 내가 가진 강철 통 속에 넣어서 아공간에 담았네.”
말은 이렇게 했지만 현수가 언급한 강철 통은 소켓렌치이다. 볼트를 풀거나 죌 때 사용하는 공구 중 하나이다.
이것의 구멍 속에 콩알만 하게 줄어든 리치를 끼워 넣은 것이다.
다이아몬드 마법이 해제되려면 전방위에 걸린 압축이 동시에 풀려야 한다. 어느 한쪽부터 풀리게 되면 압력이 그쪽으로 쏠려 터지게 된다.
따라서 소켓렌치 안에 들어간 리치들은 누군가 빼주기 전엔 라이트 베슬이 있어도 결코 제 형상을 갖출 수 없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어떻게 리치를… 그것도 아홉이나……. 역시 자네는 대단해!”
라세안은 진심으로 탄복했다.
현수는 아공간에 담긴 소켓렌치를 꺼내 라세안에게 보여주었다. 단번에 사기(邪氣)를 느끼는 모양이다.
“이런 사악한 놈들!”
라세안이 이맛살을 찌푸리는 동안 현수는 아공간에서 Anaper Wax를 꺼냈다.
치과에서 주로 사용하는 이것은 ‘휴비트’라는 회사에서 만든 것으로 구강 내 장치에 의해 환자가 고통을 느낄 때 쓰는 것이다. 고품질 실리콘으로 제조한 이것은 투명하고 점도가 좋아 치아 교정 시 많이 사용된다.
현수는 적정량을 떼어내어 이를 뭉친 뒤 소켓렌치의 입구를 막았다. 일부러 빼지 않는 이상 빠지지 않게 한 것이다.
아홉 개의 소켓렌치 모두 같은 조치를 받고, 자그마한 상자에 담긴 뒤 아공간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