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2
글씨체를 보니 지현이 쓴 듯하다.
아래엔 각자 이름을 자필로 썼고, 주민등록번호와 주소, 그리고 지장까지 찍혀 있다.
자의로 작성한 문서이며, 내용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 이게 뭐야?”
현수는 살짝 당황했다. 지구로 귀환하여 아내들과 행복한 한때를 보낼 때 셋이 한 말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없는 동안 엄청 걱정한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허락한 거예요. 치이! 자기만 좋아졌어요.”
“우릴 전보다 덜 사랑해 주면 안 되는 거 알죠?”
“맞아요. 우리가 어렵게 결정한 거니까 그냥 받아들여요.”
이 말을 들은 당시엔 대체 뭔 말인가 했다. 앞뒤 다 자르고 중간만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무슨 말이었는지 이해가 된다. 하여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을 때 테리나가 쐐기를 박는다.
“다들 저를 인정했다는 뜻이에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테리나는 구걸하는 기분이 든 모양이다. 금방 눈이 축축해진다.
“테리나, 테리나 같은 여자가 왜 하필이면 아내가 셋이나 있는 내게 이래? 세상에 널린 게 멋진 남잔데.”
“다른 남자는 다 아니에요. 내겐 오로지 자기만 있어요.”
“끄응!”
어서 허락하라는 표정이다. 그러나 어찌 대답을 하겠는가!
“테리나, 아무래도 난……. 결혼할 때 아내들에게 더 이상은 없다고 약속했어. 그러니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 내가 좀 혼란스러워서 그래.”
우회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이는 완곡한 거절이다. 머리 좋은 테리나가 어찌 모르겠는가!
“아! 안 되는 거예요?”
급기야 테리나의 볼로 굵은 눈물 줄기가 흘러내린다. 하지만 짐짓 모르는 체했다. 몹시 곤혹스런 상황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테리나는 혼인승락서를 챙겨 투명한 홀더 파일에 끼워 넣는다.
“끄응!”
현수는 또 한 번 나직한 침음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굵은 눈물이 테리나의 무릎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인 때문이다.
“…자기가 없는 동안 생각 많이 했어요. 흐흑! 나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는 자기를 생각하며 잊으려 애도 썼구요.”
현수는 독백처럼 초점 없는 시선으로 이야기하는 테리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하지만 뭐라 말하진 않았다. 그러면 말려들기 때문이다. 이때 테리나의 독백이 이어진다.
“그런데 자기 생각만 더 났어요. 3년이 넘도록! 내가 왜 이런가 싶어 정신과 치료도 받았어요. 근데…….”
후두둑! 후두두둑!
굵은 눈물방울이 쉼 없이 떨어진다.
“흐흑! 나 정말 받아주면 안 돼요? 자기 아내들도 다 인정했는데. 흐흐흑!”
테리나는 서러움이 북받치는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의 양을 보아하니 아예 줄줄 흐르는 정도이다.
현수가 실종된 동안 테리나는 어떻게든 그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동분서주했다.
지현, 연희, 그리고 이리냐는 임신 상태였기에 테리나처럼 활동적일 수 없었다. 출산 후에도 마찬가지다.
셋은 산후 조리를 해야 하고 갓 낳은 아기를 돌봐야 했기에 테리나 혼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현수를 찾아다녔다.
한국은 물론이고 러시아, 콩고민주공화국, 몽골, 에티오피아, 북한, 아제르바이잔, 브라질 등을 헤매고 다닌 것이다.
이리냐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현과 연희는 테리나가 현수를 깊이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테리나는 헛소문을 듣고 몽골 자치령으로 들어갔다가 길을 잃었다.
안내를 맡은 사람이 고의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 자신이 받기로 한 액수가 적다 생각하여 골탕 먹인 것이다.
갑자기 홀로 남게 된 테리나는 이곳저곳을 헤매던 중 제법 깊은 협곡으로 접어들었다.
근방은 건조한 초원인 스텝지역이지만 이곳만은 제법 나무가 있었다. 개울이 있어서인 듯싶다.
그날 지현은 테리나가 건 위성전화를 받았다.
