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6
영원히 꺼내지지 않을 마물이다.
“리치들을 제압하자 다시 덤벼들더군.”
“그래서?”
“꼬박 하루 동안 놈들과 대결했지. 공수를 전환하다 놈들의 반격을 받았네. 나는 앱솔루트 배리어로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구현되지 않았어.”
“왜?”
라세안은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7서클 이상이면 마법이 구현되지 않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걸 구현시킬 만큼의 마나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거야.”
“아아! 그, 그래서?”
“놈들의 공격이 내 몸을 두들겼네. 엄청난 고통이 엄습했지. 그 순간 나는 기절했네.”
“기절? 그, 그런데?”
기절을 했다 함은 반격의 의지를 가질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놈들에게 생포되어야 한다.
일이 그리 진행되었으면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없다. 하여 라세안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깨어나 보니 스승님의 레어에 있더군.”
“스승님? 멀린 말인가?”
“그래, 스승님의 레어에서 깨어났어. 그런데 시간이 엄청나게 흘렀더군.”
“어, 얼마나?”
“나중에 확인해 보니 2년 8개월 하고 21일이나 그곳에서 혼수상태로 있었어.”
“혼수상태라면 먹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살아 있지?”
지극히 상식적인 의문이다. 현수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답을 찾아내지 못 했다.
“그건 나도 모르네. 다만 스승님의 안배가 있어서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거지.”
“아아! 멀린!”
라세안은 현수뿐만 아니라 멀린까지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무튼 그래서 이곳에 왔네.”
“고생이 많으셨네.”
라세안은 홀로 수백 명에 이르는 8서클 마스터 이상의 마법사들과 당당하게 대결을 펼친 현수가 우러러 보인다.
그렇기에 저도 모르게 슬쩍 말을 높여준 것이다.
“고생은 무슨……. 다프네는? 이쪽에 잘 왔지?”
“그래, 지금 미판테 왕궁에 있네.”
“왕궁에? 다프네가 거긴 왜?”
“자네에게 걸맞은 신부가 되도록 예절교육을 시키는 중이네. 아마 잘하고 있을 것이네.”
라세안에 의해 졸지와 왕궁에 남게 된 다프네는 수없이 많은 선생을 만났다.
예절과 교양을 가르치기 위해 온 자들이다. 그런데 배울 게 없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미판테 국왕은 이미 완벽한 다프네에게 무엇을 더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는 음악과 미술이다.
그림을 그려보도록 했고, 악기를 다루도록 권했다. 그런데 드래고니안이라 그런지 정말 재능이 뛰어났다.
그림을 그리라고 캔버스와 붓을 주면 실제와 똑같이 그려냈다. 악기를 연주하라고 하면 가르친 선생보다도 더 감미롭게 선율을 연주해 냈다.
불과 2년 만에 음악과 미술마저 마스터한 것이다.
다음엔 무엇을 가르칠까 싶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방중술이다. 이실리프 왕국의 왕비가 될 것이니 침대 기술이 필요하다 여긴 것이다.
이걸 맡은 건 왕비와 후궁들이다. 그런데 이건 실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여 이론만 줄기차게 가르쳤다.
두 달이 지나자 더 이상 배울 게 없다.
국왕이 고심하고 있을 때 다프네가 정원을 가꿔보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요리도 배워보겠다고 하였다.
현수와 같이 다니는 동안 먹은 음식이 떠올랐기 것이다. 특히 라세안이 질겁하던 똥국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청국장이 없으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요즘 주방과 정원을 오가며 살고 있다.
“그나저나 쉐리엔과 만드라고라 채취를 부탁했는데 그건 어찌 되었나?”
“아, 그거? 엄청나게 쌓여 있지. 온 김에 가져가게.”
“나야 좋지. 말 나온 김에 가세.”
“그전에 로니안 공작에 관한 이야길 좀 하세.”
“장인어른? 아직 여기 계신가?”
“그래, 드래고니안 마을에 머물고 있지.”
잠시 라세안의 말이 이어졌다.
다프네를 미판테 왕궁에 데려다 놓고 드래고니안 마을로 가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여 왜 그런가를 물었더니 출정 준비 중이라 한다.
몬스터 사냥은 수시로 있는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듯하여 물어보니 한 떼의 인간이 라수스 협곡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한다.
