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4
이를 알게 된 대장선의 부하가 이렇게 말한다.
“장군, 송구하지만 더 이상 우리 배가…….”
노를 아무리 저어도 소용이 없으니 곧 배는 파손되고 병사들은 모두가 죽을 것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이순신도 이를 알기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이순신의 시선을 받은 병사들과 의병들은 담담한 시선으로 자신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라를 위해 왜적들에 맞서 싸운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표정이다.
이때 대장선에 여러 개의 갈고리가 걸린다. 그리고 누군가 외친다.
“장군님! 지들이 끌겠습니다요!”
회오리 바다에 빠진 대장선을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은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이들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배를 끌어준 덕에 대장선은 무사히 빠져나온다.
전투가 끝난 후 수군 병사들끼리 주고받는 대화가 나온다.
“내가 아까 왜놈 여남 놈을 쫙 째려븐께 오줌을 찍 싸는 거여. 나가 이런 놈이여!”
“와하하하하!”
“근디 나중에 우리 후손 아그들이 우리가 이러구 개고생한 것을 알까?”
“아따, 모르면 참마로 호로자슥들이제.”
이 대사를 듣는 순간 현수는 가슴속에서 확 끓어오르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3년 전 기억 속에 묻어둔 것들이 떠올랐다.
욱일회(旭日會) 명단과 働き手名簿(유능한 일꾼 명부)이다.
욱일회 명단엔 당시 여당 사무총장 박인재를 비롯하여 같은 당 소속 홍신표 의원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현직 국회의원 447명을 포함한 3,137명의 이름도 있다. 주로 예전의 여당과 관계된 자들이다.
유능한 일꾼 명부엔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요인을 납치하거나 유인 및 암살 등을 직접 행동으로 옮길 행동대원 4,113명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당시엔 바쁜 일이 많아 그대로 지나쳤지만 이젠 아니다. 한반도에 다시는 임진왜란이나 을사늑약 같은 일이 벌어져선 안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늑약(勒約)이란 억지로 맺게 하는 조약이다.
‘가만있을 때가 아니군.’
생각난 김에 침실로 자리를 옮겨 노트북을 꺼내 이실리프 정보의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이 홈페이지의 메인 뷰는 달랑 로그인 창 하나뿐이다. 이렇기에 인터넷으로 검색조차 잘 안 되는 페이지이다.
회원 ID는 16자리이고 비밀번호는 32자리나 된다. 모두 한글과 숫자, 그리고 특수문자가 섞인 것이다.
이 정도면 어마어마한 보안이다.
그런데 단번에 로그인하지 못하면 12시간 동안 같은 IP로 접속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로그인을 시도한 자가 누구인지를 역추적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다.
이실리프 정보의 내규를 보면 로그인 실패자가 있을 경우 반드시 확인하도록 되어 있다.
어쨌거나 ID와 비번을 입력하여 로그인에 성공했다 하여 곧바로 내부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로그인 직후 무작위로 바뀌는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정답을 입력해야 한다. 주관식이다.
어쨌거나 로그인을 마치자 곧바로 문항이 뜬다.
문)고구려 19대 왕의 재위 기간과 이름, 그리고 재위 시 칭호와 묘호를 순서대로 쓰시오.
답)391∼413년, 담덕(談德), 영락대왕(永樂大王),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내용을 입력하고 엔터키를 누르자 화면이 바뀌면서 두 번째 문항이 뜬다.
방금 입력한 답안이 틀렸다면 즉시 로그아웃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접속하려면 이실리프 정보로 직접 전화를 걸어 신분을 확인해야 같은 ID로 접속 가능하다.
축하합니다!
1번 문항에 대한 정답을 입력하셨습니다.
자, 다음은 두 번째 문항입니다. 고려 19대 왕의 재위 기간과 이름, 그리고 묘호를 순서대로 쓰시오.
답)1170∼1197년, 호(晧), 명종(明宗).
두 번째도 무사통과하자 세 번째 문항이 뜬다.
두 번째 문항에 대한 정답을 입력하셨습니다.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하신 듯하군요.
다음은 세 번째 문항입니다. 조선 19대 왕의 재위 기간과 이름, 그리고 묘호를 순서대로 쓰시오.
답)1674∼1720년, 순(焞), 숙종(肅宗).