굶주린 늑대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이제 곧 놈들에게 잡아먹힐 것 같다면서 건 전화였다.
잠자리에 들었다가 화들짝 놀라서 깬 지현은 당황한 음성으로 그때의 상황을 물었다.
어찌어찌하여 나무 위에 올라 있기는 한데 높이가 낮고 그리 굵지 않아서 언제 부러질지 모른다고 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즉시 굶주린 늑대들이 달려들어 갈가리 찢길 상황이라는 것이다.
지현은 전화를 끓으라 하고 주영에게 연락하려 하였다. 혹시라도 몽골 정부에 연락하면 방법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테리나는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유언을 남길 것이니 끊지 말아달라고 했다. 이런데 어찌하겠는가!
지현은 테리나의 유언 아닌 유언을 들었다.
“흐흑! 이제 전 곧 죽겠지요? 제 육신은 갈가리 찢겨 늑대들의 뱃속으로 들어갈 거예요.”
“테리나,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근데 거기 조금 더 튼튼하고 높은 나무 없어요?”
“없어요. 여긴 스텝지역이라 굵은 나무가 없는 데예요.”
“어떻게 해요, 그럼?”
지현이 걱정스레 말하자 테리나의 음성이 이어진다.
“저, 고백할 게 있어요. 근데 말해도 되나 모르겠어요.”
“말해봐요. 들을 준비되어 있어요.”
“저, 현수 씨를 몹시 사랑해요.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바칠 수 있을 정도로요.”
“……!”
지현은 느닷없는 고백에 잠시 말을 끊었다.
“흐흑! 근데 절 밀어내요. 아내가 셋이나 있다는 걸 아는데… 나는 안 된대요. 흐흐흑!”
“아! 테리나…….”
“아무래도 난 시신조차 못 남길 것 같아요. 그래서 전화했어요. 지현 씨는 현수 씨의 아내니까요.”
지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현수 씨에게 제가 정말로 사랑했다고 전해주세요. 사랑받지 못한 건 아쉽지만 온 마음을 다해 진정으로 사랑해서 행복했다고 전해주세요. 흐흐흑!”
“테리나!”
“미안해요. 당신에게 상처 주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제 마음이라도 전해달라는 뜻으로 고백한 거예요.”
“테리나!”
“현수 씨의 아내가 되어 그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잠드는 꿈을 꾸곤 했어요. 그 생각만으로도 좋았어요. 절 받아주지 않았지만 미워하진 않아요. 제 소중한 사랑이니까요.”
테리나와 지현의 이런 대화는 약 5분간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늑대들은 으르렁거리면서 테리나를 물으려고 계속해서 뛰어올랐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다.
한 놈이 테리나의 발을 무는 데 성공했다. 너무 놀라 움츠리는 바람에 신발이 벗겨졌는데 동시에 전화기를 놓쳤다.
“아앗!”
툭―!
으와앙! 으르렁! 크르르르!
“테리나! 테리나! 테리나! 제발! 테리나, 전화 좀 받아요! 테리나! 제발요.”
크르르! 우와앙! 크르르르!
지현은 사나운 늑대들이 서로 먹이를 빼앗으려 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테리나! 제발, 제발 살아서 돌아와요. 그이가 오면 테리나도 받아들이라고 얘기할게요. 제발요!”
이 순간이다.
타앙―!
퍽―! 뛰, 뛰, 뛰, 뛰―!
전화가 끊기자 지현은 통화 기록을 뒤져 테리나와의 연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더 이상 통화는 할 수 없었다.
놀라서 주영에게 전화를 걸었고, 주영은 몽골에 연락했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테리나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흘 후 지현은 테리나와 통화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를 묻자 돈을 더 받을 목적으로 테리나에게 골탕을 먹이려던 안내인이 총을 쏴서 굶주린 늑대들을 쫓았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가 쏜 총알에 위성전화가 망가져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안내인에게 전화가 있었지만 지현의 번호를 외우고 있는 게 아닌지라 무사함을 알리지 못한 것이다.
하여 주말이 지난 후 어렵게 서울고등법원에 전화를 걸어 통화한 것이다.