라세안은 즉각 누구인지를 확인했다. 감히 자신의 영토에 허락도 받지 않은 발을 들여놓을 죄를 물으려는 것이다.
드래고니안의 안내를 받아 가보니 로니안 공작 일행이 머물고 있는 컨테이너가 보인다.
하여 현수와 관련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확인해 보니 로니안 공작 일행이 인솔자이고, 마르헨 영지의 영주 다이칸 히킨스 반 마르헨 자작, 후마엔의 영주 헤롯 에드윈 폰 후마엔 자작, 롤리아의 영주 에드워드 지린 드 롤리아 남작이 수행원이다.
이름을 들어보니 셋 다 라수스 협곡과 닿아 있는 영지들이다. 라수스 협곡으로의 통행이 제한된 이후 낙후되어 버린 영지이기도 하다.
로니안 공작은 라세안을 영접하면서 현수가 준 라수스 협곡 통행증을 보여주었다.
라세안을 만날 수가 없어서 허락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걸 보여주면 죽이지는 않을 것이란 말을 들은 때문이다.
현수가 남긴 것을 본 라세안은 통행증의 효력을 인정해 주었다. 드디어 인간의 출입을 허락한 것이다.
두 명의 자작과 한 명의 남작은 라세안에게 허리가 부러지도록 고개를 숙였다. 낙후된 영지가 되살아날 방도가 마련된 때문이다.
이날 이후 라수스 협곡엔 마차가 다닐 만한 길이 뚫리기 시작했다. 세 영지에서 보내온 병사와 영지민뿐만 아니라 드래고니안의 자식들까지 길 닦는 일에 투입되었다.
물론 품삯은 칼같이 지불되었다.
몬스터에 대한 방비 따위는 하지 않았다. 드래고니안이 있으니 감히 다가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길을 따라 들어온 상단 사람들은 드래고니안과 그 자손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이곳도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 것이다.
삼 년이 넘는 동안 길을 닦았지만 아직 완전하진 않다.
그러는 동안 로니안 공작 일행은 테세린으로 텔레포트를 했다. 공작위를 받고 너무나 오랜 동안 지체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의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로니안 공작 일가는 다시 라수스 협곡으로 되돌아왔다.
이곳에서 하는 일은 공사 감독이다.
라수스 협곡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을 꼽으라면 단연 혼돈의 숲 인근이다. 켈레모라니가 자리 잡았을 정도로 빼어나다.
라세안은 켈레모라니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다른 곳에 커다란 성채를 짓도록 했다.
성을 짓는 데 필요한 목재와 석재는 오크들이 조달한다. 드래곤의 명에 따라 노역에 동원된 것이다.
지어지고 있는 성은 하인스와 그의 아내들이 별장으로 쓸 곳이다. 라세안이 현수를 위해 선물을 마련한 것이다.
로니안은 고위 공작으로서, 그리고 세실리아는 공작부인으로서, 마지막으로 로잘린은 실제로 이 성을 이용할 사람으로서 공사 현장에 머물며 진두지휘를 하고 있다.
오크들이 가져온 석재 및 목재는 라수스 협곡의 드워프들이 다듬는다.
라수스는 이들에게 보석과 같은 성을 지어서 바치라는 명을 내렸다. 대가는 향후 500년간 공물 면제이다. 하여 드워프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아름다운 성을 짓고 있다.
“그래?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가세. 어차피 쉐리엔도 가져가야 하니. 텔레포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둘의 신형이 사라진다.
“어머! 자, 자기?”
허공에서 돋아난 두 존재를 보고 있던 로잘린의 눈에 굵은 눈물이 맺힌다.
꿈에도 그리던 사내의 모습이 보인 때문이다.
“너무 오랜만이지? 잘 있었어?”
“흐흑! 네.”
로잘린이 달려와 와락 안긴다. 현수는 조용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 정도 진정된 로잘린을 떼어놓은 현수는 로니안 공작 부부를 만나 인사를 했다. 둘 다 죽었다 살아온 자식을 맞이하듯 너무도 반갑게 인사한다.
잠시 후, 현수의 아공간으로 엄청난 양의 쉐리엔이 들어간다. 약 300,000㎥이다. 40피트 컨테이너 4,400개 이상이다.