재위 기간까지 묻는 것은 한반도의 역사를 모르는 자는 아예 접근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어쨌거나 답안을 입력하고 엔터키를 누르자 화면이 바뀌어 이실리프 정보의 메인페이지가 보인다.
세계 각지에 파견된 첩보원들이 시시각각 입력하는 보고 페이지와 상부에서 내리는 지시 페이지가 있다.
이것들 모두 약속된 자들만 열람하도록 별도의 비밀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실리프 정보의 첩보원이라도 자신에게 허용된 것 이상은 볼 수 없다.
보안을 위해 이중삼중으로 바리케이드를 쳐놓은 것이다.
하지만 현수의 아이디는 이러한 제약이 없으므로 이런저런 페이지를 모두 열람할 수 있다.
잠시 시간을 내서 살펴보니 미국, 지나,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은 물론이고 자치령에도 상당수가 파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페이지에 접속해 있으면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 상황을 한눈에 꿰뚫을 수 있었다.
더 살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다. 하여 훗날을 기약하고 자료실로 들어가 원하는 자료를 검색했다.
“흐음! 찾았군.”
현수가 클릭해 놓은 건 한반도 주변 해저지형도이다.
언젠가 한번 흘깃 본 것인데 기억대로 강원도 앞바다엔 강원대지(강원대지(Gangwon Plateau) : 동, 서로 분할되어 있는 한국 대지의 서쪽 부분에 있는 해저 대지.)가, 울릉도 북쪽엔 울릉대지(울릉대지(Ulleung Plateau) : 동, 서로 분할되어 있는 한국 대지의 동쪽 부분에 있는 해저 대지.)가 존재하고 있다.
둘을 합치면 동서로 250㎞, 남북으로 200㎞ 정도 되는 상당히 넓은 땅인데, 수심은 500m 이내이다.
이것들을 합쳐 한국대지(한국 대지(Korea Plateau) : 강원도와 울릉도 북부 사이에 걸쳐 동서로 폭이 약 250㎞, 남북의 길이가 약 200㎞에 이르는 거대한 해저 대지.)라 부르는데 상당히 넓다.
이와 별도로 울릉도의 주변엔 김인우 해산, 이규원 해산, 그리고 안용복 해산이 있다.
이것들이 융기되면 엄청난 넓이의 땅덩이가 생기게 된다.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니 경상남북도와 강원도를 합친 크기 정도 된다. 약 5만㎢이니 대한민국 영토 전체의 절반 정도이다.
한편, 독도의 동남쪽엔 심흥택 해산이 있다. 그리고 독도의 현재 면적은 약 0.19㎢이다.
만일 독도 주변과 심흥택 해산 인근을 120m 정도 융기시킨다면 각각 75㎢와 36㎢짜리 섬으로 바뀌게 된다.
현재보다 584배나 넓어지는데 강남, 서초, 송파구를 모두 합친 것보다 약간 좁은 면적이다.
‘흐음! 일단 노에디아를 불러봐야겠군.’
테리나와 백설화는 영화를 보고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갔으니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리아니!”
“네, 주인님.”
부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날갯짓을 하며 나타난다.
“노에디아 좀 불러줘.”
“네, 주인님. 노에디아, 주인님이 부르신다. 어서 나타나.”
아리아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노에디아가 나타난다. 이전에 비해 확연히 빠른 속도이다.
“노에디아가 마스터를 뵙습니다.”
“뭐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왜 이렇게 빨라?”
“네, 보고드릴 게 있어서 와 있었어요.”
“그래? 그랬어? 아무튼 보고는 조금 있다 하고, 노에디아, 이게 뭔지 보여?”
노트북을 슬쩍 돌려놓자 노에디아가 잠깐 바라본다.
“동해의 해저 지형이군요.”
“그래? 아니 다행이네. 노에디아, 해저 지형을 융기시켜 달라고 하면 가능해?”
“…가능은 하죠. 대신 어딘가는 가라앉아야 해요. 그리고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리는 일이구요.”
“그래? 가능은 하단 말이지?”
현수는 눈빛을 빛내며 어느 한 부위를 보고 있다.
오키 군도이다. 일본 혼슈[本州] 시마네현[島根縣]에 딸린 섬으로 전체 면적은 약 241㎢이다.