지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을 찾으려다 애먼 사람을 늑대 밥으로 만들 뻔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 테리나가 귀국했다. 정신적 충격이 크다 판단하여 급거 귀국하도록 한 것이다.
김포공항에 마중 나간 지현은 테리나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다시 며칠 후, 지현과 연희, 그리고 이리냐는 양평 저택에 모였다.
현수의 생사조차 알 수 없지만 테리나의 거취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기 위함이다.
그날 밤, 조금 전 현수가 본 혼인승락서가 작성된 것이다.
어쨌거나 테리나는 지난 3년간 현수를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동분서주했다.
러시아, 콩고민주공화국, 에티오피아, 몽골, 남한, 북한, 브라질, 아제르바이잔, 미국, 일본, 지나 등지에 뿌려진 전단지가 1억 장이 넘는다.
그래도 아무런 소식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왔다고 한다.
연락을 받을 때 테리나는 앙골라의 깊은 정글에 있었다. 그곳에서 현수를 보았다는 제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 통상부 국장 왕리한에게 금괴를 인도할 때 그곳에서 작업하던 지나의 특수부대 소속 중사가 제보자이다.
당시 앙골라 담바 지역에선 정부군과 반군 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테리나는 정글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현수의 행방을 찾았다.
동행한 드미트리 알렉세이 다닐로프가 없었다면 현지에서 고용한 경호원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할 뻔했고, 반군들에게 생포되어 인질이 될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교전지대로 들어가는 바람에 총알이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고, 수류탄이 터지는 바람에 파편에 맞아 발목 부상을 입기도 했다.
늪을 건너다 악어와 표범의 동시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야말로 위기의 연속이었다. 하늘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결코 살아서 나올 수 없을 지옥을 헤매고 다닌 것이다.
어쨌거나 현수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테리나는 곧바로 귀국했다. 어제의 일이다.
도착하자마자 북한으로 향하는 자가용 제트기에 동승했고, 현재에 이르러 있는 상황이다.
“그럼 쉬세요.”
혼인승락서를 가방에 챙긴 테리나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왠지 쓸쓸해 보이지만 신경 써줄 수 없다. 마침 욕실 문이 열리면서 백설화가 나온 때문이다.
“……!”
백설화는 하얀 타월로 가슴과 아랫도리만 간신히 가리고 있다. 발에는 욕실용 슬리퍼를 신고 연한 베이지색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비비고 있다.
현수는 잠시 시선이 머무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본능이다. 그러다 금방 실수를 깨달았다.
“허험! 목욕 다 한 거야?”
“네에.”
의도적으로 이러고 나왔지만 몹시 부끄럽다. 하여 백설화의 두 볼은 붉게 달아올라 있다.
“조금 출출한데, 뭐 먹을래?”
“네에? 또 먹어요?”
현수는 김정은 제1위원장과 저녁을 먹고 왔다.
북한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최고급 식당으로 여기는 청류관의 진미들을 맛보았다.
현수의 수행비서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백설화는 음식이 너무나 맛있어서 과식했다. 현수 역시 상당히 많이 먹었다. 그런데 출출하다고 하니 멍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정식 주방은 아니고 샌드위치 정도는 만들 수 있다.
거의 주방에 다다랐을 때 왠지 위화감이 느껴진다.
“……!”
몸을 돌려보니 백설화는 부지런히 머리를 말리고 있다.
백화원 영빈관은 현재 초특급 경호 중이다. 영빈관을 중심으로 반경 2㎞까지 경호원들이 배치되어 있다.
최대사거리 2,270m, 유효사거리 1,700m인 M―200 LRRS 체이탁이라 할지라도 현수에게 해를 입힐 수 없는 곳까지 경호 중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백화원 영빈관의 옥상엔 레이더부대도 배치되어 있다. 미사일 공격까지 감안한 것이다.
타국 국가정상이 북한을 국빈으로 방문했을 때에도 이런 경호는 실시되지 않는다.
현수는 북한의 식량, 비료, 전력, 연료 문제를 해결해 준 소중한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가스관 연결 공사, 기계공업단지, 유화단지 공사를 발주함으로 경제에 숨통을 터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