만드라고라도 4,300뿌리나 채취해 놓았다.
이곳 라수스 협곡뿐만 아니라 바세른 산맥의 몬스터들에게도 협박을 가해 구해놓은 것이다.
“자, 받게.”
현수는 부라보콘과 자유시간을 라세안에게 넘겨주었다.
약속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준 이유는 3년간의 보관료를 포함한 것이다.
“흐흐흐! 흐흐흐흐!”
라세안은 아공간에 담긴 부라보콘을 보고 괴소를 짓는다. 조만간 있을 드래곤 회합 때 한몫 단단히 잡을 것으로 기대된 때문이다.
1년 전, 우연히 그린 드래곤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용병 차림을 하고 유희 중인 녀석이다.
안면이 있는 사이인지라 술 한잔을 같이했다. 다음 날 아침 라세안은 부라보콘 하나를 핥아 먹고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묻는 말에 어스 대륙 특산품이며 아르센 대륙에선 구할 수 없는 거라고 말했다.
그날 부라보콘 열 개를 팔았다. 그리고 황금 1톤을 받았다. 지구에서 하나에 1,000원쯤에 팔리는 걸 7천만 달러 정도 받은 것이다. 당시 환율로 따지면 840억 원이다.
무려 8,400만 배나 바가지를 씌운 셈이다. 그래도 맛만 좋다며 더 달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본인이 먹을 것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다시 아공간이 풍요로워졌다. 하여 라세안의 기분은 몹시 흡족하다.
현수는 모처럼 만난 로잘린과 장인, 장모, 그리고 라세안 등을 위해 요리를 했다.
찐만두와 군만두를 내놓았더니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사라진다. 하여 추가로 더 많이 만들어주었다.
모두들 굶고 살았는지 어마어마한 식욕을 보여준다.
로잘린과 세실리아 공작부인은 체면도 잊고 혼자서 4인분씩 먹어치웠다.
간장 찍은 만두의 오묘한 맛을 어찌 이들이 알겠는가!
만두 다음은 피자이다. 뜨거울 텐데도 잘들 먹는다.
냄새 때문인지 일을 하던 사람들이 코를 벌름거리며 다가온다. 현수는 아예 판을 벌였다.
드래고니안과 그의 후손들, 그리고 세 곳의 영지에서 온 영지민과 병사들도 만두와 피자 맛을 보여주었다.
당연히 환장한다.
물이 필요했는데 물 대신 시원한 맥주를 주었다.
“캬아! 크흐으! 어허, 시원하다! 와아!”
여기저기에서 감탄사가 연발한다. 요리사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을 때가 가장 기분 좋다고 한다.
현수는 이런 기분을 느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에도 작업은 계속되었다.
다른 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일하는 모두의 입가에 웃음이 배어 있다는 것이다.
현수는 적당한 장소를 잡아 앱솔루트 배리어를 쳤다. 타임 딜레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 안으로 들어가 마인트 대륙의 흑마법사들을 제압할 10서클 마법 창안에 몰두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바깥으로 나와 요리를 해주었다.
아공간 속의 식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하여 모두의 입을 즐겁게 해준 것이다.
그렇기에 일꾼들 모두 웃으면서 일을 한다.
그러는 사이에 라세안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사흘 후 되돌아 왔는데 그의 아공간에는 각종 마법서가 담겨 있다.
드래곤들에게 협조 요청을 한 결과이다.
9서클 마스터가 우글거리는 대륙이 있으며, 그곳의 드래곤이 모두 멸종당하면서 드래곤 하트를 빼앗겼다는 말에 모두들 기꺼이 마법서를 내놓은 것이다.
현수와 라세안은 결계 안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29일이 지났다.
“흐음, 챙길 건 대강 다 챙긴 건가?”
쉐리엔은 510,000㎥나 쌓여 있다. 40피트짜리 컨테이너 7,600대 이상의 분량이다.
만드라고라는 4,623뿌리나 챙겼다. 디오나니아의 잎사귀와 꽃, 그리고 열매와 수액도 왕창 담았다. 마지막으로 포인세의 잎사귀 역시 어마어마한 분량을 챙겼다.
“일단 지구에 다녀오자.”
30일이 지나면 안 되기에 서둘러 귀환하려는 것이다.
『전능의 팔찌』 49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