시마네 반도에서 북쪽으로 60km 떨어져 있는데, 4개의 큰 섬과 약 180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수는 오키 군도를 손으로 짚으며 노에디아를 보았다.
“노에디아, 이것들을 해저로 가라앉히는 정도면 강원대지와 울릉대지를 융기시키는 게 가능해?”
현수가 손으로 가리킨 것은 한국대지 일대였다.
“아뇨. 방금 말씀하신 것들을 육지로 만들려면 오키 군도만 가지곤 부족해요.”
“그럼?”
현수의 물음에 노에디아는 히로시마 북쪽의 마스다에서 시작하여 이즈모, 마쓰에, 돗토리를 지나 후쿠아, 가네자와와 노토반도까지 짚는다.
혼슈 서남부 해안 거의 전부이다.
“이것들까지 잠기게 하면 얼추 될 것 같아요.”
“그래?”
현수는 일본 지도를 보며 턱을 괴었다. 노에디아가 짚은 곳 중 호쿠리쿠 공업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들이 잠기게 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자칫 해양이 오염될까 싶은 때문이다.
“여기 주고쿠 산맥과 기비고원 지대까지 잠기게 하는 건 어때? 여기 후쿠이와 가네자와 대신에.”
주고쿠 산맥(中國山脈)은 일본 서쪽의 주고쿠 지방에 있는 산맥으로 동쪽의 효고현부터 서쪽의 야마구치현 해안까지 약 500㎞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다.
기비고원은 이 산맥의 동쪽에 위치한 고원지대를 칭한다.
“흐음,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노에디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저지대보다는 산맥과 고원 같은 고지대를 잠기게 하는 것이 훨씬 많은 부피를 잠기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말한 오키 군도와 그 주변 대륙붕은 수심이 300m가 넘었으면 좋겠어.”
“그러죠. 그럼 해수의 흐름이 조금 더 원활하겠네요.”
노에디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현수는 조금 더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한해협 부근이다.
5장 한국대지와 탐라도
“여기 이곳으로 이렇게 쿠로시오 난류가 흐르는데 여기에 기다란 해수로 협곡을 만들면 어떨까?”
“폭은 얼마나 하고 깊이는 얼마로요?”
“깊이는 500m쯤, 폭은 40㎞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현수가 이곳을 지목한 이유는 이렇게 할 경우 포항과 영덕의 동쪽에서 동한난류와 동한한류가 만나게 되어 어족자원이 풍부한 어장이 형성될 것으로 본 때문이다.
노에디아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린다.
“왜? 무슨 문제 있어?”
“말씀하신 해저 협곡을 만들려면 다른 곳에 그만큼 땅이 융기되어야 하는데 어디가 좋을까 해서요.”
“그래? 그럼…….”
현수는 잠시 해저지형도를 살펴보았다. 그러다 눈에 뜨이는 곳이 있어 손으로 짚었다.
“여기 이곳과 이곳을 융기시키면 될까?
현수는 제주도 좌우에 제주도보다 각각 두 배 정도 큰 타원(4,000㎢)을 그렸다. 두 곳이 융기되어 육지가 된다면 제주도를 좌우에서 감싸는 모양새가 된다.
제주도의 명칭을 제중도로 바꾸고 동쪽의 섬을 제동도, 서쪽의 섬을 제서도라 부르면 좋을 듯싶다.
해저 지형대로 융기된다면 제동도와 제서도의 동단과 서단에는 제법 높고 기다란 산맥이 솟아 있게 된다.
이는 제중도(제주도)로 부는 강한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럼 이것들을 융기시켜서 이 섬에 붙여요?”
세 개의 섬을 모두 붙이느냐는 뜻이다.
“아니. 해양자원도 필요하니까 적당히 띄워놓되 가장 가까운 곳은 2㎞ 정도로 해서 다리를 놓을 수 있게 해줘.”
“하나요?”
“에이, 하나 가지고 되겠어? 적어도 대여섯 개는 만들어야 오가는 게 편하지. 안 그래?”
“그건 그래요. 그리고요?”
노에디아는 요구할 게 있으면 아예 한 번에 다 하라는 표정이다. 정령들도 시켜놓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또 다른 일을 시키는 건 질색인 모양이다.